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십 육세 어느 고인의 호사
건강하던 형부가 예고도 없이, 팔일의 중환자로 있다가 갑자기 세상을 떴다. 부고를 받고 놀라지 않는 이들이 없다. 곧이들리지가 않는다는 반응들이다. 약하기로 말하자면 언니가 걱정이었지, 형부는 생각도 못한 일이다. 언니의 놀람과 서러움이 얼마나 크랴 싶어서 서둘러 장례식장엘 들어섰으나, 문상을 하는 외에 아무런 도움이 될 만한 일은 없다. 이리저리 이집 저집을 둘러보다가 유난히 조화가 많이 선 한 초상집이 눈에 들어온다.
형부의 초상에도 벌써 이십 여개의 조화가 섰으나, 한 블록을 지나에 있는 그 댁은 유난히 눈에 띄이더란 말이지. 호기심에 하나 둘.... 크~ 아흔 일곱 개의 조화가 섰다. 기웃해 보니 영정을 모신 가까이에도 키가 작은 조화가 대 여섯 개. 도대체 얼마나 이름 있는 분의 초상인가 궁금하다. 낯설은 ‘상가 안내문’에 가까이 다가서서 훑어본다.
96세의 고인. 두 아들의 이름이 있고 네 명의 자부를 두었으니, 고인의 연세로 보아 두 아들을 앞세운 게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미망인의 이름이 빠진 것으로 보아 부인도 먼저 보냈나 보다. 네 아들의 손주와 손녀가 십여 명을 넘어선다. 고인의 연세로 보아 손자녀들도 장성한 나이들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백여 개의 조화가 섰음은 당연함직도 하겠다.
지나는 사람들마다 입을 벌린다.
“조화가 연세만큼 되겠네.”
“살아생전에 세배 받기도 힘들었겠다.”
“호상일세. 호상이야.”
조화가 고인의 연세만큼 인 것은 내 눈으로 확인이 가능하니 그렇다고 치자. ‘호상’이라는 말도 어느 정도는 수궁할 수 있다. 그러나 ‘살아생전에 저렇게 많은 세배를 한 번에 받아보았을까’는 의문이다. 배우자를 먼저 보내고 자식을 앞세운 구십 육세의 고인이 과연 행복한 삶이었다고만 할 수 있을까. 오래 산 것만으로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지.
물론 남의 일에 딴지를 걸어 ‘구태연 한 삶’으로 추락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행복한 삶을 논해 보자는 의도다. 위에서 말한 구십 육세의 고인이 세상을 버릴 때까지 자손들에게 대접을 잘 받고, 하나의 자식이라도 앞세우지 않았다면 박수를 보낼 만큼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구십 육세의 고인의 경우, ‘잘 살았다’는 의미가 오래 살았다는 것과는 무관한 일이 아닌가.
‘여든 다섯의 형부의 생’과 ‘구십 여섯의 어느 고인’의 생을 비교해 본다. 과연 어느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어느 쪽을 ‘호상’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말이지. 삼 남매를 잘 길러 자기들의 각 분야에서 밥술이나 먹고, 남에게 손 벌릴 일 없이 사는 것을 만족해 하던 형부의 생에 박수를 보내며, 삼가 두 고인의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다. 고이 잠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