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의 공격을 잘 막아내더구나. 거들고 싶었지만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면 일이 틀어질 거 같아서 지켜보기만 했어. 그래도 마음은 니가 먼저 지치면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했다.”
그가 들어서자 이균이 말한다.
“알아요, 아저씨. 괜찮아요. 짬을 낼 수가 없었어. 늦게 와서 미안해.”
“아냐. 우리도 봤어. 아슬아슬해 죽는 줄 알았어.”
“맞아, 나도.”
“나도.”
누리가 말을 트자 줄줄이 같은 말을 하며 다가온다.
“그렇게 힘들게 맞서고 있었을 줄 몰랐어. 미안하다. 우리 생각만 해서.”
이든은 미안함에 쑥스러워진다. 부끄럽기도 하다.
“뭘?”
뫼가 쑥스러움을 털어내려 흐흐 웃는다. 웃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우리 갈게요.”
“애니가 다시 공격해올 거야. 한눈 팔지 말고. 허를 찌르는 게 승리의 지름길이야.”
“예. 다시 올게요.”
“그래.”
이균이 머뭇거리지 말고 가라고 손짓한다. 뫼가 고개를 돌린다. 회오리가 덮치더니 금세 가상공간의 만 년으로 데려간다.
“뫼, 빨리 와! 놈이 다시 움직이고 있어.”
뫼가 얼른 뛰어가 마우스를 손에 잡는다.
“어림없어.”
마음이 가벼우니 용기도 배로 솟아난다. 다시 밀고 밀리는 싸움으로 가상공간의 만 년이 뜨겁게 달궈진다. 애니민들이 뫼 주위에 빙 둘러서서 지켜본다. 애니가 빠져나가고 나서야 뫼가 겨우 숨을 돌린다.
“아, 이 공기.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거 같아.”
“갇혀있느라 고생했지?”
들이 누리의 말에 미안한 기색을 드러낸다.
“그리웠어, 이곳이. 이틀인데 왜 7987년처럼 길게 느껴지던지.”
“누리, 너도 그랬어? 나도 그러던데.”
“니들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그랬어.”
“이상하다. 나도 그랬는데? 니들 뫼와 들에게 미안해서 그냥 하는 말은 아니지?”
이든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누리와 버들, 아미의 말에 딴지를 걸어 본다.
“그냥은? 정말 그랬어.”
누리가 정색을 한다. 버들과 아미도 마찬가지다.
들은 무슨 말인가 하고 되새김한다. 하지만 뭔 말인지 뜻을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지쳐있는 뫼 생각에 오래 담지도 못한다.
“눈 좀 붙여. 내가 보고 있을게.”
“내가 보고 있을게. 둘 다 눈 좀 붙여.”
웬 일로 누리가 나선다. 들은 누리를 낯설게 쳐다본다.
“니들 둘 다 이틀 넘게 못 잤잖아.”
들의 시선을 무시하지 못한다. 궁색하지만 그 말밖에 할 말이 없다. 또 다시 미안하다는 말은 꺼낼 수가 없다.
들이 삐죽 웃는다. 가슴에 얹혀있던 돌덩이를 내려놓은 느낌이다.
“누리 말대로 눈 좀 붙여볼까?”
들이 뫼에게 눈을 붙이자고 말한다. 뫼가 알아듣고 침대로 간다.
누리는 딱 버티고 앉아서 빨려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화면을 바라본다. 애니가 나타나면 몸으로 쳐낼 기세다.
“애니, 그 놈. 나타나기만 해봐!”
몸뿐만 아니라 말로도 벼른다.
“덩치가 산만 하더라. 니가 무슨 수로? 그냥 뫼에게 맡겨.”
버들이 초를 친다.
“산만 하긴? 내 손아귀에 딱 들어오겠더만.”
누리가 버들 앞으로 손을 쑥 내민다.
“그러다 놈이 치고 들어오면 어쩌려고? 한눈 팔지 말라던 아저씨 말 기억 안 나? 화면이나 잘 봐!”
아미가 쉰 소리 그만 하라고 눈치를 준다.
“애니 그 놈, 눈빛이 이글거리더라. 절대 포기할 놈이 아니야. 뫼가 말할 땐 그런가보다 했는데 얼굴을 보니까 그 말이 딱 와 닿더라.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
이든도 애니를 떠올리며 누리의 방방 뜨는 기운을 억누른다. 애니의 눈초리가 매섭게 노려보는 듯하다.
애니는 에너지음료 세 병을 거푸 쏟아 붙는다. 잠을 쫓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빈틈을 노리려면 깨어있어야 한다.
네 번째 아이콘이 눈앞을 어른거린다. 궁금함을 넘어 독기가 오른다. 컴퓨터 속으로 잠수해 들어간다. 잽싸게 다가와야 할 뫼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선가 노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해서 두리번거린다. 멈칫거리며 쉬 다가가지 못한다.
빈틈을 노려야 한다. 그러려면 조심할 수밖에 없다. 움직이지 않을 때일수록 조심은 필수다. 몇 번 읽어본 삼국지를 떠올린다. 설쳐대서 이긴 싸움은 거의 없다. 괜히 나대서 빈틈을 보일 필요는 없다. 눈에 띄지 않게 주변만 맴맴 돈다. 이상하다. 뫼가 너무 잠잠하다. 잠시 빠져나온다.
신경이 곤두선다. 눈이 빡빡하다. 네 번째 아이콘이 어른거린다. 다시 냉장고로 가서 에너지음료를 꺼내온다. 벌컥벌컥 마신다. 금방 캔이 빈다. 혀가 허전하다. 또 하나를 가져온다.
‘네 번째 아이콘. 그것만 열면 되는데. 그럼 놈들은 확실히 내 손안에 들어오는데.’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눈동자를 마구 굴린다. 소용이 없다. 다시 마우스를 손에 쥔다. 손이 떨린다. 커서를 원하는 자리에 가져갈 수가 없다. 제멋대로 움직인다.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다. 힘겹게 가져다 놓아도 누르기 전에 다른 곳에 가 있다.
“이러다 너 몸 망가지겠다.”
소훈이 애니의 주변에 널려있는 빈 캔들을 본다.
“좀 자둬! 뫼도 자고 있더라.”
그 말에 애니의 귀가 쫑긋 선다.
“언제부터?”
“몇 시간 됐어.”
“자식! 한데 왜 지금에야 말을 하는데?”
애니가 고함을 지른다. 흘러간 시간이 너무 아깝다. 조심하느라 그냥 빠져나온 게 참을 수가 없다. 만회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난다. 다시 뫼의 컴퓨터 속으로 들어간다. 네 번째 아이콘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얼른 커서를 움직인다. 네 번째 아이콘에 커서를 옮겨놓는다. 마우스 단추를 힘껏 누른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뚫어지게 쳐다본다. 한데 반응이 없다. 철문이 단단하게 막고 있다.
“이 새끼!”
이를 부르르 떤다. 노려보지만 눈동자만 흔들릴 뿐이다. 네 번째 아이콘이 몸을 흔들어대며 웃는다. 귀청이 따갑다. 그냥 주저앉는다.
얼마를 잤는지 알 수가 없다. 눈만 감았다 뜬 느낌이다.
“의사가 좀 쉬래. 에너지 음료는 이제 멀리하래. 잠이 부족한 상태에서 에너지 음료를 너무 많이 마셨다더라.”
“그게 다야?”
“왜 더 듣고 싶어?”
“교감신경을 너무 자극한 탓에 니 몸의 균형이 많이 깨졌다더라. 그냥 두면 찾아오는 건 병밖에 없을 거라고 하더라.”
“한심한 소리 그만 집어치워! 시간 싸움이라는 거 몰라? 한데 여기서 멈추라고? 네 번째 아이콘만 열면 돼!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걸 열어야 돼!”
애니가 결기를 드러낸다. 일어나 컴퓨터로 간다. 소훈은 말리지도, 그렇다고 부추기지도 못하고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 그러다 애니의 생각에 맡기기로 한다.
애니는 다시 아이콘을 마주하고 앉는다. 뫼가 철통같이 주변을 맴돌며 틈을 내주지 않는다. 다가가려 애를 써보지만 번번이 밀려난다. 점점 신경이 곤두선다.
“너 때문이잖아. 니가 제때 알려만 줬어도 벌써 열었을 거 아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 있는 거 맞아?”
소훈한테 짜증을 낸다. 소훈은 눈살을 찌푸린다. 받아치고 싶은 걸 꾹 참는다.
애니는 여전히 못마땅한지 혼자 쭝얼쭝얼한다.
“그러지 말고 자! 신경이 잔뜩 곤두서가지고 되는 게 있겠냐? 가상공간을 휘젓고 다니지 못하도록 폐쇄했다며? 잔다고 해서 뫼가 무슨 일 벌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조바심을 내? 칼은 니 손에 쥐어져 있어. 한데 칼을 쥐고도 왜 그렇게 허둥대는데? 니가 자면 뫼도 잘 거야. 자기 구역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어서 할 것도 없는데 괜히 깨어있겠냐?”
‘내가 자면 뫼도 잘 거라고? 맞아. 그거야. 지금은 일단 자자.’
애니는 시계의 알람을 맞춘다. 그런 다음 소파에 웅크리고 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