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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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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BY 나목 2020-11-17

오늘도 나는 서둘러 점심을 먹고 너를 만나러 간다. 설레임과 그리움의 길. 꽃이 피어 환하던 이 길에 어느덧 가을은 깊어 바람은 차고 퇴색한 가로수잎들 어디론가 떠나고 있구나. 가야할 때를 분명히 알고 가는 것이 어디 낙화 뿐이겠는가. 꽃진 자리에 신록이 무성해지듯 결별의 가을이 있어야 우리는 다시 꽃을 소망할 수 있겠지. 수없이 많은 계절을 눈 비 맞으며 바람에 부대껴도 해마다 펑펑 꽃잎 터뜨리는 우리의 벗나무를 봐. 그러나 언젠가는 물을 빨아올릴 기운도 없이 간간히 몇 송이의 꽃과 잎이 돋아나겠지. 아쉬워하거나 슬퍼하지는 말자. 어쩌면 꽃대궐을 벗어나 자유롭게 걷는 길이 더 행복할지도 몰라.
어제는 정다운 이로부터 홍시 한 상자를 받았다. 따뜻한 햇살이 오롯이 들어차있는 그 색깔과 크고 탐스러운 것이 홍시 하나면 제 아무리 굶주린 사람이라도 금새 배가 부를 듯 하더라. 작고 푸르던 감이 햇살과 바람과 비를 맞으며 저리 영글 듯 받아 들인다는 것은 체념이 아니라 넓은 마음으로 익어가는 것이라 여기면서 살자.

우리가 오르려고 했던 산이 높은 산이든 동산이든 누가 떠밀어서가 아니라 때가 되면 내려가야 할 길임을 분명히 알고 있지. 못 가진 것, 못 이룬 것 쯤이야.
니가 있어 참 좋다. 날마다 내게 불어오는 바람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니가 그리워할 사람이 되어줘서 참 행복하다. 아직은 단풍의 계절. 머잖아 나목으로 버텨야 할 겨울이 와도 넉넉하고 여유있게 서 있자.
꽃이며 잎이 떠난 날 우리의 시야는 넓어지고 영혼은 더 내밀해지겠지. 그리하여 어느날 오랜 바램처럼 흰눈이 내려 우리의 몸을 덮을 때 이윽고 우리는 영원을 꿈꿀 수 있으리라.

작은 새집속에 편지를 접어 넣으려니 빗방울이 지나간다. 가을비다.
부디 아프지 말고 행복하길.            -도산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