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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 아버님


BY 선물 2016-10-17

바람 부는 날엔 도토리 줍는 사람들이 신이 난다. 투두둑 떨어지는데 여러 개가 함께 떨어지기도 한다. 실하게 통통한 알을 보면 횡재한 기분이다. 도토리 줍는 분들 대부분은 연세가 지긋해 보인다. 맛있는 묵이라도 해 드실 요량으로 불편한 몸 이끌고 나오신 모양이다.
몇 해 전, 공원 산책을 하시던 아버님도 그 유혹에 빠지셨다.
세상 제일 편하다하시며 동대문에서 몇 천원에 사 오신 주머니 잔뜩 달린 조끼를 입고 산책 가신 아버님은 그 많은 주머니를 도토리로 채워오셨다.

문제는 다람쥐 식량걱정 때문도 해먹지 않을 묵 때문도 아니었다.
오로지 벌레 때문이다.
도토리 거위벌레라고 불리는 벌레는 내게 구더기처럼 징그럽게 보인다.
벌레도 나도 서로를 보며 징그럽다고 놀라기만 할뿐 우리 집에 와봤자 하나 좋은 일 없을 것이다.
눈이 어두우신 아버님이 가져오시는 도토리엔 벌레가 유난히 더 많다.
도토리묵도 해먹지 않으니 가져오시지 말라고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다.
놀라 진저리치는 내 모습이 유난스럽게만 보이셨을 게다.
정말 간곡하게 부탁드렸더니 그 후로는 몰래 숨겨 오시기 시작하셨다.
베란다 화분 흙 속에 감추기까지 하신다.
화분에서 기어 나오는 벌레를 보곤 재차 부탁드렸더니 작아진 목소리로 눈에 보이는 걸 지나치기가 몹시 힘들다며 하소연하신다.
벌레가 나를 해칠 것도 아닌데 까짓 벌레 쯤 할 수 있음 좋으련만 몸 따로 맘 따로인 내 몸은 어쩔 수 없이 스멀스멀 몸서리친다.

도토리나무가 더 이상 열매를 내어주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실랑이는 줄어들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 나는 신발을 닦아드리다가 기막힌 그림을 발견하게 되었다.
새 신발이 불편하시다고 뒤축이 다 닳은 신발만 신고 다니시던 아버님은 당신도 모르게 벗겨진 굽 칸칸이 도토리열매를 담아오셨다.
칸마다 한 알 한 알 박혀진 굽을 보던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아버님은 전생에 다람쥐였음이 분명해.

세월이 흘러 그렇게 아끼시던 낡은 신발도 도토리를 품은 채로 버려졌다.
이제 아버님은 산책은커녕 짧은 외출도 어렵기만 하시다.

공원에서 도토리를 줍다가 노인 분들을 만나면 한 움큼씩 내어드린다.
고맙다며 묵해서 줄 테니 가지러 오라고 하신 분도 계시다.
주소까지 일러주신다.


다니실 수 있으실 때까지 그렇게 주우실 테지.
나처럼 기함하는 며느리가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