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는 처음부터 차근차근 들여다본다. 애니매이션 자료들은 눈을 감고도 훤하다. 조그마한 변화도 금세 잡아낸다. 하지만 유전자 자료는 아무리 봐도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꼭 암호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다. 열고 닫기를 반복한다. 열어놓고 그냥 바라보기만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생각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다. 이균이 손을 댔다면 그 안에 흔적이 담겨 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한데도 눈 뜬 장님에게 자료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며칠을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지만 알아낸 게 하나도 없다. 조급하게 굴지 말자고 스스로를 달랜다. 이선의 글을 열어본다. 열어봐야 눈에 띄는 것은 없다. 그녀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 올라오는 건 그녀의 글이 아니다. 애니민들의 움직임을 자동으로 읽어낸 컴퓨터가 알아서 올리고 있다. 닫고 다시 유전자 자료 화면을 불러온다. 그냥 심심풀이로 내용을 훑어나간다. 그림이라 생각한다. 내용을 읽어내야 한다는 부담이 없어서인지 그럭저럭 견뎌진다. 분량이 많긴 하지만 그것도 봐줄만 하다.
갑자기 커서를 내리느라 화살표 키에 얌전히 얹혀있던 손가락이 멈춘다. 낯익은 게 눈에 들어온다. 자신이 뫼에게 권한을 부여하면서 썼던 명령어다. 그게 눈에 띈다.
‘맙소사. 놈이 내 계획을 다 알고 있었어. 그걸 이용해 욕심을 한껏 채우려 했던 거야.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척 어리숙하게 굴면서 뒤로는 수작을 부렸던 거였어. 애니민을 현실로 끌어오기 위해선 먼저 내 손에 맡겼다가 온전하게 빼내야 했겠지. 그래서 묵묵히 때를 기다렸어. 소름 돋네.’
애니가 이를 간다.
‘명령어를 유전자에 꼭꼭 숨겼어. 어쩐지, 생각보다 뫼의 두뇌가 빨리 깬다 했어. 바로 이 때문이었어. 내 손에서 빼앗는 순간 이것들을 삭제하려 했겠지. 무서운 놈. 알고 있었다는 것도 소름 돋는데, 이걸 이용할 생각까지 했다는 게 섬뜩하네. 보고 있으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아. 눈동자 초롱초롱 빛내던, 맑은 영혼으로 가득했던 이균 맞아? 아무도 몰래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았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가 있어?’
마우스를 이용해 명령어를 삭제한다. 뫼의 울부짖음이 들려오는 듯하다. 온몸이 오싹한다. 다시 커서를 움직여 자료를 훑어나간다. 전보다 더 꼼꼼하게 자료를 살핀다. 다시 낯익은 명령어가 눈에 들어온다. 삭제를 하려고 불럭을 씌운다. 스페이스바를 누르려다 멈춘다. 앞의 내용을 복사해서 번역앱에 올린다. 번역 내용이 올라오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다. 믿어지지가 않는다.
“잘 돼?”
소훈이 다가와 관심을 보인다.
“알고 있었어. 놈이 내 계획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죄 알고 있었어. 그뿐이 아니야. 컴퓨터 프로그램에도 빠삭했어. 내가 뫼에게 권한을 부여하면서 썼던 명령어의 의미를 다 꿰고 있었어. 그걸 유전자의 해당부분에 숨기는 치밀함까지 가진 놈이었어. 그래서였어. 놈은 내가 손을 댈 수 없도록 해놨었던 거야. 난 그동안 놈의 노림수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었어. 죽일 놈. 저승으로 보냈기에 망정이지 살려뒀다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거야.”
“그래서?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뭐 하긴? 명령어를 찾아 하나하나 제거하고 있지.”
“그럼 모든 게 끝나는 거야?”
“응. 다 끝나. 이균도 끝나고 애니민도 끝나고. 내가 최후의 승자가 되는 거야. 나, 애니가 최후의 승자가 된다고.”
애니가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승리감이 온몸을 휘감아온다. 붕 뜨는 기분이다.
“애니민들은?”
“별로 달라진 건 없어. 밤마다 한 번씩 바깥나들이 다녀오고, 잠자고.”
“그리고?”
“먹고, 놀고, 웃고 떠들고, 그런 거.”
“뫼도?”
“니가 공격하지 않으니까 놈도 할 일이 없는 거지. 애들이랑 어울려 놀고 있어. 속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실컷 놀게 내버려 둬! 조만간 그 즐거움이 다할 날이 올 테니까. 내가 명령어를 삭제하면 더는 힘도 못 써. 우리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야.”
애니가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는다.
“오늘은 어디 가서 실컷 흔들어보고 싶다. 폼 잡고 근사한 데 가서 칼질도 해보고 싶고.”
“못 할 게 뭐가 있어? 주머니도 넉넉한데.”
소훈이 맞장구를 친다. 애니의 말이 귀에 솔깃하다.
애니도 나쁘지 않다. 오랜만에 몸과 입을 호강시켜주고 싶다.
먼저 빵빵하게 속을 채운다. 무작정 간판을 보고 클럽으로 들어간다. 입구에서 듬직한 체구의 남자 둘이 달려들어 밀어낸다.
“뭐야? 돈 주겠다는데?”
“그 주머니에 있는 돈은 필요 없어. 꺼지기나 해.”
“자식들이, 내가 누군 줄 알고?”
“누구면 뭐해? 벌써 인생 반 토막을 다 잘라먹은 늙다리고만.”
늙다리라는 말에 불편한 심기가 폭발한다. 씩씩거리며 달려들려 한다. 소훈이 잽싸게 가로막는다.
“나이 많아서 안 된다잖아. 물 흐린다잖아. 가자! 어디 가서 게임이나 한 판 뭉개고 가자!”
“너나 가서 게임이나 뭉개. 난 흔들어야겠으니까.”
애니가 폰으로 뭔가를 검색한다.
“가자!”
“어디를?”
“가면 파는 곳.”
애니가 앞장서 걸어간다. 소훈도 종종걸음으로 뒤쫓아 간다. 가면을 골라 얼굴에 푹 뒤집어쓴다. 늙다리는 보이지 않는다. 서둘러 클럽으로 간다. 클럽 종업원들이 이번에도 막아선다.
“여긴 가면무도회장이 아닌 걸 모르시나?”
종업원이 애니를 밀쳐낸다. 애니가 뒤로 밀려난다. 소훈이 애니를 잡아 끈다.
“새끼들, 세월이 니들은 비켜가 준대? 두고 봐라! 내가 이거 통째로 살 테니까. 그럼 내가 니들부터 잘라주마?”
삿대질을 하며 언성을 높인다. 클럽종업원들은 다른 손님들 맞기에 여념이 없다. 쳐다보지도 않는다.
“내 뭐랬냐? 게임이나 한 판 때리고 가자 했잖냐? 게임장이나 가자! 가서 기분이나 풀고 들어가자.”
“넌 게임장 갈 기분이 남아 있냐? 너나 가서 실컷 게임 때리든지 두들겨 패든지 해라! 난 그냥 갈 테니까.”
열이 단단히 치받는다. 뭐 하나 걸리면 두들겨 패주고 싶다.
“기분 좋게 나섰다가 이게 뭐야? 나 잠잘 테니까 건드리지 마!”
돌아오자마자 말을 던지고 소파로 가서 벌렁 드러눕는다.
‘새끼들,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것도 아니고. 내 나이 이제 40대 중반인데 늙긴 어디가 늙었다고. 아직도 팔팔한데.’
혼자 중얼거려 보지만 속이 풀리진 않는다. 잠도 오지도 않는다. 일어나 컴퓨터로 간다.
“좀 쉬어. 급한 것도 아니잖아.”
“뫼는?”
소훈의 말은 귓등으로 넘기고 엉뚱하게 뫼를 끌어온다.
“침대에 누워있어.”
“언제부터?”
“초저녁부터.”
“정말?”
“할 일도 없고, 피곤한가보지?”
“다른 애니민들은?”
“뫼 침대에 둘러앉아있어. 뫼답지가 않아?”
소훈이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저것들이 왜 저러지? 안 하던 짓을 하고.”
애니가 다가가 화면을 살피며 중얼거린다.
“뫼가 늘어져 있는 거 같아. 둘러앉아 있는 애니민들도 시무룩해 보이고.”
“명령어가 삭제될 때 몸에 자극을 주었나?”
애니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툭 던진다.
“잘못 되는 건 아니겠지?”
소훈은 잘못되기라도 할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그건 아니야. 명령어는 유전자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그럼 왜 저러는데? 처음이잖아.”
“으하하하······.”
애니가 갑자기 자지러지게 웃는다.
“놈이, 놈이, 으하하하······.”
말을 하다 말고 다시 웃어 제친다. 소훈은 뭐가 뭔지 모른 채 애니를 바라보기만 한다.
“명령어를 삭제할 때 온몸을 휘감았던 고통의 후유증. 힘이 빠지고 있는 거야. 하하하하······.”
애니는 고소함을 금할 수가 없다. 그동안 켜켜이 쌓여있던 분이 싹 날아가는 느낌이다.
“정말? 놈이 보통 애니민으로 돌아오는 중이라고? 하, 하, 하하하하······.”
소훈도 애니의 말에 신이 난다. 차곡차곡 쌓이는 돈뭉치가 눈에 선하다.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애니와 소훈은 화면을 들여다보며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그치기를 되풀이한다. 화면 앞을 떠나기도 아쉬워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