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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걸


BY 만석 2019-03-25

내가 할 걸
 
“라면 먹을 거면 두 개 끓이구.” 컴 앞에 앉아서 노닥거리고 있는데, 영감이 등 뒤에서 묻는다. 돌아보니 냄비를 들고 있다. 아니면 하나만 끓여서 혼자 먹겠다는 소리다.
“배고파요?”
“한 신데.” 벌써 한 시가 되었는데, 배가 고프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지.
 
“아니, 아침을 열 시에나 먹었는데.”
허긴. 할 일 없이 앉았으니 먹을 것 생각만 나는 법이지.
“그래요. 두 개 끓여요.”
물론 당신 손으로 끓이겠다는 언질은 들었으니, 나도 반 명령조가 된다.
 
사실 나도 지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라면 정도는 앉아서 얻어먹어도 족하다는 계산을 한 게지. 나는 삼시 세끼를 해 받치지 않는가. 까짓 라면 좀 끓여 달라는 게 무슨 대수야?
수돗물을 받는 소리가 난다. 좀 있으니 벌써 라면 익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아니, 라면 냄새가 전에도 이리 좋았나? 갑자기 시장기가 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마침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크크크. 가끔 손수 라면을 끓여 먹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물을 아주 잘 맞췄네. 적당히 익은 계란도 먹음직스럽다. 나는 사실 라면 하나가 많은 편이다. 반개의 라면에 계란 하나만 풀면 적당하다. 더 먹으라 거니 그만 먹는다 거니, 실강이를 벌리며 의좋게 점심을 라면으로 대신한다. 오늘 점심은 아주 수월하게 지나가는 걸. 라면 하나에  이리 행복할 수도 있구나 싶다.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아래층에서 손녀 딸아이의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지금쯤 희고 가냘픈 고사리 손을 나풀거리며, 고갯짓을 해가며 건반을 두드리고 앉았겠지? 손녀 딸아이의 예쁜 모습을 그리며 라면을 먹는다.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여 아이의 연주에 지장이 질라 싶어서 후루룩 소리도 조심스럽다. 오늘 점심은 분위기가 아주 괜찮은 걸.
 
영감에게 설거지까지 하라기에는 양심이 찔린다. 설거지를 하러 일어난 나.
아. 영감을 시켜먹으면 반드시 대가(代價)가 따른다는 걸 깜빡했구먼. 라면 스프를 얼마나 높이 들고 공중에서부터 흔들어댔을까. 가스렌지에 온통 스프가 널려 있다. 그래도 영감이 들을 새라 작은 소리로 구시렁구시렁. 시켜먹은 죄로 '아얏!' 소리도 못하고 뒤처리를 한다.
 
헉~!. 라면을 끓인 냄비뚜껑을 여는 순간 아연실색(啞然失色). 냄비의 안벽을 타고 눌어붙은 저 저…. 이걸 어쩌란 말이냐. 이건 사유를 들어보아야겠다. 어찌하면 냄비가 이 꼴이 되느냐고.
“아, 아침에 찌개 끓인 냄비에 그냥 라면을 끓였더니….”
그랬단다. 아침에 찌개 끓일 때에 솟아오른 그 경계선이 검게 타버리더라는 게다.
 
에구구~. 얼마나 내 팔을 혹사시켜야만 저 검게 엉겨 붙은 보형물(?)을 지울 수 있을 것인가. 냄비를 그냥 버려? 버려 버려? 버리기엔 아깝다. 아, 잘 먹은 라면에 탈이 날 것만 같다. 이제 다시는 영감에게 라면을 끓여 달라 하지 말아야지. 뒷일이 더 많지 않은가. 그 동안은 어땠지? 아, 라면 끓일 냄비를 준비해 줬었구먼.  냄비가 원상복구 되고, 나는 두 팔을 온통 동전파스로 도배를 했다.  쳇! 앓느니 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