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리고 한참 지나서 뫼가 일어난다. 그는 하품을 해대며 컴퓨터로 간다. 얼마 후 누리가 건너온다.
“한 번 더 나가보고 싶어.”
뫼가 누리를 올려다본다. 눈빛이 간절하다.
“우리 둘만?”
“둘이서는 안 돼?”
뫼가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누리는 뫼에게 숨기지 말라고 다그쳤던 것을 떠올린다.
“애들 깨우자! 다들 가고 싶어 하는 거 같더라.”
뫼는 선뜻 대답을 못한다. 누리는 뫼의 눈치만 본다.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아미가 들어선다.
“문이 열려 있어서.”
아미가 궁색하게 둘러댄다.
“방법 좀 찾을까 하고.”
뫼가 짧게 말하고 입을 다문다. 누리가 그런 뫼를 밀어붙이듯 내려다본다.
“잠이 안 와! 눈이 너무 말똥말똥해. 머릿속도 복잡하고.”
늘어진 말투로 아미가 말을 잇는다.
“봐! 다들 이렇다고. 버들과 이든도 누워서 눈동자만 굴리고 있을 거야.”
누리가 아미의 말을 받아 보챈다.
“알았어.”
누리가 나서서 나머지 셋을 부른다. 들이 헐레벌떡 뛰어온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돼! 애니에게 들키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말아.”
“잠자고 있을 텐데 무슨 수로?”
“몰라? 잠을 자고 있어도 웹캠과 CCTV는 24시간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들이 웹캠과 CCTV를 일깨운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진다. 애니의 눈만 생각했다.
“가자!”
뫼가 엉겁결에 마우스를 누른다. 이균은 잠을 자러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애니가 알아챘으면 어쩌지?”
이든이 불안한 눈빛을 하고 모두를 둘러본다. 다들 이든과 같은 걱정을 하고 있다.
“그 생각은 이제 버려!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주워 담을 수 없다고. 그럴 바엔 다른 걸 걱정하는 게 나아. 더 다급한 게 있어.”
들이 빠르게 말을 쏟아낸다. 마음이 급한 모양이다.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거?”
뫼가 힘없이 말을 받는다.
“맞아. 다들 마음이 흔들리고 있어. 하지만 이건 아니야. 누워서 하루 종일 생각해 봤어. 아무리 생각해도 우린 2013년에 섞여 들 수가 없어. 우린 달라. 여기 와서 아저씨랑 아줌마를 보는 순간 깨달았어. 함께 섞여 살 수 없을 거라는 거. 아줌마야 우릴 감싸고 안아주겠지. 하지만 2013년의 현실에서는 다른 걸 인정하지 않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 우리가 보기에는 다들 비슷비슷한데도 말이야. 생각이 달라도 금을 긋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라고. 한데 우린 달라도 너무 달라. 애니처럼 시험대상으로 여기거나 돈뭉치로 알고 달려들 사람이 많을 거야. 그렇다고 법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그러니 2013년에 미련을 갖는 것은 위험해. 나가 살겠다는 생각도 버려야 해. 그래야 그나마 생명체로 살아갈 수가 있어.”
들이 안 되는 이유를 죽 설명한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을 점령한 2013년은 빠져나가지 않는다.
“그래도 난 한 번 겪어 보고 싶어. 나가 보고 싶다고. 애니민이면 어때? 여긴 너무 단조로워. 여섯이 똘똘 뭉쳐서 사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게 다야.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어. 부딪히고 깨지더라도 난 넓은 세상에 나가서 살아보고 싶어. 화면만 들여다보면서 구경꾼으로 살 수는 없잖아.”
누리가 들의 생각에 정면으로 맞선다.
“나도 누리 생각과 같아. 여긴 가봤자 숲이 다야. 애니라는 놈과 맞서느라 지금이야 단조롭다는 생각도 없이 살고 있지만 맞서는 게 끝난다면? 그때 찾아오는 단조로움을 어떻게 견딜 건데? 우린 바로 지겨움에 빠져들 거야. 지금도 애니 놈 생각만 떼어내면 그 날이 그 날이야. 우리가 하는 건 빤하다고. 난 그렇게 사는 건 아니라고 봐. 드라마 속 사람들이 하듯이 나도 한순간일지언정 그런 것들을 해보며 살고 싶어. 거긴 내가 하고 싶은 게 수두룩하더라. 나도 그 애들이 하는 것을 해보며 살아보고 싶다고?”
아미는 한술 더 뜬다. 뫼는 뭐라 대꾸를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들은 그냥 받아넘길 수가 없다.
“나도 여기보단 거기가 맘에 들어. 멋지고 화려하고, 할 것도 많고. 하지만 그림의 떡일 뿐이야. 그렇게 살 거라는 보장도 없어. 어쩜 우린 늘 우릴 손에 넣으려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 아줌마 같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내 생각엔 거의 없어.”
들이 아미의 생각을 밀어낸다. 들은 아미가 생각을 돌려주기를 바란다.
“겪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는 건 섣부른 편견일 뿐이야.”
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미를 바라본다. 아미의 생각이 너무 확고해서 더는 밀어내기가 힘들다.
뫼는 들과 아미가 주고받는 말을 곰곰 되새긴다. 들도 아미도 틀린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들의 말이 더 와 닿는다. 선택을 해야 한다면 자신은 들 편이다. 들과 헤어져야 한다면 그건 너무 슬프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쏟아질 거 같다. 아무도 없는 만 년이라 했을 때가 떠오른다. 막막했다. 혼자라는 게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들을 만났다. 막막함이 절반으로 뚝 잘려나갔다. 이든과 누리, 버들, 아미를 만나 어울리면서는 그게 싹 가셨다. 아니 그 안에서 서서히 빠져나왔다. 그리곤 닥쳐오는 일들과 맞서기에 바빴다. 다른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드라마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누리나 아미처럼 말할 게 없다. 그래도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다.
“나도 2013년으로 가는 건 사자가 우글거리는 숲에 알몸으로 던져지는 거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해. 솔직히 나도 이곳이 맘에 들지는 않아. 내가 머물 곳이라는 생각도 다가오지 않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가상세계라는 걸 아는 순간 눈물이 핑 돌더라. 내가 진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가 없었어.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부터 먹먹해져.”
말을 하고 뫼가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우린 진짜 사람이야. 사람의 유전자정보도 가지고 있다고?”
누리가 거세게 항의한다.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바람이야. 일반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어. 우리와 같은 겉모습을 가진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없어. 우린 입체적으로 그린 그림에 실험실에서 배양한 세포를 가지고 만들어 냈어.”
뫼가 누리의 말을 밀쳐내려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난 겁이 나. 입체적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게. 한눈에 봐도 알아볼 수 있을 거 아냐. 아무도 우릴 상대해 주지 않으면? 우릴 돈벌이 대상으로 여기고 달려들면?”
뫼의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눈빛이 이리저리 헤맨다.
“그래서 겁이 나는 거야?”
아미가 조롱 섞인 투로 말한다.
“니들은 아니야?”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할 자신은 없어. 그래도 2013년이라면 덤벼보고 싶어. 드라마에서 본 세상을 직접 살아낼 수 있다면 난 백 번을 물어도 달라지지 않을 거야.”
누리가 말한다. 누리는 2013년이 모두 제 것인 양 말한다. 그곳에 가서 주어지는 것들 중 골라 가지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뫼는 아니다. 그곳에는 자신들이 골라가질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생각한다. 치열하게 싸우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그럴 기회조차 가질 수도 없을 게 빤하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뭘 망설이는 거야? 난 생각만 해도 신나는데. 여기에 없는 것들을 실컷 보고 느낄 수 있다는데 그거면 되지 않아?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도 실컷 타보고, 근사한 음식점에 앉아서 분위기 잡고 칼질도 해보고 싶고, 북적이는 곳에 가서 게걸스럽게 입에 쓸어 담고도 싶고.”
누리가 잔뜩 들떠서 말한다.
“아줌마가 했던 말 생각 안 나? 그게 다 돈이 있어야 한다잖아. 돈이 있어야. 그곳에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다잖아. 하지만 돈이 없어서 그렇게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하잖아. 니가 생각하는 삶은 돈이 없으면 그곳 사람들도 살아낼 수 없는 삶이야. 삶이란 고비를 넘기며 사는 것만이 삶은 아니야. 먹고 자고 입고 싸고 한다고 해서 그게 다 삶은 아니야. 갖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먹고 싶은 것을 포기하는 것도 삶의 한 부분이야. 원하는 것을 위해 고통을 참는 것도 삶이고. 욕심을 다스리는 것도 삶이야. 아줌마의 말에서 내가 얻은 건 바로 그거야. 한데 우린 그 돈을 손에 넣기도 전에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고 말 거야.”
뫼가 다시 누리의 말을 받아친다.
“그건 뫼 말이 맞아. 한데 지금은 그런 걸로 옥신각신할 때가 아니야.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게 먼저야. 놈은 우릴 손아귀에 넣기 위해 혈안이 돼 있어. 그런데 우리가 현실로 나가면? 그거야말로 놈들에게 다시없는 기회 아니야?”
들이 모두에게 자신들의 현실을 일깨운다. 거기에는 누리도 아미도 토를 달지 못한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날이 밝아오고 있어.”
누리와 아미는 미적거린다. 돌아가기 싫은 눈치다. 버들과 이든은 이쪽저쪽 옮겨가며 눈치를 살핀다.
“여기 남는 건 들 말대로 위험해. 가자!”
이든이 누리를, 버들은 아미를 잡아 끈다.
뫼가 마우스를 누른다. 통로가 열리면서 회오리가 인다. 그 속으로 모두가 빨려들어간다.
돌아오자마자 누리는 말 한마디 없이 제 집으로 돌아간다. 못마땅한 눈빛이 가득하다. 뫼와 들의 시선이 안타깝게 뒤를 따르다 멈춘다. 이든이 누리를 쫓아간다. 버들과 아미도 가버린다. 들과 뫼만 남겨진다.
“이건 우리끼리 해결해야 하는 문제지? 처음인 거 같아. 우리만의 문제에 부닥친 게.”
들이 시무룩하게 말한다.
“헛된 꿈이라고 그냥 몰아붙일 수도 없어. 그러기에는 너무 달콤하거든. 여기와는 비교가 안 되잖아. 갈 수 없는 세상이라고 여겼을 때는 참고 견딜 수 있었어. 아무리 꿈을 꿔도 이루어지지 않을 세계였기에. 하지만 맘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세상이 되면서 더는 참을 수가 없는 거야.”
뫼가 들을 지그시 바라본다. 들의 표정도 시무룩하다.
“애니 그 놈이 모르고 지나가야 할 텐데.”
들은 애니를 떠올린다. 애니가 알면 또 다른 일에 휘말릴 수 있다. 해결하지 못한 일이 산더미다. 거기다 또 다른 일이 겹치면 지레 주저앉을지도 모른다. 버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