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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기억 하나...


BY 낸시 2017-07-20

추수가 끝난 가을이었다.

잔뜩 흐린 날이었다고 기억한다.

어둑해지는 저녁 무렵이었다.

삿대질하며 들이대는 나이 어린 사촌 동생에게 아버지는 뒷걸음질로 속수무책 당하고 있었다.

뒷걸음질 하던 아버지가 토방에 걸려 주저앉았다.

삿대질로 분이 풀리지 않는지 당숙은 금방이라도 아버지를 한대 칠 것만 같은 기세였다.

영문을 모르는 우리는 불안한 눈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사형제 중 막내였다.

증조할머니는 아들만 넷을 낳았다고 하였다.

둘째 큰집 할아버지는 전주에서 제일가는 부자라는 말도 있었다.

일찌기 장사에 눈을 떠 큰 돈을 벌었다 하였다.

그 할아버지의 외아들인 당숙에게 아버지가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아버지에게 익숙해 있던 우리에겐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나서고, 간신히 사태가 수습되긴 했지만 이것은 정말 낯 선 경험이었다.

경우 바르고 사리 분명한 사람으로 알려진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자식들이 모두 보고 있었으니 얼마나 치욕스러웠을까...

 

너 나 할 것 없이 가난하던 그 시절 가난이 죄였다.

부지런한 아버지 덕에 먹을 것 걱정은 없는 줄 알았는데...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가 보다.

춘궁기에 당숙네 집에서 양식을 꾸어다 먹고 가을에 갚았는데 이자가 적다고 당숙이 화를 내었다 한다.

그 때는 장리쌀이 통용되던 때다.

봄에 쌀 한가마를 빌리면 가을에 한가마 반을 갚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일년도 안되어 50퍼센트를 더하는 것이니 고금리 중의 고금리다.

사채 이자율도 연 최고 30퍼센트로 제한한다는 지금과는 정말 다른 세상이었다.

어떻든 아버지는 가을에 장리 이자로 봄에 빌려 먹은 양식을 갚았다 하였다.

당숙이 원하는 이자는 곱장리였던 것이다.

봄에 한가마를 빌리면 가을에 두가마를 갚는 것이란다.

당시에도 그런 고리채는 흔치 않았는데 사촌 사이에 그런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하다니...

 

61년 농어촌 고리채 정리법이 발표된 후 일이었으니 아버지가 맞서지 않았을까...

채권자에겐 연리 20퍼센트의 금융채권을, 채무자에겐 연리 12퍼센트의 정리자금을 융자해주는 것이었으니 아버지는 높은 이자의 장리쌀을 갚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것에 무지하지 않았던 아버지이니, 당숙의 무리한 요구에 법대로 하자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당숙이 그리 화가 났는지도 모르겠다.

암튼 그 일로 그 당숙네하고는 소원해져서 왕래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상은 돌고 돈다.

당숙네가 끼니 걱정할 정도가 되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고소해하는 친척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당숙네 집을 찾았다.

여덟살이던 언니가 디프테리아로 도립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죽을 끓여다 준 은혜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 하였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말리지 않았다.

어려워진 집이니 어머니라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어쩌면 둘 사이에 의견이 오고갔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