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동네를 환히 밝히던 빨간 튤립과 잉크색 붓꽃 그리고 노란 돌나물꽃이 시들고 데이지와 한련이 제 철이다.
핀 큐션의 보라색도 한물가긴 했지만 아직은 살아있다.
붉은 사루비아를 닮은 세이지도 눈길을 끈다.
시들시들하던 백일홍이 이틀 전 내린 비로 기운을 차리고 색색의 꽃을 피워 십대소녀처럼 생기발랄하다.
다음은 내 차례야...하고 벼르기라도 하듯, 여름 코스모스의 줄기가 튼실하다.
멕시코 페츄니아, 채송화 그리고 화초용쇠비름도 여름을 기다리며 열심히 자라고 있다.
아직 눈에 띄지 않지만 가을을 위해 준비하는 꽃들도 있다.
지난 가을부터 내가 정성들여 가꾸는 마을 앞 버스정류장 옆 꽃밭이야기다.
가난한 동네에 집을 샀으니 좋은 환경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네 입구, 사람 키를 넘는 잡초가 무성한 진입로는 정말로 눈에 거슬린다.
비가 내리고 땅이 말랑해지길 기다려 잡초를 뽑고 곡괭이로 땅을 파서 잡초 뿌리와 돌멩이를 골라냈다.
먼저 남천 일곱 그루를 적당한 간격으로 심어 이곳에 꽃밭을 만들 것임을 알렸다.
튤립 구근을 일곱개씩 모아 남천 사이사이 여섯 군데 묻어두었다.
튤립 구근을 묻으면서 혼자서 씨익 웃었다.
히히...꽃이 피면 놀랠거다. 온 동네가 환해질 걸...절로 즐겁다.
데이지, 핀큐션, 세이지, 돌나물, 멕시칸 페류니아, 패랭이, 난쟁이석류...우리집 뜰에 넘쳐나는 꽃들을 차례로 옮겨 심었다.
때로는 일요일 교회도 빠지고, 식당 일도 눈치 보면서 슬슬 아들에게 맡겼다.
팬지 두 판을 사다 남천 앞에 심었다.
한천, 백일홍, 코스모스, 양귀비...등등의 씨앗도 사이사이 뿌려두었다.
아직 꽃이 피지 않았으니 남들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럴 듯한 꽃밭이 만들어졌다.
호호...아무도 모르게 혼자 기다리는 재미도 쏠쏠하다.
튤립을 선두로 색색의 꽃이 피어났다.
원래가 잡초밭이었으니 아무리 풀뿌리를 골라냈다고 해도 잡초도 줄기차게 올라왔다.
잡초보다 질긴 낸시가 끈질기게 잡초를 뽑아내었다.
이쁘다고, 고맙다고... 오는 이 가는 이 인사가 분분하다.
정원공사가 내 직업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내가 만든 꽃밭이 정말 이쁘다고 자기네 정원을 가꿔 달라는 사람도 여럿이다.
흐흐...사실은 마을 입구에 꽃밭을 만들면서 속셈이 있었다.
사람들을 꼬드겨 모두들 자기네 집 앞마당을 꽃밭으로 만들게 해야지...
그러면 온 동네가 내가 좋아하는 꽃으로 뒤덮일 거야.
내 꽃밭을 욕심내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속으로 즐겁다.
걸렸구나, 걸렸어...ㅋㅋ. 하나 둘 셋...손가락을 꼽는다.
마을 앞에 꽃밭을 만들면서 얻은 것들이 많다.
첫째는 마을 사람들의 사랑이다.
모두들 내게 고맙다 한다.
사실은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들이 내게는 고맙다.
지나쳤다 다시 자동차를 뒤로 움직여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 정류장은 아니지만 버스를 멈추고 고맙다고 말하는 버스 운전수, 노동과 가난에 찌들어 꽃에는 전혀 관심도 없을 것 같은 사람들까지...날더러 고맙다 한다.
그 말들이 얼마나 날 신나게 하는지, 그들이 알까...
그 말들이 내가 살아있음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하는지, 그들이 알까...
한 때는 내가 그만 콱 죽어버리려고 했던 사람이었음을, 그들이 알까...
하마 그들이 알까, 자기네가 하는 말이 내게 살아갈 용기가 되는 것임을...
또 하나 얻은 것은 생각보다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나고 보니 처음 생각했던 것 만큼 어렵지 않았다.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니고 시도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미리 포기했으면 어쩔 뻔 했어.
꽃들은 기대보다 더 이쁘게 피어났다.
반대와 비웃음을 각오했는데 협조하는 남편을 보면서 고맙고 미안했다.
내가 남편을 잘못 알고 있었구나...
남편에 대한 사랑도 새롭게 했다.
꽃과 나무에 대한 지식도 많이 늘었다.
비가 내리지 않는 뜨거운 여름 날씨,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꽃과 나무가 그리 많은 줄 미처 몰랐었다.
잘한 짓이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 갈퀴같은 손가락과 바꾼 것이지만 잘한 짓이다.
꽃도 이쁘지만 나도 이쁘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참 이쁘다.
*칠 년 전 올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