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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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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목숨을 건 맞섬55


BY 한이안 2016-04-11

뫼가 힘겹에 몸을 일으킨다. 들이 얼른 다가가 몸을 부축한다. 비틀거리며 컴퓨터로 간다.

애니와 소훈이 바짝 긴장한다. 웃음을 뚝 멈춘다.

뭐하려는 거지?”

소훈이 묻는다. 애니는 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본다. 뫼가 마우스를 움직이더니 손가락으로 누른다. 그러더니 터널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균의 작업실로 건너간 거지? 혹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아님 비틀거리면서까지 가야 할 이유는 없잖아.”

애니의 눈동자가 한 곳에서 멈춘다. 소훈의 말이 흘려지지 않는다.

꿍꿍이, 고통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버릴 수 없는 꿍꿍이가 뭘까?’

아무리 생각을 굴려도 맨주먹이다. 건져올려지는 게 없다.

안 되겠어. 모두 지워야겠어.”

한꺼번에 모두 삭제하겠다고? 그러다 잘못 되면?”

잘못 될 일은 없어. 어차피 고통이야 겪을 수밖에 없어. 그럴 바엔 되도록 빨리 해치우는 게 나아. 미적거리는 사이 놈이 수작이라도 부린다면 그게 더 위험해.”

애니가 유전자자료를 열어 명령어를 차례로 삭제한다.

됐어. 이젠 끝났어. 소훈의 작업실을 열고 들어가 놈들을 올가미로 한꺼번에 옭아매기만 하면 돼.”

한데 기분이 꿀꿀하다. 말이 버석거린다. 피조물에게 부여했던 권한을 되돌린 탓이라 생각하고 넘긴다.

놈들이 왜 돌아오지 않는 거지?”

소훈이 화면에서 떠나질 못한 채 지친 낯빛을 한다. 이상하게 방방 떠야할 마음이 뜨질 않는다.

열흘이 다 돼가도록 애니민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화면은 텅 빈 집들만 비춘다.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소훈이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묻는다.

무슨 일은? 후유증을 견디느라 머물고 있을 뿐이야.”

애니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하지만 소훈은 걱정을 털어내지 못한다. 점점 더 불안감이 크게 밀려온다.

열흘이나 지났어. 짧은 시간이 아니야. 후유증을 털어내고 일어나고도 남을 시간이야.”

그래서? 그래서 어쨌다고? 아직 통증이 남아있는 거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는데? 내 말을 못 믿는 거야?”
애니의 말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다. 소훈이 쭈뼛거리며 애니에게서 서너 발짝 떨어진다.

둘 다 화면 앞에서 떠나질 못한다. 화면 앞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있다.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잠을 자기도 했다 한다. 하지만 애니민들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서서히 지쳐간다.

그만 접자! 피곤해서 못 살겠다.”

소훈이 먼저 말을 꺼낸다.

잠깐만!”

애니가 머리를 화면 앞으로 가져간다. 소훈도 화면 가까이 다가간다. 아이콘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러더니 다시 멈춘다. 또 다시 움직임이 잡힌다. 하지만 꾸물거리기만 할 뿐이다.

새끼들, 감질나게 왜 이래?”

애가 탄다.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가래처럼 시간이 걸리적거린다.

됐어. 놈이 눌렀어.”

애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애니민들이 짠하고 나타난다.

뭐야?”

애니와 소훈의 눈이 뒤집어진다. 믿을 수가 없다. 그동안의 겉모습은 온 데 간 데 없다. 젊고 활기찬 미소로 얼룩진 사람이다. 스무 살의 이균이 화면에서 웃어 보이고 있다. 그러더니 다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깨어났던 그 때의 위치로 간다.

뭐하는 거야? 놈들이 지금 뭐하는 거야?”

불안하게 눈빛을 굴리며 고함친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애니민들을 태운 캡슐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땅에서 떨어진다. 그러더니 어디론가 휙 사라진다. 애니민들의 거주구역도 통째로 없어진다. 뿌연 화면만 지지직거린다.

이균. 이 새끼! 이균 이 새끼!······.”

입에서 이균 이 새끼라는 말만 쏟아져 나온다. 다른 말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이를 바드득 갈더니 탁자 위에 있는 물건을 쓸어낸다. 눈이 사막의 모래를 태우는 태양처럼 이글거린다.

살아있다 이거지? 지독한 놈. 그 안에서 살아서 이런 식으로 내게 물을 먹여? 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말이 모두 이빨에 씹혀서 나온다. 두 손으로 책상을 짚고 부르르 몸을 떤다. 화면을 노려보는 눈이 하이에나 같다. 숨결이 목에 걸려있다. 갑자기 몸을 꼿꼿하게 세우더니 닥치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지기 시작한다. 바닥에 던져진 것들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난다. 순식간에 사무실은 쓰레기장이 된다.

이균, 이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놈. 살아 있었어? 니 놈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어?”

눈빛이 허공을 맴돈다. 마구 손을 더듬는다. 헛손질만 해댄다. 내던질 물건도 더는 잡히지 않는다. 분이 다 풀리지도 않았는데 풀어낼 게 없다. 비로소 눈빛이 풀린다. 그만 힘없이 픽 주저앉는다.

믿을 수가 없다. 믿어지지가 않는다. 조그만 더 기다리면 돈이 다발로 들어오게 돼 있었다. 그렇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한데 물거품이 돼버렸다.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단단하게 쌓아올렸는데 받침 하나가 빠져나가면서 힘없이 주저앉았다. 삐거덕거리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었다.

이균과 손을 잡은 게 탈이었다. 놈의 머리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아픔이 뼛속까지 스며든다. 놈의 머리를 건드리는 게 아니었다.

겨우 쓰레기 더미에서 몸을 빼내 소파로 가서 앉는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이균을 갉아댄다. 하지만 제 몸만 아프다. 이빨에 물어뜯긴 손가락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다시 이균을 이빨 사이에 끼워놓고 갈아댄다. 분이 풀리지 않는다. 외려 이균의 분신들이 공중을 떠돌며 깔깔댄다. 껍데기를 벗어던진 애니민들까지 한 패가 되어 비웃고 있다. 조조처럼 살다가지는 않겠다고 별렀었다. 말년까지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내고 싶었다. 한데 50도 안 된 나이에 환영에 시달려야 한다니!

눈앞을 얼쩡거리던 놈들을 잡으려 허우적거린다. 한데 한 놈도 잡히지 않는다.

그 사이 소훈은 짐을 챙겨 말도 없이 떠나버린다.

몰인정한 놈.

하지만 잡아 앉힐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배가 고픈데 일어나 밖으로 나갈 자신이 없다. 배에서는 연신 꼬르륵 소리가 난다. 겨우 몸을 일으켜 세면실로 간다. 거울 속에 꾀죄죄한 모습의 낯선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너도 내가 불쌍한 거냐? 미친 놈.”

혼자 중얼거리고 그냥 돌아 나온다. 시간이 그대로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모두 다 내려놓고 그냥 잠만 자대고 싶다. 한데 그것도 허락되지 않을 모양이다.

문소리가 난다. 고개를 돌린다. 이균이 미소를 띠고 다가오고 있다. 갑자기 흐릿해지던 정신이 돌아온다. 눈을 부라리고 으르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