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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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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목숨을 건 맞섬53


BY 한이안 2016-04-04

알람 소리에 애니가 벌떡 일어난다. 새벽 3시다. 겨우 한 시간 눈을 붙였다. 뫼의 컴퓨터는 조용하다. 마음 놓고 네 번째 아이콘으로 다가간다. 철문이 또렷하게 보인다. 누르기만 하면 된다.

몇 번 깊은 숨을 쉰다. 네 번째 아이콘은 얌전하다. 주변을 얼쩡거리는 것도 없다. 거침없이 다가가 손가락에 힘을 준다. 닫혀있던 게 열린다. 안이 보인다. 한데 텅 비어 있다. 어둠만 가득할 뿐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 줌의 김이 새어나가더니 그냥 가라앉는다.

낚싯밥이었어? 누구 작품이지? ? 아님 이균? 아냐. 이균은 죽었어. 이균은 아냐. 그럼, ? 뫼가 무슨 수로? 이균이라면 몰라도.’

머릿속에서 뫼와 이균이 엎치락뒤치락한다. 둘 다 한 치의 물러섬이 없다.

낚싯밥으로 뭘 쓴 거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찬찬히 들여다본다. 낚싯밥도 종류가 가지가지다. 뫼든 이균이든 그것은 차차 알아내기로 한다. 먼저 낚싯밥으로 던진 게 무엇인지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뚫려 있다. 애니민들이 현실로 나올 수 있는 통로. 어둠속이라 또렷하지는 않지만 뚫려있다는 것만은 감지가 된다.

어디로 뚫린 거지?’

이균의 작업실이 스치고 지나간다. 뚫렸다면 생각할 수 있는 곳은 거기밖에 없다. 후다닥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정신없이 달린다. 도로는 뻥 뚫려있다.

더듬거리며 이균의 작업실로 연결된 통로 쪽으로 다가간다. 가느다란 불빛 하나 없다. 겨우 계단을 벗어난다. 좁은 통로만 찾아 따라가면 된다. 다시 손을 더듬거린다. 손이 쑥 들어가는 곳이 바로 통로다. 한데 모두가 막혀 있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친다. 비밀번호를 마구 눌러댄다.

죽었어. 벌써 한 달이 돼가고 있어. 들어가기만 하면 놈들은 내 손에 들어오게 돼 있어.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게 내 뜻대로 되고도 남아. 한데 이걸 어떻게 열지? 정말 놈은 죽었겠지?’

생각이 엉킨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이 되어 간다. 누가 튀어나와 열어줄 것도 아닌데 굳게 닫힌 문을 잡고 흔들어댄다. 입에서는 험한 욕이 줄줄이 새어나온다. 애니민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들뜸은 속쓰림이 되어 다가온다.

이균 이자식!”

이균이 살아있을 거라는 생각은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도 이균을 내려놓지 못한다. 이균을 이빨 사이에 끼워 넣고 바드득 간다. 비명소리도 없는 이균이 뻣속을 긁어댄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발길을 돌려 사무실로 돌아온다. 화면은 그대로다. 소훈의 컴퓨터로 가서 애니민들의 동정을 살핀다. 모두다 침대에 푹 파묻혀 쌔근거리고 있다. 맥이 탁 풀린다. 별 거라도 되는 듯 밤잠도 설쳐가며 노렸다. 에너지음료를 통으로 들이 부었다. 진기한 보물이라도 있을 줄 알고 잔뜩 기대를 했다. 한데 뻥 뚫린 구멍일 뿐이었다. 끝이 꽉 막힌 굴인지 아니면 다른 세계와 연결된 터널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냥 속임수용 굴이라면 다행이지만 터널이라면 어디로 뚫렸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애니민들의 움직임을 현실에서도 잡아낼 수가 있다.

맥은 풀렸지만 대신 조바심이 사라졌다. 펄펄 끓던 불길이 가라앉고 다시 냉정함이 찾아든다. 여러 날 만에 침대로 가서 단잠을 잔다. 잠시 애니민을 내려놓는다. 잠자는 동안만 뫼도 편히 놔주기로 한다.

애니가 밤새 다녀간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결국 네 번째 아이콘이 애니의 손에 열렸다. 한데 이상하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빨려 들어갈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

들이 가까이 다가와 묻는다.

놈이 밤새 다녀갔어.”

그럼 뚫린 거야?”

들이 놀란 듯 묻는다.

. 한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게 좀 이상해서.”

그럼 놈이 알아채지 못했다는 거네?”

크게 걱정했다 마음을 놓는 말투다.

지금은.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

그렇겠지. 어떤 놈인데. 그래도 지금은 모른다는 게 어디야? 시간은 벌 수 있잖아.”

할 게 있어야 시간을 벌든 말든 하지? 가상세계로 나가는 길이 모두 막혔잖아. 그게 엄청 큰 권한이었던 거였어. 그 권한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는데 말이야. 지금은 애니를 막아내기도 버거워.”

놈이 알면 어찌 나올까?”

글쎄?”

애니가 들을까봐 소곤소곤 말을 주고받는다.

집요한 놈이야. 쇠심줄이라도 삶아먹었나? 어떻게 멈추는 게 없어? 이 만큼 했으면 물러날 법도 한데.”

들이 허탈해서 말한다. 뫼는 할 말이 없다.

놈이 잠자고 있을까? 왜 이렇게 조용해?”

정신이 들었겠지. 그동안 설쳐대던 마음을 걷어 들인 거겠지.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잖아. 그런 놈들의 특징 있잖아. 서늘하다 못해 싸늘하다는 거.”

정신이 들 거면 팍 들면 오죽 좋아? 어설프게 정신이 드는 게 문제야.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잖아.”

들의 말이 삐딱하다. 애니를 곱게 다룰 수가 없는 모양이다. 잠을 자는지 애니는 저녁 늦게까지 기웃거리지도 않는다. 맘껏 들었다 놨다 한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애니는 깨어난다. 다시 한 번 네 번째 아이콘을 클릭한다. 스르르 문이 열린다. 그뿐이다. 아무런 움직임이 잡히지 않는다. 내용도 없다. 굴인지 터널인지 알 수 없는 구멍만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터널이라면 이균의 사무실일 텐데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다. 머리를 굴려보지만 소용이 없다. 날이 밝아올 때까지 멍하니 생각만 굴려댄다.

안 잔 거야?”

소훈이 커피를 내밀며 묻는다.

아냐. 한밤중에 깨어났어.”

자식들, 도깨비도 아니고.”

소훈이 밑도 끝도 없이 말을 한다.

누구?”

애니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되묻는다.
누군? 애니민들이지.”

?”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 나타나잖아. 어디로 사라지는 건지 영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뭔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 같던데. 거기가 어딘지를 모르겠어.”

이균의 작업실.”

애니가 속이 바작바작 타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지 놈들이 무슨 수로 현실로 나와?”

소훈이 어림없다는 투로 말한다.

못 믿겠어? 그럼 와서 봐!”

애니가 마우스를 클릭해 보여준다.

여기야. 여기로 드나들고 있어. 이균이 만들었어. 한듬도 이곳을 통해서 보냈고. 놈이 지 입으로 그렇다고 했어.”

맞아. 애니민들이 빨려 들어가던 바로 그 구멍이야. 똑같아. 한데 애니민들을 납치라도 하려 했던 거야?”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놈은 애니민들을 세상으로 끌어내려 했던 거야. 그럼 더 실감나겠지. 아무튼 대단한 놈이야. 신도 이승에 내보낸 걸 후회하고 있을 거야.”

애니가 기가 찬 모양이다.

그럼 뭐해? 어서 가 보자!”

소훈이 애니의 팔을 잡아 끈다. 애니는 태연하다.

지지난밤에 다녀왔어. 문이 꼭꼭 닫혀있더라. 때려 부수려면 굴착기는 있어야겠더라.”

죽은 건 확실하겠지?”

무슨 수로 살아있어? 허면 쟤들이 저렇게 드나들겠어?”

하긴? 죽어도 벌써 죽었겠지. 저것들이 그곳을 놀이터처럼 드나들 수도 없을 테고. 한데 놈의 머리가 어디까지야? 인간 맞아? 아무리 생각해도 끝을 모르겠어.”

소훈이 혀를 끌끌 찬다.

이게 끝이야. 놈이 죽었는데 나올 게 뭐가 있겠어?”

허긴? 니 말이 맞다. 머리가 아무리 뛰어나면 뭐해? 한 줌 흙으로 스러질 텐데. 되게 억울했겠네. 꿈도 날아가고, 혼도 저승이 거둬가고.”

그게 인생이지. 안 그래?”

소훈이 피식 웃는다. 애니 말이 백 번 옳다. 꽉꽉 채워지는 인생은 없다.

애니민들을 어떻게 할 거야?”

손아귀에 넣어야지. 그 전에 권한부터 되돌리고. 그때까진 실컷 놀아나게 놔두자고.”

애니가 간만에 인심을 팍 쓴다. 소훈도 애니민들이 손아귀에 들어온 것처럼 흐뭇하다.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다. 애니 말을 들어서 나쁠 것도 없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면 애니는 단연 나는 놈이다. 그와 손을 잡은 것은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다. 간혹 속을 긁어대기는 해도 손에 들어올 걸 생각하면 참아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