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어.”
애니가 눈살을 찌푸린다.
“됐다고? 애니민들이 화면에 잡혀.”
애니가 벌떡 일어난다. 달려가서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뫼의 얼굴이 화면의 ⅓을 채우고 있다. 들도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흐, 흐, 흐, 으하하하······.”
토막웃음이 자지러지는 웃음이 된다.
“내가 뭐랬어? 해낼 거라 했잖아?”
목소리가 다시 이전으로 돌아와 있다.
“홈피에 다시 올리자! 이젠 끝났어. 내가 이겼어. 남은 건 뫼에게 부여한 권한을 제거하는 것뿐이야. 그것만 제거하면 뫼도 삭도에 머리카락을 잘린 삼손이나 다를 바가 없어. 두려울 게 없는 존재가 되고 말거야. 그렇게 되면 으하하하하, 애니민들의 운명은 영원히 이 두 손 안에 있게 될 거야.”
애니가 제 기분에 취해간다. 펼친 두 손을 들어 내려다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특하다.
소훈은 애니민의 자료를 홈피에 올린다. 오랜만에 게시판에도 들어가 본다. 와글와글하던 게시판은 뜸하게 글이 올라오고 있다. 골수들의 글이다. 그들은 아직도 홈페이지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돈 덩어리가 굴러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애니는 뫼에게 부여한 권한을 되돌릴 생각으로 가득하다. 일단 뫼의 움직이는 반경을 좁힌다. 뫼는 가상세계 속 캐릭터다. 가상세계의 작은 구역에 살고 있는 캐릭터가 다른 구역을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드는 것을 놔둘 수는 없다.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해결이 된다. 하지만 그 걸로는 완벽하지 않다. 뫼의 머리를 통제하지 않는 한 언제든 뚫릴 수가 있다.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을 따라간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듬밖에 없다. 단순한 애니민이라면 권한을 부여했다 되돌리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하지만 애니민들은 인간의 세포를 떼어내 복제한 생명체다. 감정을 가지고 있고, 생각을 할 수 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들도 할 수 있다. 그게 문제다. 사력을 다해 밀어낸다면 그들의 몸속을 건드릴 수가 없다. 그런 애니민들이 고분고분 받아들일 리가 없다. 한듬을 움직이게 해야 한다. 그를 옭아맨 오랏줄을 잘라내야 한다. 다시 머리가 지끈거린다. 마지막 고지가 여전히 희망이 있으니 일어나서 올라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뫼. 기다려! 니가 오기 싫다면 내가 가줄게. 멋지게 널 내 손에 넣어줄게.’
자리에서 일어나 소훈이 사다 놓은 음식을 먹는다. 먹어야 힘이 난다. 생각도 돌아간다. 손이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생각은 생각대로 굴러간다. 뫼가 머릿속에서 구른다. 녀석은 아프다는 소리도 없이 잘도 구른다.
뫼는 생각이 복잡하다. 방어막이 뚫렸다. 다들 뫼만 바라보고 있다. 너만 믿어 하는 눈길들을 보내고 있다. 가만히 있으면 모두가 불안해한다.
가상세계로 몸을 들이민다. 뭔가가 밀어낸다. 다시 들이밀어 보지만 마찬가지다. 가상세계가 문을 닫고는 열어주지 않는다. 애니의 짓이다. 때맞춰 애니의 웃음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려온다. 모두의 신경이 곤두선다.
“놈이야. 철저히 막아 놓은 방어막을 뚫었어.”
“또 원점으로 되돌아온 거네?”
아미가 씁쓸하게 말한다. 다행이 훌쩍거리지는 않는다.
“뚫었으면 막으면 돼. 놈도 막힌 걸 뚫었잖아. 가상세계로 나가봐야겠어.”
다시 가상세계로 몸을 들이민다. 한데 몸이 빨려들어가지 않는다. 다른 곳으로 방향을 바꿔보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왜?”
들이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묻는다.
“놈이 가상세계로 나갈 수 있는 내 안의 연결 장치에 손을 댔어.”
“그럼 어떻게 해. 꼼짝없이 이 안에 갇히는 거야?”
“내 안의 기능을 모두 써야 할 거 같아. 그럼 가상세계로 나갈 수 있는 문을 뚫을 수 있을지 몰라.”
“그건 니가 너무 위험해.”
들이 만류한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그럼 나뿐이 아니라 니들도 위험해.”
뫼가 벼른 듯이 말한다.
“며칠만 더 알아보고. 그런 다음에.”
들이 뫼를 말린다.
“뭔데? 왜 니들끼리만 아는 말을 하는 건데?”
누리가 까칠하게 치고 들어온다. 뫼와 들이 서로 눈치를 본다.
“다시는 숨기지 않기로 했잖아. 그랬으면 숨기지 말아야지? 도대체 뭐야?”
이든과 버들, 아미가 누리 옆으로 다가온다.
“말도 안 돼. 우린 니들을 믿었어. 한데 왜 번번이 니들만 알고 있는 것을 우리한테 말하지 않는 건데?”
아미가 앙칼지게 따진다. 아미가 따지고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다. 뫼와 들이 당황한다.
“아냐?”
“아니긴?”
“들 말이 맞아. 이건 오해야. 애초에 난 들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들이 옆에 있다가 눈치를 챘던 거뿐이야. 눈치를 채고 말리는 바람에 내가 일단 접었던 거였어. 내가 가상세계를 다녀올 때마다 일일이 니들에게 털어놓지는 않았잖아. 그것과 비슷한 거야. 따지려면 나한테 따져. 들을 싸잡아 말하지 마!”
“뫼, 니가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것은 우리도 알아. 그게 뭔지 모를 뿐이지. 한데 들이 알았다면 우리도 알아야 하는 거 아냐? 눈치를 챘든, 아니면 니가 말을 했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말이야. 언제나 니들한테 우린 뭐야? 허수아비? 아님, 한없이 지켜줘야 하는 골치덩어리?”
이든이 열을 내며 말한다.
“이든, 그게 아니라는 거 잘 알면서 너까지 왜 그래?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냐? 백 번? 아님 천 번? 말만 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까. 대신 지금 생각들은 버려! 우린 모두 같은 운명이야. 놈들이 내게 권한을 좀 많이 부여해서 어쩌다 내가 앞장서고 있을 뿐이야. 그게 다야. 그리고 그 권한은 어디가 끝인지 나도 다 몰라.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마주 서서 옥신각신할 때가 아니야. 놈은 우리 방어벽을 뚫었어. 가상세계를 드나들 수 있는 권한도 막아버렸어. 그래서 놈이 내게 부여한 권한을 한꺼번에 써보겠다고 말했을 뿐이야. 그 파장을 알 수 없어서 들이 말리고 있었던 것일 뿐이고.”
뫼가 답답함을 토로한다. 안을 죄 꺼내서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 한이다.
“그럼 니 생각대로 해! 들한테 허락받지 말고 니 생각대로 밀고 나가라고. 아님 우리한테도 물어서 허락을 구하던가. 그게 같은 운명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도리 아니야?”
아미가 물러서지 않고 따진다. 뫼가 고개를 숙인다. 아미 말이 틀리지 않다. 자신의 잘못이다.
들은 아미를 쏘아본다. 별것도 아닌 것에 열을 올리는 아미를 이해할 수가 없다.
“뫼를 몰아세우지 마!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운 뫼야. 뫼를 몰아세우지 말라고.”
“아냐. 내 잘못이야. 아미 말이 맞아. 내가 마음이 급하다보니 넓게 생각하지 못했어. 들, 니가 말렸던 것만 생각했어. 그 생각에 매어 모두를 생각하지 못했어. 미안하다.”
뫼는 진심으로 미안하다. 혀끝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다. 여섯이다. 같은 운명을 살아내고 있다.
누리와 이든, 아미와 버들이 뫼의 말에 할 말을 잃는다. 대꾸할 말이 없다. 미안한 건 오히려 자신들이다. 좀 더 믿었어야 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모르겠다. 우린 니들 둘이 또 뭔가 대단한 것을 숨기고 있는 줄 알았지?”
누리가 손을 든다. 한데 멋쩍다. 그렇다고 미적거리고 있을 수가 없다. 눈치를 보며 어물거리다 제 방식대로 밀어낸다.
“들 말대로 며칠만 더 알아보자! 들의 느낌대로 좀, 아니 많이 찝찝하다면 얼마 늦춘다고 해서 나쁠 건 없어.”
이든도 괜히 휩쓸려 나섰던 게 멋쩍다. 미안하다.
“우리가, 면역력이 생겨서 더는 찔찔 짜거나 주저앉거나 하지는 않지만, 여러 번 겪다보니 아무래도 신경이 날카로워진 거 같아. 급하다고 서두르지만 말고 한 발씩만 늦추자! 이러다간 그동안 쌓아온 모든 걸 한꺼번에 잃겠어.”
들이 서운함을 털고 차분히 말한다. 뿔뿔이 흩어지면 놈만 좋을 일이다. 아무리 권한이 많은 뫼라 해도 힘을 잃는다. 그땐 싸우나 마나다.
“알았어. 앞으론 내 생각대로 밀고 나가지 않을게. 다들 며칠 더 알아보자고 하니 나도 따를게. 고맙다.”
“고맙긴? 맨날 지가 앞에서 다 받아내고 쳐내고 하고 있으면서.”
누리가 싱거운 음식에 간을 치듯 말한다. 뫼가 피식 웃는다. 절박한 순간에도 웃음이 나온다는 게 신기하다. 함께 있어서 가능하다. 혼자라면 절대 불가능할 일이다.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게 삶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