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만으로도 마음은 가벼워진다. 느낌은 힘없이 밀려난다. 들이 밝게 웃어 보인다. 뫼도 어두운 생각에서 벗어난 듯하다. 그의 얼굴도 환해져 있다.
“약속해. 뭐든 놈들과 맞서기 위해서만 쓰겠다고. 우리 마음까지 할퀴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우리도 살아야 하잖아. 마음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뽀얀 웃음을 쏟아내며 살아야 하잖아. 난 그렇게 살고 싶어.”
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뫼를 올려다본다. 뫼는 그러겠다고 약속을 한다.
“놈들 열 받았겠다. 지금쯤은 펄쩍펄쩍 뛰고 있지 않을까?”
“그러겠지.”
둘 다 입을 다문다. 이를 바드득 가는 애니를 떠올린다. 째려보는 매서운 눈빛이 느껴진다. 뫼의 안이 요동친다. 애니가 사정없이 흔들어댄다.
“내 이 새끼를!”
애니가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려친다. 손이 얼얼하다. 한데 이를 악물고 참는다.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지 놈이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 보지? 기껏해야 애니민이면서 사람 행세는? 이 새끼 머릿속을 긁어내든가 해서 식물인간을 만들든가 해야지.”
악이 받친다. 돈 벌자고 만들었다. 주인한테 복종하는 게 도리다. 한데 지들이 독립된 인격체라도 되는 양 행동한다.
“덤벼 봐, 새끼들아! 몽둥이로 휘갈겨줄 거니까.”
혼자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른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대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날 추적해? 내 컴퓨터를 먹통으로 만들어? 사람도 아닌 것들이 가상공간에서 현실을 넘봐! 그러고도 살아남을 줄 알아?”
소리가 작아지지 않는다. 목에서 째지는 소리가 난다. 그래도 멈추지 못한다.
“뫼, 너 이 새끼. 덤빌 테면 덤벼봐! 너 지금 어디 있어, 새끼야? 나와! 안 나와!”
사방은 조용하다. 혼자 떠들어대는 소리만이 외롭게 귀청을 때린다. 힘이 빠져 주저앉는다. 거친 숨소리만이 들락날락한다.
자판을 마구 두드린다. 화면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주먹으로 내려친다. 그래도 소용이 없다.
문소리가 난다. 잠시 자리를 피했던 소훈이 돌아온 모양이다. 하지만 생각이 그쪽으로 옮겨가지 않는다.
“먹어! 너 뱃속이 비면 거칠어지잖아. 먹고 가라앉혀. 굶으면 너만 손해야. 내 뭐랬어? 누리나 이든, 버들과 아미 정도로 통일하자고 했잖아. 한데 니가 고집을 부렸어.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야. 괜히 맘고생, 몸 고생 하지 말고 놈들은 버리자. 그냥 놔두기 그러면 명줄 끊어.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소훈이 차근차근 말심지를 박는다. 하지만 애니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 상처만 내고 있다.
“바보 같은 자식! 니가 그림을 그려봤어? 그게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 알아? 내가 피터 팬인 줄 알아? 낼모레면 50이야. 내손으로 작업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뜻이야. 한데 버려? 그 말이 너한텐 그렇게 가벼운 말이야? 두 눈 똑바로 뜨고 잘 봐! 이건 획기적인 거야. 사이보그도 아직은 없어. 생명을 가진 애니메이션 캐릭터? 꿈도 못 꿔. 그걸 내가 해냈어. 이 머리로, 이 두 손으로 내가 해냈다고. 한데 버려? 돈 때문인 줄 알아? 너야 돈 때문이겠지. 어차피 그걸 노리고 손잡은 거니까. 하지만 난 그게 다가 아니야!”
애니는 이를 바드득 간다. 욕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아낸다.
“왜 그렇게 뫼에 집착하는데? 내 보기에 넌 지금 집착하고 있어. 가상공간에 풀어놓은 양 한 마리에 집착하고 있다고?”
애니가 어이가 없는지 차갑게 웃는다.
“아냐?”
콧바람을 훅 내뱉는다. 어이가 없다.
“뫼는 이 세상 전부와 연결돼있어. 우리 컴퓨터와만 연결되어 있었던 게 아니라고. 가상공간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면서 모든 걸 제 맘대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어. 놈이 그걸 알게 됐어. 벌써 그걸 써먹고 있다고. 알아? 내 컴퓨터? 복구 못해. 우린 이제 맨주먹이야. 목숨을 끊어? 무슨 재간으로. 우린 맨주먹인데 무슨 수로? 뫼를 제어할 수 없으면 우린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소훈이 멍하니 애니를 본다. 비로소 애니가 이해가 된다. 상황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애니가 왜 그렇게 날뛰었는지 알 거 같다.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공들인 것을 잃은 아픔만이 아니다. 애니민을 다시 만들어도 뫼가 끼어들면 끝이다. 그의 간섭에 늘 부대껴야 한다. 피조물을 가상공간에 만들어 내놓으면서 신처럼 굴 수 있는 권한을 죄 허락한 대가다. 눈이 번쩍 뜨인다. 멀쩡하던 뼛속이 시리기 시작한다.
“그럴 리가 없어. 자료가 어딘가 남아있겠지?”
“다 날아갔어. 하나도 남김없이. 우린 이제 빈 털털이가 됐다고. 이렇게 떨어지는 고물 하나 없는 빈 털털이. 알아?”
애니가 빈손을 탈탈 털어 보인다.
“이균이 있잖아. 아무 것도 없이 이렇게 놈이 얌전할 리가 없어. 숨기고 있는 게 있을 거야.”
소훈이 이균을 끌어들인다. 애니의 눈이 꿈틀한다.
‘맞아. 이균, 그 자식이 손에 쥔 게 없이 이렇게 얌전할 리가 없지. 돈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버린 녀석인데.’
애니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간다.
“가자!”
“어딜?”
“이균한테. 가서 목을 움켜쥐고라도 다그쳐 보자고.”
곧 숨이 넘어갈 거 같던 소훈이 반짝 살아난다. 애니가 후다닥 겉옷을 걸치고 앞서 나간다. 소훈도 뒤질세라 바짝 따라붙는다.
“열쇠 줘!”
소훈이 눈치를 살피며 열쇠를 건네준다. 애니가 문을 열자마자 시동을 걸고는 바로 출발한다. 운전대를 잡은 애니의 손놀림이 거칠다. 차가 휘청휘청하면서 이리저리 방향을 바꾼다. 소훈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애니가 차를 주차장에 버리고 뛰어간다. 소훈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운전석으로 바꿔 앉아 차를 주차시키고 뛰기 시작한다. 애니를 탓할 여유가 없다. 오로지 자료 생각밖에 없다.
애니는 이균의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소파로 가서 털썩 주저앉는다. 이균이 애니의 눈치를 살핀다. 낯빛이 예사롭지 않다.
“커피?”
커피를 타서 애니에게 내민다. 애니가 잔을 받아 단숨에 마시더니 잔을 도로 건넨다. 쳐다보지도 않는다. 시선을 피하고 있다. 하는 짓거리가 영락없이 빌려준 돈 받으러 온 빚쟁이 같다. 이균은 애니의 눈치를 보며 의자에 앉는다.
“소훈은?”
“오겠지.”
때맞춰 소훈이 들어선다.
“애~.”
애니민 소리를 하려다 만다. 먼저 꺼낼 필요가 없다 생각한다. 애니가 온 목적도 애니민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을 놈이다.
“내놔!”
몸통을 휙 돌리더니 애니가 손을 내민다. 말머리는 싹둑 잘려나가고 없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돈다. 몸을 바짝 움츠린다.
“뭘?”
시치미를 떼지만 말이 얼어 있다. 빼앗길 수는 없다.
“니 수중에 있는 자료.”
“없어. 덫을 쳐 놓고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정말?”
“정말 없어.”
“그럼 덫이라도 내놔! 기다리면 걸려들 거 아냐?”
애니가 틈을 보이지 않고 조여 온다. 이균도 생각을 비운 듯 허공을 바라본다.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내게 없거든.”
“믿을 거 같으냐?”
“믿거나 말거나.”
이균도 배짱을 부리기로 한다. 둘러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다그쳐도 줄 게 없다. 애니민의 컴퓨터 시스템에 숨겨놓은 자료가 전부다.
“이 자식이?”
애니가 주먹을 쥐고 팔을 들어올린다. 이균이 몸을 피한다.
“니 컴퓨터에 자료 있잖아?”
소리를 키워 윽박지른다.
“그건 니가 가지고 있잖아. 니 컴퓨터에. 아냐?”
이균도 뚫고 나아가려 안간힘을 쓴다.
“날아갔어.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내-놓으라고.”
애니는 둘러대지 않는다. 둘러대는 건 뭔가 손에 쥐고 있는 게 있을 때나 쓸 수 있다. 달래고 어를 때난 통하는 거다. 그게 아닐 땐 내보이는 게 지름길이다.
“뒤져서 있으면 가져가!”
애니가 이균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이 자식, 딴 짓거리 못하게 잘 지켜!”
소훈에게 단단히 이르고는 몸을 일으켜 컴퓨터로 간다. 애니의 손이 신경질적으로 움직인다. 이균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찾아봐야 나올 게 없다.
애니가 손을 털고 다시 소파에 주저앉는다.
“오늘부터 여기서 먹고 잔다. 훈, 너 가서 옷가지 챙겨와!”
이균은 갑자기 피가 거꾸로 솟는다. 뒷머리가 띵하다. 손으로 뒷덜미를 잡는다.
“사무실은?”
소훈도 벙 찐 표정이다. 애니만이 태연하다.
“텅 빈 사무실 나올 게 뭐가 있다고. 싫으면 넌 거기 있어. 나 혼자 있어도 충분하니까.”
소파에 아예 벌렁 드러눕는다. 이균은 애가 탄다. 애니가 있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자료는 왜 날렸는데?”
이균이 애가 타는 걸 가까스로 누르고 묻는다.
“뫼, 그놈이 아주 똑똑하더라고. 내 컴퓨터를 박살냈어. 누구 머린지 유전자 주인을 찾아서 아작을 내고 싶어. 머리 좋은 놈인 줄은 니 읊어대던 말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들, 고년도 여간내기가 아니고.”
소름이 확 돋는다. 독기가 철철 흘러넘친다. 게다가 모르고 하는 말도 아니다. 이미 알고 있다. 그러면서 으름장을 놓고 있다.
“유전자가 뭔 소용이야? 속성 복제를 10번 가까이 했어. 유전자정보는 거의 지워졌어.”
“니 놈이 뭔 짓거리를 했는지 우리가 알 게 뭐야? 우린 봐도 까막눈이잖아? 니 놈 속도 구렁이 몇 마리는 틀고 앉아 있지 않나?”
자료 잃은 걸 이균 탓으로 몰아붙인다.
“그런 니 놈은? 니 놈 하는 짓은 내 눈에 훤히 보인다든? 너나 나나 모르기는 마찬가지야. 니 놈이 나 모르게 딴 짓거리 한다면, 들여다본다고 알 거 같냐? 니가 모르면 나도 몰라. 다시 말하는데, 뫼가 똑똑한 건, 유전자 탓이 아니야. 10번이나 속성 복제했어. 니 놈이 손대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어. 괜히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 그런 식으로 탓하지 마!”
애니가 눈을 감는다. 숨소리만 달랑달랑한다. 자는 척을 한다. 하지만 속은 싸하다.
이균도 속이 닳는 건 마찬가지다. 가라고 떠민다고 물러날 위인이 아니다. 애니가 있으면 컴퓨터나 만지작거려야 한다. 마음은 타들어 가는데 내색을 할 수도 없다.
애니는 뫼를 떠올린다. 처음 몇 달 동안은 기특했다. 화면을 보고 있으면 달콤했다.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한데 그 모든 게 순식간에 날아갔다. 뫼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준 탓이다. 뫼가 얼마나 자신의 권한을 알아내서 써먹을지 알 수가 없다. 그걸 생각하자 열이 훅 올라온다.
‘혹시 괴물이 되는 건 아니야? 신에 버금가는 권한을 가졌어. 아니라고 장담을 할 수가 없어.’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바람이 자꾸 꺾인다.
‘설마? 설마가 아니야. 괴물이 돼 있을지도 몰라. 겉모습만 반듯한 괴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누워서 걸려들기만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어쩜 분초를 다투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균을 살핀다. 그도 자는 척하고 있다. 아직은 버티겠다는 심보다.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은 지는 거다. 하지만 손쓸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그것보다는 낫다 생각한다.
“정말 없어? 니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뫼가 괴물이 돼가고 있어. 가상공간이 조만간 엉망진창이 될 거야.”
정면 돌파다.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 서두르지 않으면 모든 걸 잃게 된다. 기회도 희망도 가져볼 수 없다. 그 생각만을 하기로 하고 두 눈 딱 감는다.
이균은 꿈쩍도 않는다. 단잠에 푹 빠진 척하고 있다. 하지만 깨어있다. 깨어서 멀쩡한 정신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다. 그 정도는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애니민을 되찾을 수 없다 해도 괜찮다고? 더는 이런 걸로 돈을 벌 수 없다 해도 괜찮다 이거지? 니 맘대로 해.”
여전히 반응이 없다. 애니가 옷을 주워들고 일어선다. 머뭇거리지 않고 발걸음을 뗀다.
이균은 머리가 말똥말똥하다. 애니의 말이 빠져나가지 않는다. 다급하지 않으면 돌아보지도 않았을 위인이다. 허겁지겁 달려온 것을 보면 아주 못 믿을 말은 아닌 거 같다. 밑져야 본전이다.
“그럼 왜 그렇게 됐는지 솔직히 다 말해! 그러면 나도 생각해볼 테니까.”
눈을 감은 채 나직하게 말한다. 조급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 그래도 기회라면 놓칠 수 없다.
“내가 뫼의 몸속에 가상공간을 통째로 넣었어. 그러니까 뫼의 몸은 또 하나의 가상공간이라고 보면 돼. 그걸 뫼가 알아가고 있어.”
이균의 눈이 커진다. 힘만 된다면 애니의 목을 조이고 싶다. 하지만 그래봐야 얻을 게 없다. 손이 근질거리는 것을 이를 악물고 참는다.
“아직은 모른다는 뜻이야?”
말 속에 가시가 박혀있다. 이를 악물어서인지 말이 이빨에 갈려 나온다.
“다는 몰라. 일부는 이미 눈치 챘어.”
“다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데?”
“가상공간이 아닌 현실에 보복할 수도 있어.”
“말도 안 돼!”
이균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온다. 애니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한다.
“그게 최악이야?”
“최악은 상상이 불가능해.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어. 양심과 도덕이 많이 작용해서 그걸 선택하지 않는다면 안에서 물거품처럼 사그라질 수도 있어. 그게 유전자 속에서 상처를 입지 않았다면 그걸 기대해볼 수도 있어.”
“무슨 수로? 10번이나 속성복제를 했어. 만 년의 사람에 어울리도록 하기 위해 10번이나 속성복제를 했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는 말 안 해도 알잖아.”
애니가 다시 소파에 주저앉는다. 두려운 건 아니다. 엉킨 머릿속이 풀리지 않을 뿐이다.
“넌 잔인한 놈이야. 돈 때문이었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돈은 벌 수 있었잖아.”
이균이 애니를 노려본다.
“돈 때문에 그랬겠냐?”
애니가 한숨을 내쉰다.
“어디까지 가능한지 가보고 싶었다. 이렇게 빨리 알아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반드시 찾아야 돼. 찾아서 빼내야 해.”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내 목에 칼을 겨누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 너도 마찬가지 아냐?”
애니가 순순히 인정한다. 이미 서로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거짓말은 금방 드러나고 만다.
“말해, 이제! 니 손에 쥐고 있는 패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