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듬의 질러대는 소리에 이균이 움찔한다.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일어나 벽으로 달려가지만 벽은 꿈쩍도 않는다. 당했다는 생각에 치를 떤다.
‘죽일 놈. 중간에서 채갔으면 됐지, 문은 왜 잠가? 내가 더는 쓸모가 없다 이것이지? 여기서 굶어죽어라 이 뜻이야?’
이를 갈아보지만 단단한 벽은 움직이지 않는다. 꼼짝없이 갇혀버렸다. 하늘이 두 쪽이 나지 않는 한 빠져나갈 수가 없다.
‘차라리 잘 됐어. 뫼가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걸? 10번을 속성 복제했어도 내 분신인데. 내 두뇌가 어디 가겠어? 그뿐야? 신 버금가는 권한을 지녔는데.’
배가 고프다. 뒤지려 해도 뒤질 게 없다. 사방이 벽이다. 40년 넘게 산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눈물이 시큰 눈가를 적신다. 문 하나 뚫려 있지 않는 벽에 갇혀서 굶어죽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뫼가 서서히 걸어온다. 애니가 이어서 다가온다.
‘죽일 놈.’
손만 허우적거린다.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바깥으로 나가는 연결망이 모두 끊겼다. 가상공간의 애니민들 쪽으로만 길이 뚫려 있다. 하지만 스스로는 갈 수가 없다. 죽일 놈 소리만 입에 담는다. 아무리 그 말을 쏟아내도 분풀이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 소리밖에 쏟아낼 게 없다.
애니는 고소하다. 낚아챈 것도 고소하고, 이균을 벽속에 가둬버린 것도 고소하다.
‘미련한 놈. 내 실력을 우습게 봤다 이거지? 마지막에 웃는 게 진짜 웃음이라는 걸 몰라? 미련한 놈. 그 안에서 이를 갈아보시지? 도와줄 사람도 없을 텐데.’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진다. 소훈일 거라 생각한다. 기뻐 혼자 날뛰다가 뒤늦게 생각나서 달려오는 모양이라 생각한다. 돌아보지도 않고 얼굴 가득 미소를 짓는다.
“한듬의 움직임이 잡히지 않아.”
소훈이 다가와 다급하게 말한다. 애니의 상상은 한 방에 날아간다.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진다. 고개가 휙 돌아간다. 눈알이 튀어나올 거 같다.
“뭔 소리야? 애니민들은? 지금쯤 얼굴이 사색이 돼 있는 거 아니야?”
대답을 들을 겨를도 없다. 컴퓨터로 달려간다.
“도청망만 겨우 살아있어. 뫼일 거야. 가상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나머질 모두 차단한 모양이야.”
소훈이 애니 뒤를 따라가면서 말한다. 애니가 해야 할 말을 소훈이 해대고 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주워들은 것들을 머뭇거림 없이 쏟아낸다. 애니 귀에는 그 말이 들려오지도 않는다.
마우스를 마구 굴린다. 소훈 말대로 아무리 건드려도 반응이 없다. 먹통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수는 없어. 이균 그 놈이야.”
애니의 눈에서 이균이 지글지글 탄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얼뜨기를 만들어 보냈어. 이렇게 우리 뒤통수를 치겠다고? 어림도 없어. 그렇게 되도록 놔둘 수는 없지.”
“이균이 아니야.”
소훈이 옆에서 애니을 일깨운다.
“뫼야. 뫼가 그랬어.”
소훈이 박박 우긴다.
“한듬이 제 기능을 못하잖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잖아.”
애니가 고함을 지른다.
“그런 건 아니야. 잠시지만 연결망을 모두 뚫었었으니까. 복사해서 보낸 자료도 받았으니까. 한듬이 움직이지 않아서야. 애니민들이 한듬을 가뒀어. 그렇지 않으면 이럴 리가 없어.”
소훈이 애니의 흥분을 가라앉힌다. 날뛰어 봐야 올가미에 얽혀 들 뿐이다. 빠져나올 궁리를 해야 한다. 기대가 컸던 탓인지 애니가 평상심을 잃고 있다. 그 바람에 소훈이 차분해진다.
“그 놈이 벌써 한듬을 꿰뚫었어. 우리 생각을 꿰뚫었어. 그 놈을 얕본 것도 아닌데 넘어설 수가 없어. 번번이 놈이 나를 올라서고 있어.”
“그러게 뭐 하러 그렇게 많은 권한을 놈에게 줬는데? 이럴 줄 몰랐어?”
소훈이 언성을 높인다. 목소리에 짜증이 잔뜩 묻어있다. 애니에 대한 원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니가 돈을 투자했어? 아니면, 애니민 제작에 참여를 했어? 곁다리로 붙어서 거저 얻어먹었잖아? 그러면서 무슨 할 말이 있는데?”
소훈의 말이 거슬린다. 격하게 쏘아붙인다. 소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지 돌아서서 밖으로 휭하니 나간다.
“지 놈이 어디 가서 호사를 누리겠다고? 갈 테면 가! 나도 붙들 생각 없으니까”
혼자 중얼거린다. 거기에 매달리고 있을 시간도 없다. 오직 애니민 생각밖에 머릿속에 없다.
컴퓨터로 달려가 이것저것 건드려본다. 덩치 큰 괴물이 다가오는 그림이 눈앞을 어른거린다. 뫼가 머리만 내놓고 으하하하 웃는다. 악이 받친다.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운다. 눈이 뻑뻑하다. 머리도 지끈거린다. 그래도 컴퓨터 앞을 떠나지 못한다. 복사해 놓은 게 아직 남아 있다. 연결망만 뚫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
소훈이 며칠 만에 돌아온다. 어디를 쏴 다닌 거 같지는 않다. 말끔하다. 왜 왔냐고 탓을 하지 않는다.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
“해결 됐어?”
소훈도 미안한 모양이다.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간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그리 생각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갈 데도 없었다. 바람 쐬고 왔다 생각한다. 곁다리라는 말에 울컥해서 나섰지만 애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정곡을 찔린 자존심이 그 순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다.
지금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다. 애니가 아니었다면 그만한 돈다발을 만져보기나 했겠는가? 또 만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져볼 수나 있었겠는가? 백 번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불가능하다. 다행이 애니가 몰아세우지 않는다.
“맨 손으로 달랑달랑 온 거야?”
애니가 살갑게 군다. 소훈을 보자 그의 마음이 풀린다. 머릿속이 차분해진다.
소훈이 먹을 걸 애니 앞으로 밀어준다. 애니가 걸신들린 사람처럼 피자를 입으로 구겨 넣는다.
“한 끼도 안 먹고 굶었냐?”
보다 못한 소훈이 한마디 던진다. 그러고 보니 그런 거 같다. 식욕이 마구 당긴다. 피자 한 판을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치운다. 속이 그득 차오니 조여오던 머리가 말끔해진다. 머릿속이 차분하게 정리가 된다. 생각의 실타래가 풀릴 것도 같다.
“나 좀 잘게.”
더는 버틸 수가 없다. 소파로 가서 몸을 웅크린다. 이내 눈이 감긴다.
소훈은 애니가 작업한 컴퓨터 앞에 앉아 이것저것 열어본다. 하지만 애니처럼 거침없이 건드리지는 못한다. 건드렸다 잘못 될까 겁이 난다. 그 다음에 닥쳐올 일도 겪기 싫다.
애니는 소파에 누운 채로 달콤함에 빠져든다. 가끔 소훈이 다가가서 애니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피도 눈물도 없을 거 같은 녀석이 잠귀신 앞에서는 고분고분하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내버려 두기로 한다.
다시 컴퓨터 앞으로 간다. 애니의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게 벌써 몇 번째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갸우뚱거린다.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하다. 마우스를 클릭한다. 갑자기 화면이 환해진다. 애니민들이 화면을 걸어 다니고 있다.
“됐어.”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온다.
“자식, 싹 다 해결해 놓고 퍼지긴? 잠시 눈이 멀었던 거야? 잠시 눈뜬 봉사였던 거야?”
역시 애니다. 그가 손을 대서 해내지 못한 게 없다. 애니에게 다가가 흔들어 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