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791

25년 후 3 - 페도라를 벗은 남자


BY CALM 2016-01-11

난 이 남자를 안다.처음 차에 올라 탔을 때 페도라 밑에서 어지럽게 흔들리는 눈빛을 보았다. 25년 전 저편의 세월에서도 그랬었다.

"어디 먼저 갈까요?" 처음으로 내가 말문을 열었다. 문 옆에서 졸고 있던 젊은 남자가 화들짝 놀라 깨며. 창문을 손으로 쓸어 본다. 전기가 들어오는 차 창문에서는 눈이 녹으며 물이 계속 비처럼  흐르고 있다. "당연히 문 교수님 / 아니 장관님이 되실지도 모르는데 먼저 안전하게 모시고 난 다음, 우리가 내려야 하니, Continental Hotel 부터 갑시다" 창가의 남자가 먼저 대답을 했다. " 아니, 자네들 먼저" 처음으로 페도라에서 소리가 흘러 나왔다. " 아니 무슨 소리세요. 교수님을 먼저 안전하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닐세. 내가 들를 곳이 좀 있어서..." 말끝을 흐렸지만 그 끝에는 호수의 차가운 바람이 묻어 있었다. 호텔에 도착하여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4명의 지구 온난화 대책위원들이 각자 그들의 소망 (*Hyatt의 의미) 속으로 들어가고, 차가 Michigan Ave. Bridge를 다시 돌아 북으로 오를 때,그가 모자를 벗었다. " 어디 가서 조용히 얘기할 데가 없을까? 호텔은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을지 몰라서..."

" 수 십 년 전 이 다리의 오작동으로 예고 없이 두 갑판이 들어 올려져 차에 끼인 채 죽은 한국 남자가 있었어. 뒷자석 여자들은 뛰어내려 살았다던데..." 뜬금 없는 나의 대답 사이로 'Continental'이 지나가고 있었다.그가 페도라를 벗고 히끗 히끗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며, 말을 더듬었다.

"출소하는 날짜에 맞추어 서둘러 귀국했었어요, 청송에서 '한국'이를 만났는데 '형이 어떻게 여기에 와 ?' 했지. 나 말고도 위로해 줄 사람이 많아 보여, 못 보고  그냥 돌아와 보니 그동안 내가 보냈던  돈도 고스란히 돌아와 있더군 "

"다리 사이에 끼여서 죽은 남자가 외아들로 태어났을 때,  '물이 위험하다' 고 예언한 점쟁이의 말에 따라   ㅠ그 부모는 바다가 없는 시카고로 이주 했지요  , 학교에  '물 공포증' 의사 진단서를 첨부하여 수영 수업을 못 가게  했지만. 그 남자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목이 부러져  죽은 후, 홀로 남은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수영을 했다면 살았을까? 물로 뛰어내렸어도 죽었을까?' 온 종일 매일  같은 질문만 중얼 거리다가  돌아 가셨어. 할머니의 장례 행렬은  운구 차와 목사님 한 분을 태운 내 차 하나였고..." 나는 핸들이 부서져라 움켜쥐고, 헤트라이트 불 빛 끝에 시선을 두었다. 앞서 가던 차의 꼬리가 사라지자 높다랗고 견고한 고속도로의 방음벽이 나타났다.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흘깃 쳐다 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   "칠레로 갔다는 소리도 있었고, 베를린에서 보았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이야'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다시 모자를 썼다. 눈이 우박으로 바뀌어 차 지붕 위를 치는 소리에, 각자의 웅얼거림이 빨려 들어가고, 방음벽은 그 소리를  다시 굉음으로 토해내며   Wisconsin을 향하고 있었다.   

 ' 나는 이 남자를 그냥 호텔 앞에 내려 놓았어야 했다.'            

"후드 쟈켓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고 내게 귓속말을 하며 울먹였던 이 남자의 목소리는 몇 년 후 , 발목이 짧은 면 바지에 푸른 리넨 긴 소매 팔을 접어 올린 차림으로 TV 의 <명사에게 묻는다> 에 나와 "많이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기후의 재앙을 앉아서 당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정보를 선점해 기후가 돈벌이가 되는 시대입니다. 역사 학도였던 제가 기상학에 관심을 갖고 뛰어든 것은 <노아의 홍수> 때가 다시 온다면, 국민 여러분이 다 타실 수 있는 <방주>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잡동사니 동식물들을 다 몰아 넣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 꼭 필요한 것들만 싣고 한 40일 쯤 푹 쉬다 나오면 세계가 이렇게 시끄러울 필요가 없겠지요 " 하며 호탕한 웃음과 듣기 좋은  비음이 섞인 소리로 바뀌어 있었고 명석해  보이는 동그란 이마 위에 몇 가닥 내려진 머리카락을 올리는 그의  모습과  겹쳐 < 세종 기지>가 있는 칠레의 남극에서 정부의 검열단들과 함께 태극기가 꽂힌 방한복을 입고 시찰을 하고 있는 자료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 나는 이 장면을 ' 칠레의 독일'이라 불리우는 푸에르토몬트의 수도원에서 보았다. 나의 후견인이었고,  Dr. Flu의 스승이었던  Lago Sinclair가 그의 주보 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에서 800 Km 성지순례를 다 마치고,평생을 지고 다녔던  배낭을 더 이상 풀지 않으신 채  조용히 이 혼돈의 별을  떠나셨기에, 그를  남극으로 떠나는 입구에 있는 <푼타 아레나스>의 수도원 공원 묘지에 안치하고 돌아오는 길에 태극기를 단 여러 대의 짚차가 뽀얀 모래 먼지를 털며 지나가는 것을 보았었고 며칠 후,  인터넷을 통하여 ,문 교수가  한국의 '라면' 이 지구 끝까지 진출한 것을 감격해 하는 장면을 에필로그로  촬영한 것까지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