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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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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를 칠 일만은 아니었다


BY 만석 2018-03-01

박수를 칠 일만은 아니었다

 

엄마. 나 미국가게 됐어요.”

얼마나 신이 났는지는 막내 딸아이의 목소리로 알 수 있었다. 목소리가 한껏 떨리고 있었다.

아무 말도 미처 하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있잖아요. 류서방이, 류서방이 법인장으로 승진해서 미국 근무하게 됐어요.”

숨이 가쁜지 색색거렸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승진을 했다는 소리만 반가웠다.

 

잘 됐구나.”

어찌 됐던 딸아이가 좋아하니까 덩달아 좋았다. 제 언니가 벌써 8년째 미국생활을 하고 있어서 늘 부러워했으니까. 그날 저녁으로 달려왔다.

그렇게 좋아?”

그러~. 엄마는 안 좋아요? 내가 가서 엄마를 일등으로 부를 텐데요.”

 

이렇게 해서 사 남매 중 셋을 외국에 내보냈다.

형은 엄마 아빠 곁에 보초 세워야 하니까. 하하하.”이건 일본으로 건너간 막내아들의 변()이었다. 지인들은 자식을 잘 키웠다고 부러워했다. 허기야 기르기는 잘 길렀지.

. 일본은 아무나 가나?’

미국은 아무나 가느냐구.’ 그땐 그랬다.

 

큰 딸아이가 미국에 들어간지 3년 만에 불렀다. 우와~. 멀기도 했다. 장장 열 네 시간의 비행이었다. 촌마누라의 미국행은 멀미도 나지 않았다. 지루한지도 몰랐다. 가장 부러운 건 땅덩어리가 크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뭐든지 싸이즈가 어마어마했다. 가로수들도 쭉쭉 뻗어 있고 산들도 규모가 대단했다. 워싱턴의 겔러리도 그 규모가 엄청나서, 무엇을 감상하였는지 지금은 기억조차도 나지 않는다. 역시 미국은 축복 받은 나라임에 틀림이 없었다.

 

한 해를 거르고 큰딸아이가 다시 불렀다. 지난번에는 동쪽으로 돌았으니 요번에는 서쪽으로 돌자고 했다. 내야 뭘 알아야지. 데리고 가는대로 따라 다니는 게지. 카나다쪽의 폭포가 더 볼만하다 하여 카나다를 잇는 레인보우다리를 건너, 나이야가라의 폭포와 마주하는 호텔에 묵으며 폭포의 웅장함을 가슴으로 안았다. 미국최대의 개인주택이라는 카사노바성을 둘러보는 데에는, 그 규모가 너무나 웅장하여 멀미를 할 뻔했다.

 

한 해 걸러서는 가까운 일본에서 막내아들이 영감의 생일에 불렀다. 이름 있는 고궁이며 카부키등을 구경하며 호사를 했다. 구경도 못했던 일본음식도 두루두루 맛보고 희안한 거리구경도 하고 잘 다듬어놓은 해변도 시찰(?)하였다. 사찰은 일본만의 풍미가 물씬거려서 우리나라의 조용하고 얌전한 사찰과는 또 다른 멋이 있었다. 사찰마다 효부문이 세워져 있는 것도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다음 해에는 막내 딸아이가 불렀다. 제 언니와는 같은 미국이라도 동쪽과 서쪽 끝이라서 비행기로 여섯 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그랜드케년도 좋았고 후버뎀도 볼만했다. 그린피스천문대는 내가 알고 있는 이상의 유명세로 관광객이 줄을 이었다. ‘할리우드는 좋지 않았겠나 환락의 도시라는 라스베가스가 좋지를 않았겠나. ‘베니스의 콘돌라를 띄워놓은 백화점은 또 어떻고. 야무진 막내딸 내외의 잘 짜여진 여행계획에 그저 촌늙은이는 얼이 다 빠졌었다.

 

날마다의 여행이 행여나 우리에게 부담이 되겠다며 집에서 쉬는 날엔 햇볕을 받는 자쿠지에 몸을 태우니 저절로 건강해지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어느 코스가 가장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쿠지를 들겠다. 일본의 노천탕과 같아서 남녀노소가 수영을 즐긴 뒤 몸을 담구고 몸을 푸는 곳이니 우리 부부에게는 그럴 수 없는 휴식처였다. 벗었다고 나무라는 이들도 없고 자주 드나든다고 눈살 찌푸리는 이 없으니 천국이 여기가 아닌가 싶었다.

 

버지니아에서 시작한 유럽투어 끝에 라스베가스로 달려온 큰딸네 식구들과 함께 어울리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손녀딸 아이들이 그새 몰라보게 자라서 제 어미보다도 훨씬 컸다. 이제는 할미를 돌보는 보호자 역할도 제법 잘 했다. 이렇게 좋을 수가. 이렇게 좋을 수가. 절로 즐거울 수밖에. 여섯 여자들의 수다에 남자들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에헤라 디여~~~♪♪.”

 

그러나 그저 좋기만 한건 아니었다. 딸들과 아들이 빠져나간 서울은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바람이 인다. 생일이면 어느 딸이 들여다보나 어느 사위가 들어서느냐는 말이지. 큰아들네 세 식구가 들어와서 조용한 생일을 지낸다. 명절이라고 친정나들이 오는 딸네도 없다. 차례를 지내고 나면 전화로 딸들의 안부를 받으면 그만이다.

보내준 용돈 잘 받았다.”

자식들의 출세와 무관한 일이라면, 보고 싶을 때 보고 살자고 모두 불러들이고 싶다.

 

(영감과 큰아들의 불상사를 잠시라도 잊어보자고 여행일지를 꺼냈다. 그래도 자꾸만 등 뒤에 누워 있는 영감이 아직은 더 신경이 쓰인다. 좀 나아진 듯은 하나 아니 다친 만은 못하다.

역시 젊음은 좋은 것이다. 큰아들은 회복이 빠른 듯한데, 영감이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 않다. 원래 표현이 없는 양반이라 눈치로 알아보지만, 나이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워낙 입이 까다로워서 먹는 게 시원찮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