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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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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잡으라구요


BY 만석 2018-11-22


손을 잡으라구요
 
우리는 점심을 먹고 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언제나 산행 준비를 서두른다. 아차하면 돌아와서 늦은 저녁을 먹게 되니까. 늘 가벼운 차림으로 나섰으나 오늘은 날이 제법 차서, 막내딸이 며칠 전에 사 준 새 모자를 눌러쓴다. 그러고 보니 영감도 방한복에 털모자를 달았구먼.
 
대문을 나설 때는 좀 어설펐으나 몇 발자국 걸으니 추운 기운은 달아난다. 영감은 벌써 저만치 앞서서 걷는다. 아장아장 마누라는 영감을 놓칠세라 걸음을 재촉한다. 나는 북한산 둘레길을 뒷동산이라고 부르며 산다. 복이 많아서라 해 두자. 스치는 바람은 찬데 얼굴엔 열이 난다.
 
~. 그런데 오늘은 산길이 낯설다. 매일 오르던 뒷동산이 아닌 처음 보는 길이다. 샛길로 빠지는가 싶더니 나지막한 산등을 오른다. 아무러면 마누라 버리러 가는 길은 아니겠지. 물어 볼 새도 없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저만치 간다.
 
우리는 산행을 하면서 말을 섞지 않는다. 아니, 할 말이 없다. 24시간 코 맞대고 사는데 뭐 산에 와서까지 지껄일 일이 있겠느냐는 말이지. 나는 그저 영감이 앞서는 대로 따라가기에만도 벅차서 숨이 가쁘다. 길이 낯설어서일까. 오늘은 더 가쁜 숨을 몰아쉰다.
 
나풀나풀 춤을 추며 내려앉던 나뭇잎새가 이제는 발길에, 그리고 바람에 밟혀서 제 모양 갖추기를 포기한다. 버티고 섰는 아름드리나무에도, 대롱대롱 마지막 잎새들만 그네를 타고 있다. 이제는 스산한 바람도 시원하게 다가온다. 벌써 힘이 드는 모양이다.
 
모퉁이를 돌 때면 영감은 영락없이 뒤를 돌아다본다. ‘내가 이쪽으로 가니 잘 따라오라는 언질이다. 말로 하는 법은 없다. 이만큼 살고 보면 그쯤 알아채는 것이야 누워서 떡 먹기지. 아니면 내가 이 나이에 누굴 따라 가겠다고 ㅋㅋㅋ.
 
얼마쯤 오르니 간이 의자가 있다. 영감은 거기 앉아서 아장아장 마주 오는 마누라를 마중한다. 나는 알지. 영감이 힘이 들어서가 아니라, 마누라를 쉬게 해야겠다는 마음이라는 것을. 이쯤이면 나도 사실은 다리가 퍽이나 무겁거든.
 
마누라 숨소리가 고르다 싶으면, 그 때는 한 마디 한다. 아주 간단하게.
가지.”
우리 영감은 오늘 산행에서 할 말을 다 했다. 이제는 할 말이 없을 걸?!
 
그런데 시방 옳게 가는 겨? 영감은 길을 알아내는 데에 도사이긴 하다. 하여간 따라가 보자. 얕은 산등성이를 올라서 방향을 비트니 아하~, 칼바위능선의 초입이 저만치에 보인다. 그러면 그렇지. 길에 관한한 영감을 믿어도 손해 볼 일은 없다니까.
 
실개울에 물이 제법 흐른다. 건너 뛸 수 있을 것도 같고 풍덩 빠질 것도 같다. 내 다리가 원채 숏 하니까. 자신이 없어서 망설이고 섰으니 영감이 돌아와 말없이 손을 내민다.
손을 잡으라구요.” ㅎㅎㅎ. 우리 영감이 오늘은 제법 말을 많이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