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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BY 재신다 와일더 조회 : 300

마담 엑스 (5)

 

#05

 


붉은 피. 사이렌 소리. 상실과 혼란. 암흑을 적시는 비와 어둠을 찢는 번개. 저 멀리서 울리는 천둥소리.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혼자였다.

 

 

“엑스, 일어나. 눈 떠. 꿈이야.”

 

 

내 허리를 감싼 두 손, 내 귀에 속삭이며 나를 달래주는 목소리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흐느끼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흥건히 땀에 젖은 이마에 엉겨 붙어 있었다. 몇 가닥은 입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등도
땀 때문에 축축했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고, 심장은 요란하게 쿵쾅거렸다.

 

 


“쉬. 울지 마. 이제 괜찮아.”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괜찮지 않았다. 두 눈을 감고 숨을 쉬어 보려고 애써 봤지만……. 끔찍한 장면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피가 보였다. 검붉은 피. 빗물에 섞여 뱀처럼 구불구불 길 위를 흘러가던 피. 그리고 두 개의 눈동자.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공허한 두 눈동자. 기묘하게 꺾인 사지. 그때 갑자기 번개가 번쩍거리며 밤하늘을 밝게 비추어서,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나 강렬한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가슴에서 숨을 빼앗기고, 뼛속에서 골수가 빠져나간 듯한 상실감이었다.

 

 

흐느껴 울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처절한 괴로움에 온 몸을 떨었다. 두려움을 몰아내고 나를 통제해 보려고 애썼지만 불가능했다. 흐느껴 울면서 숨을 헐떡이고, 몸서리치다
가 다시 눈물을 흘렸다. 가슴이 조여 왔다. 숨을 쉴 수 없었고,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오로지 붉은 피만, 시럽처럼 탁하고 검붉은, 심장에서 곧바로 흘러나와 빗물과 뒤섞인 그 피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엑스, 숨 쉬어 봐. 숨을 들이마셔. 내 얼굴을 봐. 내 눈을봐.”

 

 


그의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는 이상하리만치 걱정스런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따뜻하게.

 

 

“숨…… 숨을 쉴…….” 나는 계속 숨을 헐떡였다.

 

 

그가 나를 단단하고 부드러운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렸다. 이런 위로가 낯설어 오히려 긴장하고 말았다. 여전히 숨을 쉴 수 없었다. 눈 하나 깜박일 수 없었다. 두려움 때문에, 악몽이 내 혈관에 풀어놓은 독약 때문에 온몸이 마비되고 말았다.

 

 

“우리가 어떻게 만났지, 엑스?”

 


“당신이…… 나를 구했어.”

 


“맞아. 내가 누구한테서 당신을 구해냈지?”

 


“그 남자한테서. 그 남자.” 나는 꿈속에서 보았던, 피에 굶주린 어떤 사악한 존재를 기억해 냈다.

 


“내가 길에 쓰러져 있던 당신을 발견했어.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기 직전이었지. 온몸에 상처가 심했어. 심하게 두들겨 맞은 상태였고,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쳤어. 나는 당신을 안고 병원까지 갔어.

당신은 그렇게 죽어가면서도 한참을 기었어. 거의 1.5킬로미터였어. 사람들은 당신이 병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기 때문에 기어서라도 가려고 했던 것 같다고 했어. 하지만 혼자서는 병원까지 갈 수 없는 상태였던 거야.”

 


“당신이 나를 병원에 데려다 줬어요.”

 


나는 외우고 있는 문장들을 읊으면서 조금씩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쉬었다.

 


“내가 당신을 병원에 데리고 가긴 했지만, 병원에서 데리고 나올 수는 없었어. 신분증도 없고 의식도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당신을 병원에 혼자 둘 수도 없었어. 당신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당신이 회복할 거라는 확신도 없었고. 그래서 병원 사람들은 당신이 수술을 받는 동안 내가 진료실에서 기다릴 수 있게 해줬어.”

 

 

“당신은 여섯 시간 동안 기다렸어요. 나는 수술대 위에서 잠시 심장이 멈췄지만, 다시 의식을 되찾았어요.” 나는 이 문장을, 이 이야기를 외우고 있었다. 나 자신에 대해 내가 알 고 있는 유일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머리를 크게 다쳤었지. 의사들은 당신이 여기저기 많이 다치긴 했지만 가장 염려되는 건 두개골 부상이라고 했어. 의식을 되찾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고. 그리고 만에
하나 의식을 찾더라도 기억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어. 일부만 잃을 수도 있었지만, 전부 잃을 가능성도 있었고. 사지가 마비되거나 뇌졸중이 올 수도 있다고 했지. 뇌가 크게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당신이 깨어날 때까지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어.”

 

 

“나는 의식을 되찾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어요.”

 

 

“당신을 혼자 두고 영영 가버릴 수도 있었지만 다음날 다시 돌아갔어. 당신 상태가 어떤지 보려고.”

 

 

“그리고 다음날에도, 그다음날에도 왔죠.”

 


나는 내가 말을 해야 하는 부분과 멈춰야 하는 부분을, 그리고 쉬어야 하는 부분을 모두 외우고 있다. 나는 이제 숨을 쉴 수 있었다. 이제 허파를 움직일 수 있었다. 공기를 넣었다가 빼고,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기를 반복했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손가락을 풀었다. 눈을 여러 번 깜박거리면서, 발가락을 오므렸다가 다시 펴기를 반복했다. 익숙한 동작들이었다.

 


“경찰이 사건 현장을 발견했어. 살인 사건 현장이었지. 당신 가족들은 그곳에서 살해당했어. 그리고 당신은 그 장면을 목격한 거야. 전부 다. 그리고 간신히 혼자 살아남았어.”

 


“범인은 아직 거리를 활보하고 있어요.”

 


“당신이 나타날 때를 기다리고 있겠지. 당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입 밖에 내지 못하게 하려고 말이야.”

 


“하지만 난 아무것도 몰라요.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다고요.”

 


이 말은 사실이었다. 이 연극 대사의 일부이긴 했지만 어쨌든 사실이었다.

 


“나는 당신이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는 걸 알고 있어. 당신도 알고 있고. 하지만 범인은 모르잖아. 범인은 아직 어딘가에 있고, 당신이 살아 있고, 모든 것을 봤다는 사실을 알고있어.”

 


“당신이 나를 보호해 줄 거예요.” 이것도 사실이었다.

 


몇 안 되는 사실들 중 하나였다. 나는 그에게 보호 받고 있었다. 그는 내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면서 나를 안전하게 지켜 주고 있었다.

 

 


이 안에 가두어 놓고서.

 

 


“내가 당신을 보호해 줄 거야. 난 믿어도 돼, 엑스. 내가 당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거야. 그러니 나를 믿어야 해.”

 

 

“당신을 믿어요, 케일럽.” 나는 이 세 마디 말을 억지로 겨우 내뱉었다. 당신을 믿는다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닐 때도 있었지만, 사실일 때도 있었다. 지금은 사실이 아니었다.
이건 오렌지를 먹는 것과 비슷했다. 오렌지를 먹을 땐 과육에서 씨만 골라 뱉어 내야 한다. 그의 말에는 진실도 있지만 거짓도 있었다. 그리고 그 진실이라는 것도 고통스럽고 불쾌하긴 마찬가지였다.

 

 

“잘했어.”

 


그가 풍성한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이제 그만 자.”

 


딸각. 다시 방이 어두워졌다. 나는 이불로 내 몸을 감쌌다. 소음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진정되었다. 나는 그 파도 소리에 이끌려 물결
을 타고 이리저리 흘러갔다.

 


멀리서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혼자였다.

 

 

 

 


새벽이 희붐하게 밝아 올 때면 나는 어김없이 수치심에 사로잡혔다.

무력했다.

 


과거에도 무력했다. 악몽은 언제나 내가 가진 모든 힘을 쥐어짜 버렸다. 그리고 나를 이렇게 갑옷 하나 걸치지 않은 약점투성이의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공기에 굶주리고 빛에 굶주린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면 나는 내 꿈이 그저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그의 손길에, 안전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그의 손길에, 그리고 이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내게 주어진 유일한 위안거리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그의 손길에 간절히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연극.

대사.

줄거리.

 

 

하지만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 갑옷을 두르고 난 후에는― 샤워 후 옷을 갈아입고, 머리카락을 땋은 뒤 말아 올리고,화장을 꼼꼼하게 하고, 값비싼 구두를 신은 후에는 ―

 


나는 더 이상 가냘프게 우는 새끼 고양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새끼 고양이를 경멸하는 존재가 되었다. 갑옷을 두른 내가 무력한 나를 직접 사냥할 수 있다면 무자비하게 찢어발겨버리고 싶었다.

 


이빨이 서로 부딪쳐서 딸그락 소리가 날 때까지 붙잡아 흔들어 줄 것이고, 부잣집 망나니들에게 예절을 가르칠 때 사용하는 독설을 맛보게 할 것이다. 성숙한 여자는 두려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따끔하게 가르칠 테지.

 

 

성숙한 여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약한 모습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 그러니까 고개 들어. 등은 똑바로 펴고. 자세를 갖춰. 그게 이제 너의 갑옷이야.

 

 


매일의 일과였다. 감정을 지워 없애는 일. 드레스룸에 놓인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배와 팔과 어깨에 있는 상처들을, 그리고 왼쪽 귀 바로 위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이어지는 머리의 흉터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돌아섰다.

 

 

흉터는 이제 없다. 사라진 과거의 흔적 따위는 남아 있지 않다. 나약해질 필요도, 악몽을 꿀 필요도, 위로 받을 일도 없었다.

 

 

나는 마담 엑스다.

 

 


아침 5시가 막 지났다. 식사를 준비했다. 자연 방사 유정란의 흰자위. 손으로 빻은 밀로 만든 토스트, 그리고 그 위에 유기농 버터를 얇게 발랐다.

 


자몽은 반으로 잘라 절반은 비닐 랩으로 싼 다음 냉장고에 넣어 두고, 나머지 반은 얇게 썰어 트루비아를 살짝 뿌렸다. 설탕과 우유를 넣지 않은 홍차 한 잔, 유기농 비타민 첨가제로 식사를 마무리했다.

 

 


예약이 없는 시간에는 로잉 머신 한 시간, 요가 한 시간이 예정되어 있다. 운동을 마치면 점심식사. 신선한 유기농 시금치와 호두, 건크랜베리와 블루치즈를 넣은 샐러드에 비네그레트 드레싱을 조금 뿌려서 먹고, 신선한 과일 한 접시, 탈이온 증류수 한 병을 마실 예정이다. 아니면, 쓰긴 하지만 녹색 채소가 함유된 건강식 슈퍼푸드 스무디를 마실 것이다.

 

 

‘운동 시간을 20분씩 늘리는 게 좋겠어.’ 그가 그렇게 말했다. 살을 빼라는 의미였다. 식사와 운동에 대한 지침은 매일 아침 현관문 밑으로 누군가 밀어 넣고 가는 서류 봉투 안에 들어 있었다. 이 봉투에는 그날 방문 예정인 고객들에 관한 서류와 계약서도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매일 정확한 시간에 식사를 끝냈다.

 


그러면 첫 번째 고객이 노크를 하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다. 아침 식사를 마쳤을 땐 5시 45분이었다.

 

첫 번째 고객의 예약 시간은 6시 15분이었다. 이 시간은 보통 제일 어려운 고객들, 다시 말해 수업이 까다롭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고객들에게 할당된다. 약속 시간이 이르다고 해서 고객이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면 수업을 마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고객은 종료 수수료와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

 

 


윌리엄 드레이크가 오기까지 내게 30분이 있었다. 거실 창가에 서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길거리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루 중 이때가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사람, 겨드랑이에 신문을 끼운 정장의 사람, 뒷자락이 살짝 트인 펜슬드레스를 입은 여자, 스타킹을 신은 여자의 늘씬한 다리. 사람들 각각의 사연을 상상해 보았다.

 

 

진회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있다. 허리는 약간 헐렁해 보이고 어깨 패드가 좀 두꺼워 보였다. 바지는 길어서 구두 뒤축에까지 닿았다. 머리는 벗겨져서 뒤통수가 찻잔 받침 크기만큼 비어 있었다.

 


휴대전화에 대고 떠들면서 미친 듯이 손을 흔드는 것도 모자라 손가락으로 하늘을 찔러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업가인 그는 치열한 업계에서 올라서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증권업계, 혹은 법조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 법률이겠지.

 


항상 남들보다 약간 뒤처져, 간발의 차로 늘 일을 그르치는 사람일 것이다. 결혼을 해서 아내와 어린 아들이 하나 있겠지. 그보다 몇 살 어린아내. 아들은 학교에 갓 입학했다. 남자는 이미 나이가 많고 업무에 치여 어린 아들까지 키우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의 아내는 점차 재산이 불어날 거라는 기대감에 이 남자와 결혼했을 것이다. 남자가 승진하면 살림살이가 나아질 거라고, 아니면 미국 영주권이 필요했을지도.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애틋한 감정이 있겠지만 진정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을것이다. 남자는 사랑에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겨를이 없었다. 터무니없는 뉴욕의 높은 집세를 감당하기 위해 매주 60시간에서 80시간 일을 하느라 한 치의 틈도 없었다.

 


남자의 가족은 브롱크스에 살고 있을 것이다. 아내는 친정 식구들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친정집과 더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가려고 할 것이다. 아들이 학교에 가고 없는 동안 집에서 부업을 하면서 남편이 모르는 비상금을 모으겠지.

 


날이 갈수록 남편이 자신과 아들을 부양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이 와도 그 정도 돈이면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 둘이 살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멋대로 상상하다 보면 기분 전환이 되었다. 이렇게 하면 안전하게 삶을 상상하고 궁금해 할 수 있었다. 바깥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호기심을 갖는 게 위험하기라도 하다는 말인가?

그렇다. 내게는 위험한 일이었다. 미쳐 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정신을 유지하려면 균형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멀리서 딩동 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였다. 나는 베니스풍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6시 10분. 그는 5분 일찍 도착했다. 기다려도 노크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하이힐 소리가 들리지 않게 현관문 옆에 가서 섰다. 말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