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몇 달 전에 나누었던 말 생각나? 우리가 애니민이라는 걸 처음 알았던 그때.”
뫼가 뜬금없이 몇 달 전 얘기를 꺼낸다. 들이 뭐냐고 묻는 눈빛을 보낸다.
“이든이 ‘그래서, 이젠 어찌할 건데?’ 했던 말.”
“어렴풋이.”
“누리가 ‘우린 숨도 쉬고, 생각도 하고, 배고픔도 느끼고, 울기도 해. 먹고 마시고 싸고 자고, 그런 것들도 다 한다고. 한데 그 따위 것이 뭐가 중요한데?’라고 했던 말은?”
“생각 나.”
“그때 생각하면 지금 우린 올챙이가 개구리 된 거야?”
들이 피식 웃는다.
“그땐 죽음만이 을씨년스럽게 감도는 저승에 앉아있는 느낌이었어. 그땐 그 말들이 그냥 바늘이 되어 찔러대는 것만 같았어. 누리처럼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꾹꾹 참고 있는데 아픔은 가시지 않고 더해지기만 했어.”
“나도 그랬어. 그래도 우린 주저앉은 적이 없어. 당연히 개구리가 되어야지. 니가 잘 버텨준 덕이야. 고마워.”
들이 따뜻한 눈빛으로 뫼를 어루만진다.
“그 말 들으려는 게 아니고, 이제야 마음이 편해졌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 그동안은 운명에 매어 악에 받쳐서 싸웠는데 이젠 우리 자신을 위해서 싸울 수 있을 거 같아. 운명에 대한 한탄은 떼어냈으니 놈들과 맞서도 주저앉을 일은 없을 거야. 우리 목숨도 놈들의 목숨처럼 소중해. 우리도 살아 숨 쉬는 어엿한 생명체라고. 그러니 지키는 건 당연해.”
“현실에 한 번 물어보자! 아줌마라면 알지도 모르잖아. 우린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아.”
“그래. 그래보자!”
뫼가 이선을 부른다. 이선이 달려온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뭐가 알고 싶어서?”
“우리도 목숨이 붙어있는 한 생명체 맞죠?”
“그럼.”
이선이 주저 없이 대답한다.
“그럼 생명체를 죽이면 어떻게 되나요?”
“사람이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 한데 왜?”
갑자기 묻는 의도가 불안하다. 가슴이 떨려온다.
“사람을 죽였다면요?”
“법에 따라 벌을 받게 되지. 정도에 따라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하기도 해.”
이선이 뜸을 들이다 마지못해 말한다.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는 느낌이다.
“만약 놈들이 우리 목숨을 거두어 가면요? 그때도 벌을 받게 되나요?”
“그건·····.”
이선이 말을 매듭 짓지 못하고 우물우물한다. 해줄 말이 없다. 있다 해도 토해낼 수가 없다.
“어떤 벌도 받지 않는군요?”
결국 뫼가 대신 뱉어낸다. 이선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온다. 한숨도 뒤따른다.
“니들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거든. 법은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 보호해.”
설명을 보태는 이선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린다.
“그럼 우리 같은 사람을 만들어내고, 사고팔고, 심지어 죽여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군요? 우리도 이렇게 느끼는데, 그리고 아프기도 한데. 우린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는 존재들이군요?”
뫼의 목소리가 버석거린다. 물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니들이 처음이야. 아무도 니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몰라. 그래서 문제가 되지 않는 거야. 니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 달라질 거야. 한데 지금은 한계가 있어. 알릴 방법이 없어. 아무도 믿지 않을 거라고. 알려진다고 해도 관련법을 만들어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거야. 알려진다고 바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야. 미안하구나. 이런 말을 하게 돼서.”
이선의 목소리에 맥이 없다. 또박또박 말을 할 수가 없다.
“아녜요. 아줌마 탓이 아닌 걸요. 이만 빠져나갈게요.”
모래알을 씹고 있는 기분이다. 그 느낌이 고스란히 퍼져간다.
“다시 볼 수 있었으면 해.”
이선의 목소리를 희미하게 들으며 빠져나온다.
“필요하면, 우리도 놈들을 죽이자! 양쪽 다 걸리는 게 없어. 죽기 살기로 덤빌 거야.”
살기가 느껴진다. 뫼의 말이 살갗을 저미는 거 같다. 아프다. 한데 신음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가슴에 돌덩이가 얹혀 소리통로를 막고 있는 것만 같다.
뫼는 아차 한다. 들에게 털어 놓을 말이 아니었다. 사실 스스로도 아직 그게 진심인지 알 수가 없다. 불쑥 나오는 바람에 뱉어내긴 했지만 입에 착 달라붙지 않는다. 생각을 해봤던 것도 아니다. 그럴 마음도 확 일지 않는다.
“이 말 하려고 했던 게 아닌데?”
뫼가 쑥스럽게 둘러댄다. 들의 싸늘한 표정이 풀리지 않는다.
“편해졌다는 게 이거였어?”
“어쩜. 놈을 따라붙으면서도 늘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도 몰라. 목숨을 헤치면 안 된다는 생각. 그래야 우리 목숨도 보호받을 거란 생각. 한데 이젠 확실해졌어. 그 느낌에 주저하지 않아도 돼. 아무도 우리 생명을 지켜주지 않아. 우리 목숨을 지켜줄 사람은 우리 애니민뿐이야.”
들의, 촉각을 곤두세운 말에 뫼가 떠밀린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온다. 오래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말처럼 막힘이 없다.
“그건 좀······.”
들이 말을 잇지 못한다.
“그냥 이유 없이 죽이겠다는 게 아니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게 되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이야.”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수가 없다. 주변이 질척거린다.
‘내가 왜 이래? 이건 내 마음이 아니야. 왜 맘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건 알아. 그래도 맘속에 그 생각을 담아두지 않았으면 해.”
“그러다 내가 놈들에게 당하면? 놈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가오고 있어. 안 되면 우릴 죽일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
“그건 아니야. 그것은 막아내야지. 그래야 우리가 살아있을 수 있으니까. 다만?”
“다만 뭐?”
목소리가 서로 비켜간다. 말이 엇갈린다.
“다만······.”
여전히 말이 막혀 나오지 않는다. 안에 있는 걸 끄집어내려 하는데 날카롭게 뻗어오는 뫼의 시선에 막힌다.
“봐! 말을 못하잖아. 너한테도 다른 방법이 없는 거잖아.”
마음과 달리 뫼가 들을 드세게 몰아붙인다. 들은 뫼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멀건이 뫼만 바라본다. 뫼의 시선은 싸늘하다. 들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간다. 뫼의 눈길이 들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불러 세우고 싶지만 입이 열리지 않는다.
들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얼마 안 있어 애니와 소훈, 이균이 들어와 와글댄다. 열이 뻗친다. 눈이 허공을 더듬다 멈춘다.
‘가만 두지 않겠어. 니놈들이 내 목에 칼을 들이대기 전에 내가 니놈들 목에 칼을 들이댈 거야. 죽고 싶으면 다가와!’
뫼의 눈이 강렬하게 타오른다. 물러설 수 없다 생각한다.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생명이라면 죽기 살기로 덤비는 수밖에 없다. 이균의 거친 숨소리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온다. 머릿속에만 머물러 있던 생각이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