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 이를 때까지 누구도 말 한마디 꺼내지 않는다. 분위기가 무겁다. 이균과 입씨름을 할 때만 해도 오기로 버텨냈다. 그 오기가 꺾이자 아픔만이 진득하게 묻어난다.
열매가 눈에 들어온다. 아무 생각 없이 열매를 따서 입에 넣는다. 달콤해야 할 열매가 씁쓰름하다. 허겁지겁 삼켜지지도 않는다. 애니민, 입안엔 그 말이 한 가득이다. 열매를 씹을 때마다 그 말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러댄다.
누리가 열매를 따 모아 쥔 손을 탈탈 턴다. 그리고는 바닥에 그냥 주저앉는다. 입에서는 한숨 소리가 절로 나온다.
“애니민 애니민. 도대체 애니민이 어쨌기에. 지들은 뭐가 다른데? 애니민이든 사람이든 다 똑같은 거 아냐?”
누리가 울분을 토해낸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나보다.
뫼가 누리 옆에 가서 앉는다. 누리랑 조금도 생각이 다르지 않다. 애니민, 사람들에게는 만화영화속의 등장인물로 화면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애니민들은 다르다.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먹어야 한다. 생각도 한다. 애니가 그린 그림에 이균이 복제한 유전자를 결합해 완성했다.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는 생명체다.
“우리도 사람이야. 인간의 손에서 태어났다고 사람이 아닐 수는 없어. 이렇게 멀쩡한데, 이렇게 느끼고 있는데, 왜 다르다는 거야?”
뫼는 고개만 푹 수그린다. 대꾸할 말이 없다. 엄마의 뱃속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도 억울하다. 한데 난자와 정자의 수정으로 탄생한 것도 아니란다. 사람이 그려낸 그림에 그저 인간의 유전자를 넣어서 만들어냈단다. 그래 인간과는 다른 종류란다. 이균도, 애니도 다 그렇게 말한다. 말만 그러면 그래도 나을 거 같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은 자신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취급한다. 꼭 우리 안에 가두어 놓고 살 사람을 기다리는 악덕 노예 상인 같다.
울고 싶지만 울 수가 없다. 그럼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일어나고 싶다. 살고 싶다. 애니민일지언정 목숨을 지켜내고 싶다. 한데 앞을 내다보면 깜깜하다. 그래도 희망을 놓지는 못한다. 지금까지도 늘 어둠 속을 헤쳐 왔다. 언제나 앞을 내다보면 깜깜했다. 그래도 매몰되지 않고 빠져나왔다. 이번에도 그래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선이 떠오른다. 엄마 같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삐쩍 말라 안쓰럽던 여자였다. 웃음도 찾아보기 힘든 여자였다. 그녀가 자신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녀를 이길 방법만을 생각했다. 한데 서늘할 거 같던 그녀의 피는 따뜻했다. 어쩜 길이 그녀와 닿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아줌마한테 가보자!”
뫼가 누리의 팔을 잡아당긴다.
“가면? 뾰족한 수라도 있대?”
누리가 불퉁거린다.
“그거야 모르잖아. 그러니까 가보자고. 모르니까.”
누리가 마지못해 몸을 일으킨다. 들도 이든도 버들도 아미도 모두 따라 일어선다. 그러고 보니 다들 무섭다는 생각도 잊고 숲에 앉아 있었다. 그제야 생각났는지 들과 버들이 주변을 살핀다. 다행이 뱀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마음을 놓는다.
“그래 가보자!”
들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난 죽고 싶지도 않지만 이대로 놈의 손에 우릴 내맡기고 싶지도 않아. 큰소리도 쳤는데 빈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지. 가서 본때를 보여주자고. 우리가 놈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도. 그래, 뫼 말대로 아줌마한테 물어보자. 어찌 알아? 아줌마한테 길이 있을지. 그게 아니라도 아줌만 우리 편이잖아. 말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힘이 돼줄 거야.”
들이 씩씩하게 앞장을 선다. 뫼가 들의 꽁무니를 따른다.
이선은 운동을 갔는지 인터폰을 아무리 눌러도 나타나지 않는다. 아님 다른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뫼는 애가 바짝바짝 탄다. 시간이 멈춘 듯 흐르지 않는다. 다들 애타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왜 안 오셔?”
“어디 가신 거야?”
“안 오시면 어떡해?”
“무슨 일 있으신 거 아니야?”
애타는 마음이 줄줄 쏟아져 나온다. 다들 쏟아내기만 할 뿐 주워 담지는 않는다.
뫼도 은근히 걱정이 된다. 애니와 이균, 그들이 이선에게 해코지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닐 거라고 생각을 돌려보지만 억지로 돌린 생각은 언제나 틈만 나면 제자리로 돌아온다. 다들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인간들이다. 아니라고 장담을 할 수가 없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굳어질 즈음 이선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