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척 헛일만 했네
밝은 햇살이 아침 기분을 들뜨게 한다. 아, 이제 장마가 끝나려나? 축축하고 후텁지근하던 끝이라 기분이 여간 상쾌한 게 아니다. 뭔가 힘을 써서 일을 하고 싶다. 옳거니. 장마 핑계로 물걸레질에 게을렀지. 그래. 어디부터 손을 댈까. 우선은 창문틀이 먼저지. 아닌 게 아니라 창문틀이 가관이다. 그동안 들이친 빗발에 먼지가 쌓였는가. 에구~. 마누라 게으른 티가 역력하다.
허긴 그동안 나도 바쁘긴 했지. 남들은 휴가다 여행이다 하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데, 이 시원찮은 몰골은 서울에 산재해 있는 종합병원을 두루 시찰(?)하고 다녔으니. 신경과, 내분비내과, 소화기내과. 거기에다 안과며 산부인과 등을 두루 두루 다녔으니, 참 말로 하기도 쑥스럽구먼. 정기검진에 예방 차원의 암검사였으니, 뭐 그리 걱정스러운 일은 아니어서 다행이긴 하지.
두루 거치는 곳마다 결과는 좋다 하니 이보다 더 고마울 데가 있으랴. 그러나 대형병원은 사실 늙은이들이 찾아다니기에는, 힘들고 피곤하더라는 말씀이지. 아들들도 딸들도 며느리들도 나보다 더 바쁘게 사니, 나를 모셔 달라고 하기에는 아직 이른 투정이다. 어제로 모든 검사를 마치고 좋은 기분으로 잠을 청했으니, 오늘 아침의 기상도 제법 밝은 기분이더라는 말씀이야.
요새로는 미세먼지도 그 농도가 제법 반가운 수치라, 창문을 활짝 열어 하얀 창문 샷시에 까맣게 앉은 먼지를 닦아낸다. 안방이며 거실의 베란다며, 부엌의 베란다와 창문. 작은방의 창문틀 화장실의 창문…등. 휴~. 손바닥 만 한 집에 되지 못하게 무슨 창문은 그렇게나 많은지. 게다가 통판유리랍시고 다루기도 힘들고 조심스럽다.
무겁긴 또 왜 그리 무거운지.
그런데 유리창을 청소할 때마다 느끼지만, 아무래도 시공한 사람의 머리가 나만큼이나 잘 돌아가지 않았나 보다. 이쪽에서 창밖으로 손을 뻗어 닦았으면. 그 나머지쪽은 저쪽으로 손을 뻗어서 닦을 수가 있어야 하질 않은가. 창문의 가운데는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손이 닿지를 않으니 이 노릇을 어쩌랴. 물을 마음대로 쓸 수도 없고, 막대를 사용해도 손으로 닦느니만 한가.
내 등뒤에서 어슬렁거리던 영감이 그 큰 키와 긴 다리를 뻗고, 긴 팔을 힘껏 창문 밖으로 내놓는다. 영감의 상체가 창밖으로 거의가 다 나가니 위험스럽기가 짝이 없다. 아서라. 남들 눈엔 늙었거니, 그래도 아직은 내 곁에 있어줘야 할 위인이 아닌가. 허리를 잡고 매달리니 무방비던 영감이 기겁을 하며 몸을 사린다. 나는 우스워죽겠는데, 영감은 많이 놀랐는지 화를 낸다. 그래도 좋다. 깨끗해진 유리창문을 보니 기분이 좋다.
아무튼 뺑뺑 돌며 창문 닦기를 끝내고 겨우 거실의 의자에 앉아, 보이차 한 잔씩을 마시며 숨을 돌린다. 조금 전 놀라던 영감의 표정을 곱씹으며 혼자 씽끗 웃어 보는데,
“우루루 쾅! 지~끈.”밖에서 마른천둥이 운다. 곧 이어 다시 한 번 더 운다.
“어~라. 비 오는 거 아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걱정스럽게 외친다.
“따따따르릉~. 우지끈 쾅!” 제법 가까이까지 몰려오는가 보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퍼붓는다.
쏴~~~~~~. 오 마이 갓! 망설임도 없이 한꺼번에 내리 퍼 붓는다. 바람도 뒤질세라 내리는 비의 이 뺨 저 뺨을 후려친다. 삽시간에 비는 베란다며 거실까지를 적신다. 열린 창문을 닫으러 이리저리 뛰다가,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구먼. 오늘 아침엔 부지런한 척 헛일만 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