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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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맆스틱 짙게 바르고


BY 만석 2017-11-11

맆스틱 짙게 바르고

 

화가 났다. 왜 김장을 집에서 해야 하느냐는 말이지. 얼마든지 쉽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말이야. 집에서 김장을 하자면 그 수고가 어딘가. 도통 여자의 힘드는 일,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내 마누라의 힘든 상황은 아랑곳도 하지 않으니 무슨 심보일까. 남들이라고 다 그렇게 쉽게 사는데 별스럽게 군다고 영감에게 투정을 부렸다.

 

그러나 별스럽다고 생각하는 건 비단 나만의 불만은 아니다. 영감은 영감대로 마누라가 별스럽다고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남들 없는 텃밭도 있겠다 조금만 수고를 하면 푸짐하고 확실한 유기농으로 식구들의 입을 채울 것을.

 

자고로 겨울이면 이웃이 모여 배추를 다듬고 절이고, 야밤중에는 우물가에 불을 켜고 이리저리 뒤적이고, 밤이면 채를 썰어 모으고 새벽이면 배추를 씻어서 물을 빼고 이래야지. 이것이 영감이 보고 자란 오리지날 삶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다. 시어머니가 평생 그렇게 살았으니까.

 

올해에는 김장을 하지 않겠다는데 영감이 손을 들지 않고, 말도 없이 시골로 내려간 게다. 종묘상에서 모를 사서 혼자 의이샤의이샤 모종을 하고, 이제는 솎아서 먹을 만큼 되었을 때에야 가보니 장관이다. ~. 배추 이랑이 셋에다가 무가 세이랑. 자그만치 배추가100포기 무도 100포기란다. 보기에 좋기는 하다만 저걸 누가 일을 할 것이며 먹을 입은 얼마나 된다고.

 

배추는 어느 결에 혼자 자라서 노오란 속을 채우고 있다. 무도 제멋대로 자라 제법 알타리 감이 되어 있다. 대견하긴 하다. 손가락만한 모를 그저 꽂아만 놓았을 뿐인데. 그래도 나는 저걸 누가 뽑아다가 절이고 속을 장만학고. ~. 생각만 해도 힘이 들고 끔찍하다.

 

그러나 어느 결에 내 손은 알타리김치 담을 채비를 하고 있다. 무를 뽑고 무청을 다듬어 내고. 남편은 신이 나서 밭고랑을 이리저리 넘어 다닌다. 아마 속으로는 그러겠지.

, 그럴 줄 알았어. 당신이 이걸 그냥 묵힐 사람이 아니지.’

 

이렇게 시작한 김장은 살림꾼 두 권사님을 대동하긴 했으나, 생각만큼 힘들지 않게 끝이 났다. 나는 김장이 끝나도록 화가 풀리지 않았었으나 이웃의,

좋겠다.”는 부러움을 듣고나서야 이게 부러운 일인가.’하고 맘이 좀 풀린다.

 

배추와 무가 풍족하니 수고한 권사님들에겐 동치미감 무 한 부대씩을 안기고 이웃들에게도 인심을 나른다. 무도 나눠주고 고구마도 나눠주고. 폐지를 주워 생활하는 할머니에게는 김장 한 통을 건네면서 내 마음은 완전히 녹아내린다. ‘그래. 사서 주기는 힘들었겠지.’ 싶다.

 

두 개의 김치냉장고가 그득하다. 그래도 대형 김치 통이 남아서 냉장고를 정리하고 네 통을 냉장고에 넣는다. “~! 나는 오늘부터 김치부자다.” 아무 거라도 부자는 좋은 거다. 남편이 말한다.

배추 농사 잘 했쟈? 사다가 했으면 이렇게 풍족하지 못하지.”

 

그랬겠다. 김치를 사다 먹을라치면 이리 풍족하지도 못할 것이고, 인심을 쓰지도 못할 것이다. 영감이 잘 하긴 잘한 것 같다. 이른 김장을 끝내고나니 밀린 숙제를 끝낸 양 속이 시원하다. 김장을 한 채짠지도 있고 양념도 푸짐하니, 오늘 저녁엔 영감이 좋아하는 굴밥을 해야겠다.

 

맆스틱 짙게 바르고 마트로 달린다. 마주친 경미엄마가 말한다.

김장했다며? 좋겠다~. 나도 좀 부르지. 나도 동치미 무 좀 얻어오게.”  벌써 소문이 난 모양이다.  

이따가 우리 집에 와. 동치미 무 아직 좀 있어 줄게.” 경미엄마의 환한 웃음이 내 등을 두드린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