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부르며 눈을 반기다
베란다 창으로 밖을 내려다보니, 길 가 도로변에 눈이 제법 쌓여 있다. 어제의 예보대로 새벽에 눈이 내린 모양이다. 오늘은 스타디 모임이 있어서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영감의 아침밥을 챙기면서, 나는 이리저리 서성거리며 아침밥을 조달한다. 밥 한 숟가락을 입에 퍼 넣고 옷을 챙겨 입고, 또 한 숟가락을 퍼서 넣고 돌아앉아 양말을 바꿔 신으며 부산을 떤다. 영감의 시선도 내 손끝을 따라 바삐 움직인다.
“저런. 눈이 막 쏟아지네?!” 영감이 날더러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전한다. 베란다의 창 앞에 선 영감의 옆에 서며 나는 환성을 지른다. 좀 전까지도 기척이 없더니 눈이 제법 쏟아진다.
“와~! 멋지다아~.” 나설 걱정은 않고 어린아이 같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나를, 영감은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본다. 그 특유의 소리 없는 미소로 웃음을 대신하며 말이지.
한 겨울에도 눈이 이리 멋지게 내린 적은 없었지. 오늘은 나가지 말라는 영감 스타일의 무언의 압력을 마다하고 집을 나선다. 바닥이 건실한 운동화를 이미 딸아이가 준비해 주었으니 문제는 없다. 이럴 땐 우산을 받지 말고 나서야 제격인데 말씀이야. 나도 처음엔 그럴 량으로 털모자를 뒤집어썼으나, 아직 말끔히 떼어내지 못한 고뿔을 걱정하며 우산을 챙겨든다.
바람이 없어서 순하게 내리는 눈은 조금 과장하면 앞을 흐리게 하지만, 이마저도 오랜만에 맛보는 정치(精緻)요 운치(韻致)다. 넘어져서 골반 부상을 당한 친구를 생각하며, 미끄럽지는 않지만 한 발 한 발을 힘주어 조심스럷게 내딛는다. 어린이집의 통근버스를 기다리며 아파트 앞에 선 아이들이, 저마다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어 내리는 눈을 받는다. 참 예쁘다. 절로 미소가 번진다.
강의실에 빈자리가 많다. 날씨 탓인 게 틀림이 없다.
“어머나. 못 오시는 줄 알았는데.” 젊은 강사는 오늘따라 유난히 나에게 시선을 준다. 그렇겠다. 오늘 같은 날엔 출석을 해도 걱정스러운 나이지. 공부를 하는 내내 눈은 내린다. 귀가하는 시간에도 눈이 내려주기를 기대하며, 나는 어린아이같이 철없는 내 심성(心性)을 나무란다.
아닌 게 아니라 귀갓길에도 눈은 펄펄 내리고 있다. 아마 겨우내 모아두었던 하늘 광의 설량(雪量)을, 곧 다가올 봄이 걱정스러워서 한꺼번에 쏟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럴 땐 걸어야 한다. 그렇다고 정신도 없는 아낙인 양 길거기를 마구 휘 돌아칠 수는 없지. 어디로 갈까. 오늘 같은 날은 남의 집 손님 노릇도 눈치스럽다. 해서, 늘 다니던 의료기체험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이고 어머님. 이 눈이 오는데….”이런 이런. 이곳에서도 늙은이는 걱정스럽다는 눈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리를 잡고 앉는다. 엉덩이로 따스한 기운이 감돌아 오른다. 아, 눈 오시는 날은 이 또한 별미로고. 따스한 차 한 잔을 대접 받으며 스르르 눈을 내려감는다. 저 멀리의 초가지붕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처마 끝의 고드름이 금방 낙상이라도 할 듯 위태롭다. 어디선가 컹컹 개 짓는 소리도 들린다.
초가지붕 위의 굴뚝에서 푸짐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부지런하신 내 어머니는 어느새 감자를 익힌 모양이다. 이 아니 좋은가. 어머니의 손에서 감자를 받아들며 어머니와 시선을 마주한다.
“이거 받으세요.” 헛손질을 하는 내 손에 강사는 귤 하나를 쥐어준다. 에구구. 예쁜 그림이었는데…. 나른한 김에 다가오던 잠이 화들짝 놀라, 그만 저 멀리 달아나고 만다. 아아~. 아주 좋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