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를 찾습니다
“모복아~!”
“모복아~!”
“모복아~!”
식구마다 목이 터져라고 외치지만 강아지는 보이지를 않는다.
어디에선가 모복이의 콩콩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모든 복을 불러들인다는 의미의 ‘모복’은, 우리 집에 입양 오기 전 집에서 지어준 이름이다.
낯이 선 우리 집에서 그렇잖아도 스트레스를 받을 터인데, 이름까지 바꿔서 부르면 더 스트레스라는 게 영감의 선견지명이었다. 그래라. 세상의 모든 복을 불러들이렴. 모복이 덕으로 호강한 번 하고 살아보자 했더니, 내 복이 요기까지 인가보다.
교회에 다녀오니 묶어놓은 강아지가 감쪽같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목줄을 맨 채로 사라진 것이다. 내가 없으니 며느님이 수고로울 것 같아서, 영감의 제안으로 온 식구가 점심으로 냉면을 먹고 왔다지. 그 사이에 강아지는 사라지고. 그러게 겨울에 냉면은 무슨 냉면이었담.
“끈을 어떻게 묶어놓았기에 풀고 나갔어.”
“목줄까지 달았으니 끌고 가기도 쉬웠겠다.”
정작 섭섭한 사람은 영감인데, 식구들의 모든 원망이 영감에게 쏟아진다.
우리가 산행을 갈 때마다 데리고 다녔으니, 혹시 그 산길로 내뺀 것은 아닐까? 산 밑까지 구석진 골짜기까지 살폈으나 찾을 수가 없다. 오늘따라 개 짓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요란하다. 모두 우리 모복이의 울음소리만 같다. 까꿍하고 튀어나올 것만도 같다.
사실 나는 원래 털 있는 짐승을 싫어한다. 그래서 강아지의 목욕도 영감이 씻기고 산행도 영감의 주도로 동행을 한다. 원래 ‘푸들’이 사람을 잘 따른다고는 하나 모복이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나를 따랐다. 그래서일까. 일 년쯤 지나니 모복이에게 정이 들었다.
그런데 모복이가 배신을 한 게다. 영감은 큰 길에도 나가보고 혹시 집을 찾아오는가 싶어서 대문 앞을 서성거리기도 한다. 많이 서운한가 보다. 허긴. 그렇잖아도 심심한데 와중에 친구 하나를 잃었으니 섭섭하기도 하겠지. 흔들의자에 앉아서 목을 외로 꼬고 대문간만 바라본다.
아~.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내 눈에 모복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다가온다. 어디에 있을까. 누군가가 주인을 찾아주고 싶어도, 강아지 잃은 주인집을 몰라서 돌려주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대문에다 한자 적어서 붙였다. <밤색 푸들 강아지를 찾습니다^^>
오늘이 모복이를 보지 못한 지가 보름. 그러나 석 삼년은 되는가 싶다. 오지 못할 길이라면 지금의 주인집에서 사랑이나 듬뿍 받고 살아라. 그래도 영감은 포기를 하지 못하고 오늘도 대문가를 서성거린다. 에구~. 아무래도 또 다른 강아지라도 영감 품에 안겨 주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