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가 쓰다.
먹다 만 맥주를 마셔서가 아니라
그인간을 위해 희생된 지난 시간이 아깝고
저주스러워 독약을 마시는 듯 벌을 받는 기분이다.
역시나 그 인간에게 답장은 없다.
그럼 그렇지
그나마 사귄다고 말할 수 있었을때도 관심없던 인간이
갑자기 답장을 보낼 리가 없다.
그래도 악착같이 카드값을 받아내야 이번달을 넘길 수 있다.
다시 전송버튼을 누른다.
답장이 올때까지 굳세게 전송버튼을 누른다.
바퀴벌레 한쌍이 남기고 간 캔맥주가
혹시 나를 위한 만찬은 아니었는지 궁금해진다.
직원오빠는 안주로 먹으라고 하면서 육포 하나를 살포시 올려놓고 간다.
참 착한 사람이다.
누구한테 무언가를 받아 본다는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정에 굶주려 허우적대는 모습이 비참하게 느껴진다.
냉장고에서 군침만 흘리고 쳐다만 보던 수입맥주를 처음으로 실컷 마셔본다.
어느새 편의점 노숙자가 된 기분이다.
육포를 하나 꺼내 어금니로 세차게 물어 뜯었다.
못되 먹은 그 인간을 생각하면서 분풀이하는 심정으로 질겅질겅 씹어댔다.
오늘 처음 먹어 보는 육포가 참 맛있다.
이렇게 맛있는게 있는줄도 모르고
오로지 그 인간이 먹고 싶다고 하는것들만 열심히 사다가 바쳤다.
카드대금 독촉문자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여전히 그 인간에게는 답장이 없다.
다시 전송버튼을 누른다.
답장이 올때까지 꿋꿋하게 손가락은 전송버튼을 누를 것이다.
여전히 핸드폰 문자는 말이 없다.
맥주 한모금을 들이키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이제 한 시간 후면 은행은 문을 닫고 카드는 구멍이 난다.
캔맥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입안 가득 채운다.
은행문 닫기 삼십분 전
드디어 신용불량자가 되는구나!
심장박동 소리가 요동을 친다.
두근두근!
그 인간을 사랑한 댓가가 이토록 잔인하고 혹독하단 말인가!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육포를 물어 뜯고 질겅질겅 씹었다.
사랑의 댓가는 쓰고도 괴로운데
육포는 왜 이렇게 달고 맛있는걸까?
꿀 떨어지는 바퀴벌레 한쌍이 남기고 간 바이러스에 감염된걸까?
드르륵!
침묵을 깨고 핸드폰 문자벨이 울린다.
그 인간이다.
보낼게!
딸랑 세 글자가 끝이다.
미안하다는 말도, 잘 지내냐는 말도 없다.
은행 입금소식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려 퍼진다.
카드값을 내고도 남을만큼의 금액이 찍혀 있었다.
덕분에 신용불량자는 안되었지만, 왠지 기분이 이상하다.
돈을 뜯어 내지못해 환장한 여자로 느껴지는 이상한 기분이다.
그 인간 만나면서 제대로 된 선물 하나 받아 보지 못했다.
그런 인간이 군소리 없이 돈을 보냈다는게 믿어지지 않는다.
고시원에서 공부할때는 컵밥 하나도 제대로 사 먹을 돈이 없던 그 인간이었다.
과외비가 도대체 얼마길래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돈을 보낸걸까?
그동안 서럽게 지낸 시간에 대한 보상금이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자꾸만 걱정이 된다.
매일 해신이랑 꿀 떨어지는 사랑놀이에 신이 난 그 인간이 미워서 병이 날
지경이면서도 미련은 버리지 못한다.
바라보기만 하고 군침만 흘리던 와인 한 병을 집어 들었다.
와인병 위에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진다.
와인을 딸줄 모른다고 구박을 하던 그 인간 얼굴이 떠오른다.
아무리 코르크 마개 안으로 마개를 집어 넣어도 열리지 않아 애를 먹었었다.
코르크 마개가 아닌 소주병 마개처럼 편하게 된
와인병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맥주를 많이 마시고도 취하지 않는다.
와인을 계산하면서 직원오빠는 치즈랑 같이 먹는거라고 가르쳐 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치즈를 참 싫어했다.
아무리 맛있게 먹으려고 해도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러 구역질이 난다.
안주는 역시 육포랑 견과류가 최고다.
땅콩캔을 하나 집어 들고 와 같이 계산했다.
처음으로 여유로운 술잔을 즐겨 본다.
투명한 컵에 담긴 보랏빛 액체가 달콤하고 감미롭다.
마실때마다 입안 가득 느껴지는 부드러움에 자꾸 끌린다.
그 인간한테 카드값 갚아 줘서 고맙다고 답장을 보내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
당연히 받을 걸 받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sns 에 고급 음식점에서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다.
둘이 끌어 안고 샴페인잔을 부딪치며 활짝 웃고 있다.
해신이와 온 스테이크가 맛있는 집
육질이 부드럽고 입에서 살살 녹는다.
해신이가 와인보다 샴페인을 더 좋아해서 주문했다.
스테이크가 참 맛있어 보인다.
어느새 입안 가득 침이 고여 버린다.
며칠 전 티비에 나와 며칠 전부터 예약을 해야 겨우 먹을 수 있다는
그 스테이크를 저것들이 맛나게 먹고 있다.
어디에 있는 맛집인지 검색을 하고 전화예약을 하려고 했더니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도대체 저 인간은 어떻게 예약을 한 걸까?
아무리 맛있는 거라도 예약을 하고 줄을 서서 먹는 걸
한심하게 생각하던 인간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정말 저것들이 사랑이란걸 하고 있는걸까?
그 인간한테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감정이 존재하고 있는걸까?
수많은 물음표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정말 사랑하면 어떻게 하지?
차라리 해신이가 평소처럼 하던대로 가지고 놀다가 버렸으면 좋겠다.
그런데, 해신이도 갑자기 변한 것 같다.
사람이 안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던데
저것들이 죽을때가 다 돼서 그런걸까?
매일 sns를 훔펴 보면서 불안한 생각들이 엄습해 온다.
그 인간이 해신이 때문에 웃는게 싫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그렇게 활짝 웃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선물 하나 할 줄 모르던 인간이 툭 하면 해신이한테 선물을 한다.
우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예요!
빛나는 다이아가 박힌 커플링을 손가락에 끼고 찍은 사진을 올려 놓았다.
그것도 둘이 손을 꼭 잡고 말이다.
‘웃기고 있네!’
‘사랑이 장난인 줄 아니?’
‘그 사랑 언제까지 가는지 어디 두고 보자!’
라고 답글을 달려다가 지우기 버튼을 누른다.
언제나 답글달기는 타자연습에서 끝나고 만다.
물건도 사람도 지겨운 걸 못참는 해신이가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
해신이 sns에도 똑같은 사진이 떡 하니 걸려 있다.
우리 사랑 이대로 계속 되게 해 주세요!
‘웃기고 있네! 네가 사랑이 뭔지나 알아!’
오늘 커플링을 하나씩 나눠 끼었다.
처음으로 오래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 너한테도 그런 사람이 생겼다고? 웃기고 있네!’
‘ 언제 깨지는지 날짜 세어 볼거야!’
심술이 나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하마터면 전송버튼을 누를 뻔 했다.
이것들이 스테이크 먹은게 잘못 된건가?
안하던 짓을 너무 많이 하니까 적응이 안된다.
저것들이 사랑 어쩌구 하는게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 인간 sns 에 커플링도 모자라
커플 팔찌를 두른 팔목을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다.
미친 짓도 참 골고루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