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 쫓기듯 앞서 간 고모가, 내가 대청 마루에 걸터앉자, 갈걍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 네 생일 날, 한강이 몇 년 만에 얼었다고 해서, 네가 혹시나 되돌아 왔을까 싶어 서둘러 올라왔다. 방 불이 켜져 있어 반가운 마음에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는데 '지성'이가 의자에 앉아 있다가 내가 새 해 선물로 준 앨리스 그림의 다이어리를 떨어트리고는 오히려 내게 화를 내며, '고모가 친 엄마였다면 이런 날씨에 현이를 밖으로 돌렸겠느냐, 몇 번 만나지도 못한 군발이를 온 식구들이 대접을 하고 면회까지 가겠다니, 그 학생은 사회에 나와도 군대에서 해 놓은 전력이 있어서, 그 길로 쭉 갈 것 아니면 발 붙일 곳도 없는데 현이가 멋 모르고 나대면, 어른이 잡아 주어야지 도대체 이 생일 날 밤에 어디를 헤매는 줄 아느냐 '며 나를 다그치더니 일기장을 가지고 제 집으로 가더라. 그 뒤를 쫓아 나도 정숙이네로 갔어, 정숙이가 나를 보고 '오늘 현이 생일 이라고 아들 녀석이 꽃도 준비하고 케익도 준비한 모양인데 없어서 화가 난 모양이야. 너도 알지? '현'이 생일 지나면 곧 '지성'이 생일이 오는거.<전갈> 잡는게 <사수>라고 네 남편이 '지성'이를 오토바이 꽁무니에 태우고 '태극당' 빵집에 들러 비싼 케익을 사오곤 했지. 너랑 나랑은 '잡채에 기름이 덜 들어갔니/ 많으면 느끼하니' 하면서 티격태격하고, '현'이는 생일 풍선 분다고 볼이 터질 것 같이 되어 뛰어 다니고, 우리 그때 참 좋았는데...' 정숙이가 그렇게 말하니, 조금 안심이 되어, 네 일기장을 돌려 달라고 부탁했어. 정숙이가 지성이 방에 들어갔다 나와 네 일기장을 돌려주며 내게 귓속말로 '우리 '지성'이는 날 안 닮고 제 아비를 닮았나 봐, 아니 제 아빠보다 더 실속이 있는 것 같아, 우리 때는 '날아 다니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이 아무개' 였지만 지금은 '불사조 장 아무개 ' 밑에서 일해서 아무 걱정 없대. 너희 남편도 괜한 고집 피지 말고 좋은 게 좋은 세상을 살라고 해봐. ' 라고 속삭이며 내 어깨를 토닥거리는데 내 다리가 어찌나 후들 후들 떨리는지... 도대체 어떻게 집에 도착했는지 정신이 없었지만 한가롭게 바둑을 두고 계시던 네 고모부를 보자 '어차피 온 세상 온 천지가 썩은 동아줄이면, 그런 줄 우리도 하나쯤 붙잡고 있다가 아니면, 내 팽개치면 될 걸, 이렇게 맥 놓고 살다, 하나 밖에 없는 딸 아이가 무슨 일을 당해도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하면 그게 아비. 에미냐'며 네 고모부 해직 이후 처음으로 악을 쓰며 울었어, 남편이 혼자 두고 있던 바둑 돌을 흰 것, 검은 것 구별 없이 한 데 쓸어 담으며, '돌은 섞인다고 색이 변하지는 않지만 , 사람은 섞이면 색이 변한다는 것을 당신이 모를 리도 없고... ' 혼잣말을 하며 밖에 나가 술이 잔뜩 취해 들어 오셨어. 그때부터 말이 없어지고 술을 자주 입에 담기 시작하더니 끝내 ..." 사실' 의준'이는 이 집으로 전화한 적이 없다. 네가 양수리에 갔다 온 지 사나흘 지나서 이 편지를 받았는데, 수신인 이름이' 어머님전' 이어서 내가 열어 보았다. 잘 이해가 안되는 내용으로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할 때 갑자기 뒤뜰 대밭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 편지가 날아가는 것을 가까스로 주우며 이 편지를 너에게 보여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면회가서 자세한 내막을 알아도 늦지 않겠다고 생각했지 그때는......" 하얀 이팦 나무 꽃잎이 만들어준 미사보를 쓴 고모는 내 앞에 빛바랜 한 장의 편지를 주저하며 내 놓았다.
< 賢이씨 보세요. 우연히 만나, 간혹 소식을 보냈지만, 이제 제대 후에는 각자 가야할 길이 있음을 깨달았읍니다. 우리의 이별은, 몸과 마음을 다해 충성을 바칠 조국이 있음을 감사하며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던 추억으로 대신합니다. 추신 ; 12월 12일 날 방문하시겠다고 하셨지만 비상이라 방문객 허락이 나지 않아 안 오시는게 좋아요 . 평강의 은혜가 가족들께 꼭 내리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 韓約 올림 - >
나는 그의 편지를 보자마자 한 눈에 알아 보았다. 그가 내게 간절히 전달하고 싶었던 말을... 너무 늦어버린... 우리 둘만의 빙고 게임.
날방문하시겠다고하셨
지만비상이라방문객허
락이나지않아안오시는
게좋아요평강의은혜가
가족들께꼭내리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내 이름 빛 날 현<炫>을 생일 카드에 썼던 그가 내게 현명< 賢明>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 나는 ' 조국이 있음에 감사' 는 하여도 길을 걷다 말고 부동 자세로 서서 충성을 맹세 하기를 거부하여 파출소에 끌려간 적이 있음을 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별을 대신할 추억은 없다. 그리고 그날 방문하겠다고 한 적도 없었다. 만일 이 편지를 고모부가 보실 수 있었더라면 알아채셨을 것이다. 그가 왜 <韓約 >이 되고자 했는지/ 처음 우리 집을 방문 하였을 때, 고모부는 <삼국지 연의>를 읽고 계시다 한자를 알고 있는 그를 만나자 신이 나셔서, <韓約>이 <조조>의 계략에 빠져 배신자가 되어 < 韓遂>로 떠돌다 죽어야 했던 이야기를 하시며, '장수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숙명이나, 그 뒤에 남아 울고 웃는 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후세 사람에게 불리우는 이름이 주어지는데 세상이 패역할 수록 그런 것이 안중에도 없는 날들이 되가고 있다고 한탄 하셨다. < 賢者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韓約의 심정> 눈 앞에서 날리던 꽃잎들이 먼지처럼 조그맣게 보이더니 이내 깜깜해졌다. '눈 앞이 안 보이면서 점점 더 크게 보이는 소리 . <Meet Me Halfway> (*URL-Youtube). 훗날'Dr. Flu'에게 치료를 받으며, '의준'씨가 이렇게 웃었어요. 저렇게 웃었어요' 했던 표현을 자꾸 자꾸 바꾸어야만 했다 .'환하게 웃었어요 - 조금 웃었어요 - 웃었던 것 같아요 - 웃었을 거예요 - 웃지 않았어요 - 울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 그리고 그리고 생각해 내었다. 돌멩이 썬 블락 크림을 내게 주던 그의 손톱들이 까맣게 죽어 있었던 것을......Dr. Flu는 횡설수설하는 내 말을 들으며 ' 바닥이 드러난 호수 밑의 수초들에 몸이 칭칭 감긴 두 마리의 물고기 그림'을 보여 주었다. 나의 눈물이 흘러 호수를 메워 나가며 엉켜있는 수초들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