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아름다워
날이 많이 추워졌다. 아침저녁으론 제법 쌀쌀하다. 이젠 반팔은 접어 넣고 긴팔을 꺼내야겠다. 이참에 옷 정리를 좀 해야겠군. 방 하나를 차지한 옷 옷 옷들. 벽을 타고 뺑뺑 돌려 진을 친 행거. 그것도 모자라서 겹으로 에워쌌다. 게다가 막내 딸아이의 겨울옷까지 덤으로 맡았으니 보는 사람마다 ‘연예인의방’같다고들 한다.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도 많은 것일까. 없애려고 하면 버릴 건 없고, 제철에 입자하면 제대로 구색 맞춰 입을 옷도 변변치 않다. 그런데 걸려 있는 옷은 눈으로도 감당하기가 힘들다는 말씀이야. 누군가 그랬지. ‘두 계절을 걸쳐 보지 않은 옷은 과감히 버리라’고 그런데 아직 서너 계절은 거뜬히 입어 줄 만한 걸 어찌 버리나.
나는 오늘도 과감해야 한다며 옷방엘 오른다. 날씨가 추워지자 입고 난 옷들은 눈에 설다. 내년에 입게는 되려나? 아직 마음은 젊어서 그동안 너무 고운 옷만 좋아했나 보다. 내년엔 자제를 좀 해야겠지. 가슴으로는 그렇다 하면서도 걷어 올라온 옷걸이는 그래도 곱게 손질해서 다시 행거에 건다. 아마 내년에도 잘 입지 싶은 예감이 든다.
이건 큰딸과 버지니아 횡단할 때 입었던 옷이지. 아직도 보라색 포도무늬가 탐스러운 부라우스를 만지작거리며, 그동안 잊고 있었던 추억을 더듬어 낸다. 이름도 잊어버린 그 호수는 아직도 물오리가 삐걱거리며 손님을 맞고 있는지. 멋스럽게 띄워 놓았던 작은 통통배는 아직도 유유작작 호숫가를 맴 도는지.
이건 작은 딸이 불러서 갔던 켈리포니아의 오렌지 타운에서 입고 활개를 쳤던 옷이지. 지금은 거리의 이름도 잊어버렸지만, 잘 정리 되었던 길가의 공원마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에 그리움이 출렁인다. 아직도 ‘자쿠지’에는 남녀노소(男女老少)가 구분도 없이 첨벙거리며 시간을 보내는지. 보나마나 지금도 아이들은 풀장에서 어른답게 커가고 있겠지.
아, 이건 ’할리우드‘의 구석구석을 누볐던 초록색 원피스네.
멀리에서도 잘 보이는 ‘할리우드 힐스’를, 가까이에서 보겠다고 오르던 일. 아카데미 수상식장도 아련하고, 할리우드에서 막내 딸 내외가 우리 부부에게 수상한 ‘BEST MOTHER’과 ‘BEST FATHER’의 트로피는,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되겠지.
‘이 줄무늬 바지를 입고는 ’그랜드케니언‘에서 그 웅장한 조물주의 솜씨에 감탄을 했었지.
아, 그래. ’그랜드케니언’의 ‘그랜드 캐니언빌리지’. 그리고 ‘마스윅 릿지’도 잊을 수가 없다. 돗자리를 잔디에 깔고 딸 내외와 우리 내외는 나란히 누워 맑은 하늘의 별자리를 헤었었지. 큰곰자리 작은곰자리 그리고 물 흐르는 듯 흐르는 은하수. 셀 수도 없는 별 별 별들.
라스베가스의 추억도 잊지 못하지. 사위는,
“라스베가스까지 오셨다가 그냥 가시면 안 되지요.”라며 자리를 마련해 주었었지. 사위가 건네 준 칲을 보기 좋게 탕진하고는, 본전 생각이 나서 혼이 났었구먼.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에서 ‘빠징코’를 할 때에는, 아마 이 분홍색 블라우스를 입었을 걸? 분홍색 모자도 썼었지?!
선명하게 얼룩진 추억에 잠겨 한 동안 옷방을 내려올 수가 없었다. 하나 같이 추억이 묻어 있지 않은 옷이 없으니, 마음 가볍게 버릴 옷도 없었다. 이제는 산 날보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는, 새로운 곳을 더듬는 여행보다는 옛 추억이 서려있는 곳을 다시 찾아보고 싶다.
“아ㅡ 그때는 그랬지.”라며. 아니, “그때가 좋았지.”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