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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후 5 - 죽지 않은 베라


BY CALM 2016-01-19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Hello, it's me, I was wondering..."가 쉬지 않고 나오고 있는 3시간 동안을 천천히 달려 도착한, 마을 입구의 24 Hours 레스토랑 ' STOP, STAY & SMILE' 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니 피로가 몰려왔다.  이곳에서 15분 정도 올라가면  집이 나올 것이다. 여름에는 입구에 수위실이 있어 드나드는 사람을 확인하지만 11월의 낙엽이 호수를 덮으면 수위는  계절적 휴가에 들어갔다가  Easter 달걀을 바구니에 담고 나타난다. 수위 아저씨 Tony 는  매번 내가 집주인임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르지 않았는데, 다른 백인들은 무사 통과되고 있었다. 반 년 쯤 지나, 나는 Tony 에게 아이들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아들  한 명은 브라운 대학에 있다고 말하며 석양빛보다 더 환한 얼굴을 하는 그에게 , 그 대학의 표어 ' IN DEO SPERAMUS-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소망한다'  당신 가족 위에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말해 주었더니, 이제는 멀리서 내 차만 보아도 차단기를 열고 기다렸다가  수위실 창가에 놓아둔 테디 베어(*브라운 대학교 동물)를 흔들어 대었다.

 드디어 내 옆의 남자가  자기  발을 서로 탁탁 부딪히며 물었다. "우리 어디 가지?"  내가 세월의 저편에서 물었었다. " 나 어디로 가는거예요?"  그때도  이 남자는 두발을 탁탁 부딪히며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내가 자주 방문할게. 다 사람 사는 곳이다 생각하면 시간이 지나갈거야"  이때 나는, 마지막 마을에 갇혀 불에 타는 '베라'가 떠올랐었다.' 그 요괴 인간들은 불에 타 죽었을까? 탈출했을까? '(* 70년대 인기 만화 벰.베라. 베로의 마지막 회는  끝이 명확하지 않았다.) 나는 감옥에서도,  혹시 그 후속 편이 있는지 묻고 다녀 내 별명이 '죽지 않은 베라'가 되었다 .'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나를 구해줄  수 있었을까? '  나의 아버지는 한국 전쟁으로 늦어진  의대 공부를 뒤늦게 마치고 그의 아내가 첫 딸인 나를 낳아야 했던 날, 염색체 21번이 하나 더 많은 태아, 낙태 수술을  도우려고 인턴으로 일하는 병원으로 출근해야 했다. 그날 아빠  대신  엄마의 출산을  담당한 의사가  '어 이상하다. 몇 일 전까지 태아가 바로 있었는데, 바로 있었는데..." 하는 동안에 엄마는 하혈을 하였고, 급히 제왕절개를 하여 반 바퀴 더 돌아가 있는 나를 꺼내었을 때, 이미 싸늘해진 몸으로 아기를 안고 있는듯 감싸안고 죽은 엄마의 두 팔이 떨어지지 않아 나를 그 안에 넣었다 빼낸 후에야 엄마의  팔이 풀어졌다고 나를 길러준 고모가 말해 주었다. 아버지는 엄마의 장례식 며칠 후,아기가 없는 고모네 부부에게 나를 맡기고  훌쩍 집을 떠나 몇 년 만에  엽서 한 장을 보내 왔는데 , 외항선의 의사가 되어 이 나라 저나라를 돌다가 어쩌다  육지에 발이 닿으면  땅이 울렁 울렁 꺼지는 육지 멀미를 하여 평생을 바다에서 살기로 했다는 짧막한 사연과 함께 그 당시는 구입하기 힘들었던 러시아의 '마트로시카(*빈 속에 똑같은 인형이 여러게 들어있는 들어있다) 인형 셑을 보냈는데 가장 큰 인형의 속 안에 나의 엄마 이름 이니셜 'Y'가 그 다음 것에  내 이름의 이니셜 'L' 이 써 있었다. 고모는 그 속에서 계속 나오는 5개의 인형을 보며  "자손이 참으로 번창하겠구나 "  하셨는데 나는 그 인형들을  'Sinclair' 수사님의 옆자리 , 아버지의 무덤 아래 묻어 두고 왔다. 고모 말에 의하면 내가 5살 때 없어져, 온 동네를 뒤지다  국민학교 입학 예비 모임 깃발를 들고 맨 앞에  서있는 나를 발견하고 떼내려 했지만 막무가내 떨어지지 않는 나를 ,"아빠가 와  해결해 주실 거야" 말해서 데리고 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몇 주 뒤  아버지가  정말로 나타나  교장 선생님을 뵙고 난 후 나는 최연소 학년생이  되었었는데  4학년 붓글씨 시간에  벼루를 발등에 떨어뜨려  휴학을 해야 했기에  최연소의 자리를 반납하였다. 그때 아버지가 또 한번 땅을 밟고 들어와,  나를 안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나의 발바닥 오목한 곳을 쓰다듬으며 "발이 편발이네"  하였는데 고모가 "여자애 편발은 장애가 아니야, 오빠 발이 편발이잖아" 말해 주었다고 했다. 이때 나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나의 의대 입학장에서 고모는 눈물을 글썽이며, "너의 아버지가 이 모습을 보셨어야 하는데, 죽기 전까지 네가 장애인이 될것을  항상 두려워 하셨어  " 하며 풀어놓은 이야기에 아버지의 공포와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아버지는 낙태를  반대하는 천주교 신자였지만, 성한 사람도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 장애아로 태어날 태아를 보호하는 병원을 찾지 못하고  '딱 한번만. 한번만' 하다가 아내를 잃은 후, 당신의 죄값이 내게도 옮을까봐 멀리 도망다녔다고 한다. 아버지가 탄 배는<구리>를 싣기 위해 칠레에 여러 날을 머물곤 했는데 거기서 Lago Sinclair 수사님을 만나 의형제를 맺은 날 밤, 한 임산부가 수도원으로 쫓겨 숨어 들어왔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 독재 정권이 미국도 어쩌지 못하는 아주 괴물이 되어 날뛰며  발악을 하던 때로, 병원에 가지 못한  양심수의 아내인 임산부의 출산은  아버지가 무사히 도울 수 있었지만, 공포 속에 일찍 태어나야 했던  미숙아인 아기는 좀 더 안전한 인큐베이터가 필요했다. 아버지는 <산티아고> 병원의 인큐베이터에 아기를 입원 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나뭇잎처럼 쓰러지는 학생들과 함께 꺽이더니  끝내 일어나지 못하셨다고 한다. 그 당시 살해당한 사람들의 시체는 축구 경기장에 버려졌는데 다행히 아버지의 시체는, 원주민으로 오인되어 칠레 원주민들이 끌어 내었다가,  아버지의 치료를 받았던 적이 있는 한 마푸체 원주민이 알아보아, 수도원으로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내가 국민하교에 입학하던 해부터 세계 각국의 인형을 보내 주셨는데, 중학생이 되어 나는 아버지께 '얼굴도 이름도 희미한 아버지께, 저는 인형을 좋아할 나이가 지났습니다.  COLLECT 할 무엇을 보내 주시려면 'SHIP'를 보내 주세요' 라고 써서 보냈다. 그때부터 종종  ''들이 도착하였고 그 중에서도 '희고 큰 돛 꼭대기에 매달려  이마에 손을 얹고 먼 바다를 내다보는 조그만 사람이 있는 배' 를 제일 좋아하였지만 '저 조그만 사람은 어떻게 저 높은  꼭대기 위에서 내려 올 수 있을까?' 볼 때마다 궁금하고 초조하였다.   배는 아버지가 수사님들의 목공소에서 직접 깍아 만들었고 돛 위에 사람도 매달아 놓았는데 웬일인지 그 아래 통상적으로 있는 그물을 만들지 않아, 수사님들의 지적을 받았었다는 이야기를 수도원을 방문 했을 때 들었다.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은 Lago Sinclair 수사님은  내가 감옥에 들어가기 수 해 전에 '빨갱이 수사들' 이라고 몰아붙인 명단에 이름이 오른 후 ,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 내가 석방되기 몇 달전  온 몸이 너덜너덜해져 돌아와 'LOGO THERAPY' (*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삶에 복귀하지 못하고 자살하는 이유를 연구하다 발전된 의미 치료) 를 하는 DR. ERIC HUBER FLUTTER를 불러 나를 찾아보라고 부탁 했다고, 뒤늦게 청송으로 배달된   Dr. Flu의 첫 번째 편지에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