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가 상전이다
할아버지는 아침 8시 25분이면 틀림없이 대문을 나선다.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사는 보림이의 등굣길을 맞으러 나가는 길이다. 그러니까 보림이네 집과 학교의 중간 지점에 우리 집이 끼어있어서 보림의 등굣길과 하굣길을 마중하고 배웅하러 나가는 게 일과가 되어 있다.
보림이네 집에서 학교롤 가자 하자 하면 ‘ㄱ’자나 ‘ㄴ’자로 가게 돼 있다. 그런데 ‘ㄴ’자로 나서면 우리 집 대문을 지나게 되고 ‘ㄱ’자로 가게 되면 우리 집과는 거리가 있다. 아이들을 만나는 재미는 ‘ㄱ’자로 가야 한다. 당연히 보림이는 ‘ㄱ’로 다니기를 즐기고 할아버지는 그 ‘ㄱ’자의 등굣길을 지키러 나간다.
손주가 무엇이간데 귀찮기도 하려만 큰길에 나가서 팔장을 끼고 섰다가 보림일 맞는다. 할아버지는 귀엽고 반가워서 하는 일이라지만 보림이도 그럴까. 할아버지를 만나면 배꼽인사에,
“다녀오겠습니다”도 해야 하니 말이다.
우리 집 장롱 손잡이에는 빨간 주머니가 하나 늘 걸려 있다. 보림이가 다녀 갈 때면 속을 뒤져 ‘돼지밥’을 빙자한 천원 권을 챙긴다. 할아버지는 그게 재미있어서 늘 빈 주머니에 천원 권을 접어 넣는다. 다음 번 보림이가 가져 갈 돼지 밥값이다.
집이 복잡하다며 보림이의 미끄럼틀을 우리 집 거실에다가 옮겨놓았다. 아래층에 혹시 시끄럽다고 할라 싶어서도 미끄럼틀을 옮긴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어쩌겠는가. 불편없이 타도록 중앙에 놓을 수밖에. 당연히 우리 집 거실은 반토막이 났고 드나들기가 복잡해졌다.
보림이가 올 것을 예감하면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는 보일러를 켜러 달려간다. 아직은 보림이의 발바닥이 따셔야하니까 말이지. 사실은 진즉에 보일러를 끄고 생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은 짠돌이 할아버지도 할미도 아깝지가 않은지고.
보림이가 오는 토요일 아침은 여느 날보다 부지런을 떤다. 보림이가 오기 전에 필히 보들이(우린 집 강아지)의 목욕을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강아지털 알러지가 있는 보림이는 그래도 강아지가 예쁘다고 가까이만 가니까 말이다.
보림이가 들어오고 나갈 때면 우리 집 현관의 센서는 작동을 하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미리 등을 켜놓기 때문이다. 아니, 센서등 뿐이 아니라 실내의 모든 등은 환하게 불을 밝힌다. 보통 때는 켜지도 않는 등까지도 말씀이야.
보림이의 제왕노름(?)이 끝나고, 하직인사를 끝내면 우리 내외는 대문 밖까지 배웅을 한다. 아주 추운 겨울엔 아들과 며느님의 만류로 현관에 서서 손을 흔들지만 말이지. 이제 제왕이 납셨으니(?) 일제소등(一齊消燈)이다. 할아버지는 주머니의 돼지밥도 다시 채워놓는다.
우리 집에서는 상전이 따로 없다. 아니, 상전이 따로 있다. 보림이가 상전이다. 며느님은 버릇 없어진다고 마다하지만 그건 그네들 사정이다. 내 마음이 아니, 할아버지의 마음이 그리 동(動)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모레가 ‘어린이 날’이다. 우리 상전은 뭘 원하는지 시방은 탐색 중이다. 이왕이면,
“짜잔~!”하고 깜짝선물을 하고 싶어서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제가 갖고 싶었던 선물을 받으면 얼나마 좋아할까. 그 얼굴에 번지는 환한 미소를 보고 싶어서다.
보림아~!
할아버지랑 할미가 보림일 얼마큼 사랑하는지 알쟈? 하늘만큼 땅만큼도 모자라~^^
할머니의 가게도 보림이만 오면 난장판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