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인데? 똑똑해. 맞아. 넌 한 번도 내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었어. 이번에도 그렇군.”
이균이 느글느글한 말투로 불쑥 끼어든다.
“맙소사. 저 놈이야?”
누리가 거칠게 말한다. 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속은 이균을 두들겨대고 있다. 이든도 버들도, 아미도 놀라자빠지려 한다. 뫼만 꼿꼿하다.
“지금까지는 그랬지. 하지만 지금부턴 다를 걸?”
뫼가 부르르 몸을 떨며 말한다.
“그 자신감? 좋아. 내 팔에서 축 늘어져 있으면 재미가 없지. 팔딱팔딱 뛰어야 살 떨리는 재미가 따라오지. 그래도 잊지는 마! 니들이 내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말이야.”
“우린 당신 손아귀에서 이미 빠져나왔어. 살 떨리는 재미? 희망사항이겠지.”
“아직도 큰소리군. 유전자정보를 복사해 숨겨둔 걸 믿고 그러는 모양인데? 어림도 없어.”
뫼가 놀라 움찔한다.
“꼭꼭 숨긴다고 모를 줄 알았나? 내 손바닥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아직도 모르나 보군. ㅎㅎㅎ.”
다들 치가 떨리는지 이를 앙 다문다. 누리는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에 이리저리 반응한다. 이든이 그런 누리를 꼭 붙든다.
“누리구나. 누리, 넌 혈기가 가장 왕성한 녀석이었어. 법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녀석이었지. 10번을 속성복제 했어도 그 기질은 여전하군. 좋아. 그렇게만 하면 돼. 내가 너한테 바라는 게 그거니까? 이든, 아미, 버들, 니들은 알고 싶지 않아?”
누리가 열이 치받는지 씩씩거린다. 이든과 버들이 누리를 붙들고 토닥인다.
“그런 식으로 우릴 뿔뿔이 흩어놓겠다는 생각이라면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우린 똘똘 뭉쳐서 흩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럼 어디 한 번 해 보든가. 니가 아직도 애니에게처럼 내게 맞설 수 있다 생각하는 모양인데? 어림없어. 니 정보가 내 손에 있는 한 넌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어. 내 시험은 이제 끝났어. 알고 싶은 걸 모두 알아냈다고. 그러니 지금의 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내 몸에 담긴 정보에 손을 대겠다는 뜻이야?”
“못 할 것도 없지. 손대는 게 처음도 아닌데 어려울 게 뭐가 있겠어?”
다들 몸을 부르르 떤다.
“그러고도 양심이 멀쩡한 모양이지?”
“양심? 나한테 그런 건 없어. 거추장스럽게 왜 그런 걸 달고 다녀? 니들은 내 피조물이야. 내 피조물에 창조주가 손을 대는 건 당연하지. 내가 그걸 가지고 왜 마음을 쓰겠나?”
다들 얼어붙은 듯 움쩍달싹 못한다. 분노가 이글거리지만 그 걸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왜? 겁나나? 내가 니들 유전자에 손을 댈까 겁나는 거야?”
“겁은? 해볼 테면 해봐!”
누리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이든과 버들이 다시 누리를 붙든다.
“그런 거라면 걱정 마! 완전히 망가뜨리지는 않을 테니. 니들이 내게 안겨 줄 돈이 얼마인데 내가 손을 대서 망가뜨리겠어?”
“돈,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돈으로 천당에 땅이라도 살 셈인가? 소훈과 애니도 돈방석 운운하더군. 다들 돈에 미쳤어.”
“맞아. 이곳은 다들 돈에 미쳤어. 정치가도, 기업가도, 과학자도, 예술가도, 교사도, 직장인도 모두 돈에 미쳤어. 돈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이니 안 그럴 수 있나? 천당에 땅을 살 거냐고? 못 살 것도 없지. 난 능력이 되는 실력자인데. 신도 내 능력이 부러울 게야.”
“당신 정말 미쳤군. 애니라고 했나? 그 놈은 애교수준이었어.”
“녀석들, 지들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줄 뻐기고 있을 텐데 볼 수 없다는 게 섭섭하군. 작업실에 몰래 카메라 하나 박아두는 건데 그 생각을 못했어. 미련한 놈들. 나를 믿다니. ㅎㅎㅎㅎ 놈들도 돈에 미쳐서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한 거야. 돈에 미치면 돈밖에 안 보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ㅎㅎㅎㅎㅎㅎ······.”
웃음소리가 낭자하게 울려댄다. 다들 귀를 틀어막는다. 누리도 귀를 틀어막은 채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한 대 갈기고 싶은 것을 참는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의외로 다들 차분하다. 몇 번 겪어내면서 내성이 생긴 모양이다. 울상도, 죽을상도 더는 짓지 않는다.
“어떡하긴? 놈을 짓이겨놔야지.”
누리가 날을 세워 말한다. 그 말이 서늘하다.
“그거야 당연하지. 내 말은 놈을 어떻게 짓이겨놓느냐고?”
이든이 누리의 말에 좀 더 자세한 걸 요구한다.
“그렇지. 어떻게가 남았지.”
“놈의 꿍꿍이를 알 수가 있어야지. 우리를 이용해 돈을 벌 생각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그게 다야.”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어. 지금까진 애교수준이었어. 놈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야. 느글느글한 목소리와 온몸을 소름 돋게 하던 그 웃음소리, 생각만 해도 끔찍해.”
이든은 몸서리를 친다. 이균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한다. 달라붙는 웃음소리를 떼어내려 안간힘을 쓴다.
“왜 갈수록 태산이야? 이만큼 괴롭혔으면 되는 거 아냐? 이젠 놔줄 때가 된 거 아니야? 한데 왜? 왜 만들어 내놓고는 괴롭히느냐고? 우리가 뭘 잘못했기에.”
결국 아미가 더는 참지 못하고 악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