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니 네 가는 길
“동네 한 바퀴 안 돌라요? 나, 나가는데.”
“난, 양주 갈 텐데.”
“….”
양주를 간다는 건, 일전에 산소를 이장한 시부모님을 뵈러 간다는 말이다. 미리 얘기를 해야 나도 나름대로 준비를 하지 않겠는가. 잠시 째려보다가 이내 어깨를 내려놓는다.
이왕에 가는 길이면 좋게 가자.
길이 머니 간편하게, 그리고 좀 가볍게 입고 나선다. 속으로는 아마 내가 따라나서 주었으면 싶었나 보다. 영감의 기분이 썩 좋아 보인다. 신발장에서 내 운동화를 손수 꺼내 놓는다.
“다음엔 좀 일찍 나서요. 이렇게 나서면 점심을 어째요.”
“다녀와서 먹으면 되지.”곧 죽어도 사먹는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나는 나갔다 오면 밥하기 싫은데.
이렇게 해서 길을 나섰는데 어머나.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내리니 세상에. 억센 눈보라가 친다. 아닌 춘삼월에 이게 웬일이람.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일기예보를 놓쳤네. 택시를 잡으려고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때를 맞추어 마을버스가 다가온다. 아무튼 타자. 더 가서 택시를 잡으면 요금이라도 덜 나오겠지. 우리는 초행길이라 기사님에게 길을 물을 수밖에.
“아~. 추모공원요?! 요번에 내리셔서 전화 하시면 셔틀버스가 나와요.”
아직 눈보라는 치는데 추모공원쉼터에서 전화를 하니, 단 바람에 셔틀버스가 달려온다. 참 좋은 세상이다. 추모공원이 불곡산의 고운 자락에 위치하고 있기에, 산새가 좋아서 택했으나 교통편을 걱정했던 터다. 이만하면 우리 차를 이용하지 않아도 되겠다. 사실은 매일 주차장에 세워만 두는, 자동차의 경비가 아까워서 차를 없앨 량이다. 차 없이도 추모공원에 다니기가 용이한가를 살피러 겸사견사 나온 게다. 공짜 전철을 타고 마을버스를 이용하고 셔틀버스를 부르면 되겠다.
추모공원에 다다르고 시부모님을 뵙는다. 사진 속 아버님과 어머님은 오늘도 평안하게 웃고 계신다. 산소이전을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추운 겨울에도 눈보라를 맞으며 누워계셨을 터. 이렇게 따뜻한 곳에 계시니 내 맘이 다 훈훈하다. 혼자 외롭게 누워계셨던 것보다, 많은 이웃을 하고 계시니 적적하지도 않으시겠지. 말씀이 없으신 시아버님은 몰라도, 워낙 차분하시면서도 붙임성이 좋으신 시어머님은, 벌써 친구들을 많이 사귀셨음에 틀림이 없겠다.
사실을 말하자면, 가족선산이 사촌과 영감의 공동명의였다. 워낙 마당발인 사촌은, 무슨 연고인지 산소를 잡혀 대출을 받겠다 했다. 영감은 차마 마다하지 못하고 나에게 넘겼다. 영감의 도장과 인감을 받으러 온 사촌에게, 나는 박절하게 거절을 했다. ‘조상의 산소를 잡혀먹고 잘 되는 꼴을 못 봤다.’는 게 내 변(辨)이었고, 그 일로 시누이들의 찬사를 듣기도 했다. 5~6년을 두고 조르던 사촌은, 급기야 제 몫을 팔아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영감의 남은 몫이 아주 꼴 적게 생겼다.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볼품도 없는 그 땅을 그래도 지켜야 하는가. 그동안은 사촌이 들어 선산의 벌초며 관리를 했지만, 이제 그가 손을 떼면 누가 관리를 하겠는가. 이젠 우리 아이들 몫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도 생각이 달라졌다. 아이들에게 짐을 지워 주지 말자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벌초를 하러 다니기가 만만치 않을 게다. 그동안 벌초를 할 때마다, 바쁜 직장생활 중에 시간을 내느라고 얼마나 힘이 들었는가. 좀 편하게 모시는 방법을 강구해 주자. 곧 모든 일이 아이들 손에 달렸으니 말이다.
결국 오래 된 조상님들의 산소는 종정으로 보내고, 내 시부모님은 추모공원으로 모시기로 했다. 대를 물려 안치를 할 수 있다 하니, 머지않은 장래에 돌아올 우리 부부의 후사(後事)까지도 해결을 한 셈이다. 오늘 다시 시부모님을 찾아뵈오며, 나는 낮은 소리로 읊조린다.
“우리 잘 했지요?”
“오냐. 수고했다.”는 시부모님의 고운 미소는 나만의 위안이었을까?
비 그친 하늘이 오늘따라 드높고 청명하다.
<2015년 프로리다에서 작은 '호나이더'를 만났다.
그 와중에도 찰칵했으니, 내 프로정신은 가히 알아줘야 한다고 이구동성이었던 추억이 있는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