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은 하셨습니까
아침엔 제법 쾌청하던 날씨가 배추밭에 들어서자 구름을 부른다. 비는 배추나 다 뽑걸랑 시작되기를 희망한다. 그러게 내가 아침 일찍 출발하자 하지 아니하던가. 영감을 원망해 본다.
‘내 말만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먹을 텐데 말이지.’
허긴. 연장을 챙기느라 분주했지. 한가하게 누웠다가 늦은 건 아니니 더는 나무라지 말자.
아니나 달라. 부슬거리던 빗방울이 배춧잎에서 제법 뚝뚝 소리를 내며 비를 뿌린다. 어쩐다? 그래도 몇 포기 안 남았으니 마저 해야지. 이미 방수 잠바가 물을 줄줄 흘린다.
‘아~니. 무도 뽑아야 하잖은가?’
갖도 아직 밭에서 내 손을 기다린다. 파도….
‘배추는 좀 늦은 모종을 했더니 덩치 큰 꽃봉오리로구먼. 허긴. 배추가 너무 장한 것보다 요런 게 더 맛이 있는 법이지. 겉을 싼 잎을 과감하게 도려내니 집에 가서 손질하기는 편하겠다. 무도 파란 머리를 비쭉 내민 꼴이 손아귀에 들어 올릴 만은 한 걸.’
‘갖은 내 첫 솜씨치고는 과분하게 너울거리네. 파는 건너 마을 먼 친척분이 심어보라 주시더니 것도 잘 컸군.’
바삐 움직이니 춥지는 않더니 이젠 도를 지나쳤는가 한기가 든다. 유난히 ‘오한’을 두려워하는 몸인지라 현관으로 달려가 비를 피한다. 망치소리가 들린다.
‘아니. 이 양반은 아직도?’
영감은 지금 낡은 사랑채를 허무는 중이다.
영감에게는 사랑채를 허무는 일이 오늘의 목적이긴 했지만, 그건 꼭 시방 비를 맞으며 할 일은 아니질 않는가. 심술이 날 수 밖에.
“배추 뽑는 걸 거들어야지욧!”
당신이 듣기엔 좀 거슬렸던 모양이다. 대구가 없다. 조금 화가 나면 쏘아보고 많이 화가 나면 아예 입을 닫는다. 이게 내가 파악한 그이의 거슬린 심사를 말하는 표현의 척도이다.
나도 오기가 발동을 한다. ‘오한이 오다가 감기 밖에 더 앓겠어!.’ 비를 맞으며 무밭으로 나간다. 어~라! 이만하면 그이가 장두리와 망치를 팽겨 치고 무밭으로 나와야 한다. 그런데 그림자도 보이질 않는다. 화가 많이 난 것이여? 그래도 그렇지. 나무라는 건 나중 문제고 우선은 무밭으로 내 달아 와야 하는 거 하닌가. 한참을 지나도 영감은 보이지 않는다. 제길~!
‘내, 다시는 김장밭을 일구나 봐라. 내가 김치쪼가리를 얼마나 먹는다고. 다 식구들을 위한 것이지.’ 오기가 발동을 하니 한기도 자취를 감춘다. 내친김에 갖이며 파도 뽑아 자루를 채운다. ‘자기 없으면 내가 못할 것 같아?’ 공연한 심통을 부린다. 배추며 무 갖과 파를 안아다가 여덟 자루를 만들어 묶는다. 여기서 어설픈 농군의 솜씨가 발휘된다. 당췌 힘을 쓸 수가 없구먼.
모퉁이를 돌아오던 영감이 놀란다. 기껏 배추뿌리나 몇 개 도려 놨을 거라 생각했나 보다.
“다시 김장소리만 해 봐. 난 올해로 김장은 끝냈어. 이 고생을 왜 해.”
“복순이 권사님네다 전화만 하면 다 된 김치를 실어다 줄 텐데.”
“내가 김치를 얼마나 먹는다고. 십만 원만 드리면 뒤집어 쓰고도 남는 걸.”
“….”
‘뼈 없는 도사’가 맞기는 맞는가 보다. 아무 소리를 해도 함구무언(緘口無言).
어쩌겠는가. 뽑아다 놨으니 끝은 봐야지. 이웃의 솜씨꾼 두 분을 모시니 이구동성(異口同聲).
“아이구~. 농사 잘 지었네.”
“배추가 아주 맛있게 생겼어.”
“무가 알토랑 같으이. 주인마님을 닮았나? 호호호.”
소금 술술 뿌리고는 늦은 저녁에 한 번 뒤집으라 일러주고 간다. 이 나이에 첫 김장이걸랑.
어깨가 쑤시고 다리가 저려온다. 보이라를 높이 틀고 뜨거운 물주머니를 껴안았지만 이가 덕덕 갈린다. 그래도 배추는 뒤집어야 한다. ‘아이구야~. 드디어 감기몸살이 오는구먼. 김장이나 끝내고 앓으면 좋으련만.’ 뜨거운 숨을 가쁘게 내 뱉으며 잠이 든 모양이다.
다음 날. 일곱 시가 되자 아주머니들이 대문을 들어선다. 채 쳐놓은 함지(다라이)를 보고는 입을 딱 벌린다. 영감은 어제 일이 맘에 걸리는지 묻지도 않고 씻어놓은 무를 모두 채칼 질을 해 놓았구먼. 그나저나 저 채를 다 어쩌나. 박권사 네도 한 봉지, 식구가 많은 장권사 네는 두 봉지, 세탁소에도 한 봉지 들어다 안긴다. 썰어놓은 채가 대형 함지로 셋이나 되지만 정작 내 배추엔 한 함지박만으로도 족하다. 농사 잘 지어 인심 한 번 잘 쓰네.
일꾼들이 기술이 좋아서 12시 전에 마무리까지 끝낸다. 마무리는 며느리가 있으니 내 손은 올해에도 김장엔 손도 대지 않았구먼. 일꾼들을 이끌고 사우나를 다녀와 누우니 와~ 이젠 세상 걱정할 일이 없네. 우리 동네에선 내가 김장을 제일 먼저 한 것 같다. 또 비가 부슬부슬 뿌린다. 까이껏~! 이젠 비가 오거나 말거나. 우리 동네에선 내가 김장을 제일 먼저 한 것 같다. 속이 다 시워~ㄴ하다. 내년 김장? 글쎄다. 생각 좀 해 보고 ㅋ~!
보림아~!
근디 있쟎여~.
김장을 담궈 놓구봉께 푸짐하긴 하다야.
약 한 번 안 주고 그려서 배추잎에 구멍이 숭숭한 오리지날 유기농이 아닌감.
우리 보림이 몸에도 좋고 안그냐? 내년 김장농사 한 번 더 해 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