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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별 수 없이 영감의 마누라일 뿐이다


BY 만석 2019-10-23

나는 별 수 없이 영감의 마누라일 뿐이다
 
산행을 하고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대문 앞에 다다르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지금 시각이 5시 40분. 20분만 누웠다가 밥을 해야지. 6시 10분. 6시 15분. 6시 18분. 6시 22분. 6시 30분. 에구. 영감이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감을 물어뜯었다.  젠장. 일어나야겠다. 크~. 다리가 천근이나 되는 것 같았다. 허리에서 우직근 소리가 났다.
 
사실은 산을 벗어나 큰길에 들어서며, 저녁밥을 해결하고 들어오고 싶었다. 그러나 분식집, 나무국수집, 순대국집. 오늘따라 딱히 끼니를 해결할 만한 식당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다리가 아파서 먹자골목까지 가는 건 내키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해결하고 들어올 걸.’
 
영감은 안방에서 야구를 관전 중이었다. 일본과 주니어 세계선수권 대회를 하는 것 같았다. 두 손을 머리 밑으로 깍지를 끼고 길게, 아주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저녁을 먹고 들어가자고 말해 주지 않은 영감이 야속했다. 투덜투덜 거리며 주방으로 들어섰다. 밥을 안치고 불을 켜고는, 식탁 앞에 턱을 괴고 앉았다.
 
‘뭐여. 아니, 똑같이 산을 타고 와서, 나는 밥을 해야 하고 영감은?’ 부화가 났다. 남자는 뭔데? 남자는 무슨 특권이야? 당신이 나보다 잘난 게 뭐야? 당신도 이젠 별 수 없는 백수인 주재에.  '오늘은 한 소리 해야겠다.'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가다가, 느닷없는 영감의 환호에, 깜짝 놀라 주춤했다.
“홈런!” 박수를 치며 벌떡 일어나 앉기까지.
 
‘나, 왜 여기 섰는 거야.’나는 그만 안방 문 앞에 섰는 이유를 잊었다. ‘아~. 밥. 저녁밥 때문이었지.’ 그런데 시방 영감한테 가서 어쩌자는 거야? 밥상 차리라구? 아서라 말어라. 기왕에 안친 밥이고 영감도 시방 이왕에 좋은 기분이니…. 밥상을 차리라고 해서  차릴 영감도 아니거니와, 무슨 좋은 소리를 듣겠다고.
 
“빨래 널어주고 걷어주는 아저씨랑 사는 사람은 좋겠다.” 권사님 네 옥상에서 훤히 보이니까 할말 없었지.
“청소기까지 돌려주시는 아저씨는 업어드려.” 마침 영감이 청소기를 돌리는데 마실을 왔다가, 동네에 소문을 냈으니 그도 할 말은 없었다. 권사님은 남편과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으니 부럽기도 했겠다. 
 
아니, 나는 뭐, 아무 것도 안하나? 손빨래도 내가 하지, 걸레질도 내가 하지. 김치도 내가 담그지, 그리고 아직은 집안 대소사(大小事)도 내가 챙겨야 하구. 내 아이들 챙기기는 일은 수월한 줄 알아? 내가 한 달만 없어져 보라지. 집안 꼴이 어떻게 되나. 혼자서 푸념을 떨었다.
 
끙~! 그러나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아무 소리 말고 감수하자. 투정을 해 봤자고 심통을부려 봤자지. 오늘 오랜만에 산을 타고는, 내가 너무 힘이 들었던 것 같았다. 만보기를 들여다보니 만보를 조금 넘었다. 그런데 비탈을 타서 그런지 길로 만보를 걸을 때보다 많이 힘이 들었다.
 
안방에선 영감의 함성이 또 터졌다. 우리나라가 일본을 제압한 모양이었다. 암 일본은 무조건 이겨야 해. 나도 좋아진 기분으로 부지런히 상을 차렸다.
“여보~! 진지 잡숴요.” 큰소리 쳐봤자, 나는 별 수 없이 영감의 마누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