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인간 생일도
해신이 생일도
온갖 번호와 글자들을 갖다 붙여도 풀리지 않는다.
누을 부릅뜨고 이것저것 눌러 보다가 그만 비밀번호 횟수 초과에 걸리고 말았다. 왠지 허탈해지는 기분이다.
언제 요란하게 비를 퍼부었냐는 듯 하늘은 맑아지고 별이 반짝인다.
” 힘들지?“
그의 입술이 스쳐 지나가려는 사이 차가운 밤공기에 잠이 깨고 만다.
생전 처음 그 인간과 입술을 마주하려던 순간이었다.
꿈에서도 그 인간은 비껴가는 사랑이 되고 만다.
그 인간의 다가오는 입술을 향해 툭 튀어나온 입술에 화풀이를 하듯
분이 풀릴때까지 손바닥으로 세게 내리친다.
입술에 가득하던 물집들이 터져 진물이 흐르고 피가 흐르는것도 모른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만다.
” 비껴가는 사랑! 그 사랑이 슬프다!“
” 친구야! 나도 꿀이 뚝뚝 떨어지는 그런 달달한 사랑 한 번 해보고 싶어!“
” 왜? 왜 나는 안되는걸까?“
” 세상에 남자가 그 인간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 나 참 바보같지?“
‘ 아니! 바보같지 않아!’
‘ 난 이해할 수 있어! ’
‘ 꿈에서라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건 슬픈 일이잖아!
하지만, 네가 아파하는 걸 지켜보는것도 슬픈 일이야!’
‘ 그냥 다른 사랑했으면 좋겠어!’
‘ 아프지 않은 사랑도 있잖아!’
‘ 이제 그만 미련을 버렸으면 좋겠어!’
‘ 행복한 사랑도 있잖아!’
‘ 너도 그런 사랑 한 번 해봐!’
친구는 그렇게 나지막히 속삭인다.
편의점 냉장고에 진열된 맥주를 바구니 가득 담을때마다 지나간 생각에
서러운 눈물이 흘러 내린다.
눈으로만 흘려 보내야 했던 그림같은 맥주들이었다.
목이 말라 큰맘 먹고 집어 들었다가도 그인간이 생각나 놓아 버리곤 했었다.
진열대에 나란히 놓인 라면들은 보기도 싫다.
안먹어 본 라면이 없을 정도로 삼시세끼를 함께 하던 것들이다.
참 멍청한 사랑에 빠져 있었다.
다음달에도 그 인간이 카드값을 꼬박꼬박 통장에 부칠지 의심스럽다.
바코드를 열심히 찍어대는 직원의 뽀얀 손가락 사이로 반짝이는 반지는
커플링일까? 아니면 그냥 사서 낀 반지일까?
” 반지가 이쁘네요!“
아무 대답이 없다.
” 커플링인가 봐요?“
바코드만 열심히 찍을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 새로 온 직원인가 봐요?“
” 맴버십카드 있으세요?“
” 원래 그렇게 남의 말을 씹는 스타일인가요?“
짜증을 내며 목소리를 높여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 대답 할때까지 나도 계산 안해요!“
” 원래 그렇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은건가요?“
” 이깟 반지 하나가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그런건가요?“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눈앞에 내밀며 화를 내는 눈빛에 갑자기 주눅이 들어 버린다. 괜히 물어본걸까?
얼른 계산을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그가 다시 말을 걸어 왔다.
” 애인 생기면 주려고 끼고 다니는 거예요!“
” 이제 대답 들어서 시원해요?“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당장 들어가고 싶었다.
급하게 나가려다가 유리문에 부딪쳐 머리를 세게 박고 말았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배꼽을 잡고 웃는 모습에 더 창피해 눈을 질끈 감는다.
애써 기른 손톱이 부러지고 멍이 들어 피가 난다.
그는 의자에 앉혀놓고 반창고와 연고를 가져와 친절하게 치료를 해 주었다.
그냥 손님을 대하는 직원의 친절한 배려인걸까?
아니면 관심이 있는 여자에게 대하는 사랑의 표시인걸까?
아무리 알아채려 해도 알 수가 없다.
부드러운 손길이 아픈 손가락을 스쳐 갈때마다 왠지 눈물이 난다.
무릎까지 멍들어 욱신거린다.
유리문에 온몸을 마사지한 기분이다.
못생긴 무릎이 멍든것까지 그에게 들켜 버린게 너무 창피하다.
” 원래 그렇게 덜렁대는 성격이예요?“
” 하마터면 코피까지 날뻔했어요!“
” 이깟 반지 하나 때문에 난리라니 하하하!“
연고를 바르다 말고 소리내서 웃고 있는 모습이 너무 멋있다.
교대시간이 되었다면서 집까지 부축해 주는 행운을 선물해 준
천사같은 그에게 빠져 들어도 되는걸까?
신이 허락해 준 새로운 사랑이라면 기꺼이 감사히 받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