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미도 힘이 든다
이쪽에서 시어미를 성토하면, 저편에서 다시 시어미에 대한 원성이 터진다. 그런데 그 성토와 원성이 구구절절이 옳으니 어쩌랴. 시어미의 입장에서도 대항을 해 볼 명분이 없더라는 말씀이야. 어두워진 시력과 쇠약해진 체력이 세월이라는 덮개를 쓰고, 나를 비롯한 많은 시어미들을 서럽게 만든다. 그러나, ‘며느리가 늙으면 시어미가 되는 것’이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으니 이건 고집인가 아집인가.
나는 아이들의 집에 먹을 것을 공수하는 일은 이미 포기한 지가 오래다. 반갑지 않다는 며느리들의 함성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거늘, 내 며느님이라고 다르랴 싶어서다. 아마 지례 주눅이 들어서, 나 스스로 일찌감치 방어막을 쳤는지도 모른다. 섭섭한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일이 줄어드니 편해서 좋다는 쪽으로 자위를 하며 쓴웃음을 지어 본다.
어느 날, 내 밥을 먹고 싶다는 부부를 집으로 초대할 일이 생겼다. 밥상에 올릴 오이김치를 담그고 보니, 오이김치를 무척 좋아하는 작은아들이 눈에 밟힌다. 입안 가득히 오이김치를 물어뜯는 밉지 않은 액션이 눈앞에 선하다. 볼이 터질 듯 오이를 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저 여유로운 만감의 여유. 마침 입국을 해서 가까이에 있으니 먹이고 싶은 게 어미의 마음인지고.
며느리들이야 반갑지 않다고들 하나, 내 아들은 반가울 것이다. 바쁜 며느님이 오이김치를 해 먹였을 리가 없지. 오이김치를 담글 줄이나 알려나? 빙긋 혼자 웃어 보고는, 마침 점심시간이지 싶어서 막내아들에게 문자를 보내 본다.
“저녁 먹으러 오련? 오이김치가 맛있게 됐는데.
"오이김치 먹어본지 오래 됐네요." 아군이라도 얻은 전투병사 같이 내 어깨에 힘이 실린다.
곧, 오빠의 연락을 받았다며 막내며느님한테서 문자가 날아온다.
“어머님. 저희들 가면 오이김치 싸 주기도 하시나요? 저희들 며칠 있다가 출국할 텐데요.”
그러니까 오이김치를 얻어서 제 집에 갖다놓고, 며칠 동안을 실컷 먹겠다는 말이겠다. 아주 명랑한 목소리로 내 오이김치 맛이 늘 그리웠다고도 한 술 더 뜬다. 암. 싸 주고말고.
모회사(母會社)의 지사장(支社長)으로 있던 아들이, 독립을 해서 한국에 새 둥지를 틀게 된다고 한다. 아직 젊은 나이에 대표가 된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늘 그립던 세 식구들을 자주 보게 되는 것도 신나는 일이겠다. 그러나 두 며느님을 섬길 일이 살짝 걱정스러운 게 솔직한 고백이다. ‘자식도 아롱이 다롱이’라 했으니, 며느님들도 ‘초록은 동색’이 아니겠는가.
너무 과하다 싶을 만큼 조용한 큰며느님에 비해서, 막내며느님은 겁도 없이 마냥 밝다. 이제 큰 며느님의 성향이야 꿰뚫어 볼만큼은 되었으나, 그동안 멀리 두고 일 년에 고작 두어 번씩의 상면을 하던 막내며느님은 모든 게 생소하다. 요사이로 나는, ‘아, 그녀에게 이런 면이 있었구나.’하고, 여러 번 놀라고 있는 중이다.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으니, 좋은쪽으로만 생각하자.' 고 마음을 다져 먹는다.
인터넷을 달구는 며느님들의 성토에, ‘나는 그리 말자.’고 반성과 각오를 매일 다진다. 그러나 그건 내 입장이고 며느님의 입장에서는 나도, ‘어쩔 수 없는 못 된 시어미’겠지. 한 며느님의 좋은 시어미도 되지 못한 주제에, 두 며느님의 시어미 노릇이 쉽겠느냐는 말이다. 요새로 자주 큰 숙제를 앞 둔 학생이 되곤 한다. 가끔은 턱을 괴고 앉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흉내 내 어 보기도 하는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