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공기를 마셔서인지 작업실로 가는 통로의 공기가 탁하다. 뭔가 목에 걸리는 느낌이다. 기침을 해서 뱉어낸다.
‘속에 잔뜩 꿍꿍이를 가지고 손을 내밀면, 누가 덥석 잡아준대? 지 속에 능구렁이가 있으면 내 안엔 이무기가 들어앉아 있다는 걸 겪어 보고도 모르나? 지가 감추면 나도 꼭꼭 숨겨.’
입이 근질근질한 걸 잘 참아냈다 생각한다. 애니가 속을 드러내면 그도 말할 참이었다. 한데 애니가 먼저 엉큼하게 굴었다. 이균도 열려고 갔다가 외려 꼭꼭 닫아걸고 온다.
그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뜬다. 시스템에 숨겨놓은 게 화면에 떴을 걸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아무쪼록 걸려들어야 한다. 그럼 애니보다 먼저 애니민들을 손에 넣을 수가 있다. 그때까진 잠자코 있어야 한다.
뫼. 깎은 듯한 겉모습에 가려진 분신이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눈을 감고 나지막한 소리로 부른다.
뫼는 이상한 소리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찌릿하다.
‘내 몸을 훑고 지나간 게 뭐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핀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그대로다. 비틀거리며 컴퓨터로 간다. 뭔가 이상하다. 달라졌는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다. 한참을 살핀 끝에야 화면에 뜬 낯선 폴더 하나를 발견한다.
‘뭐지?’
촉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알아내지 못한다. 해킹을 당한 건가 해서 살핀다.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애니는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누군가다.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열어봐!’
숨소리가 말소리가 되어 머리를 두드린다. 발소리도 들린다. 서성이고 있는 듯하다. 역시 애니는 아니다. 소훈도 아니다. 발소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동안 겪어온 낯익은 소리가 아니다.
열어볼까 하다가 그만둔다. 내용물을 도시 알 수가 없다. 공학자가 떠오른다. 언젠가 애니의 사무실을 찾아왔던 그 목소리가 생각난다. 그 기억을 더듬는다. 닮아있다. 놈이 맞다.
애니를 상대하기도 벅차다. 한데 또 다른 놈이 끼어들었다. 방법도 다르다. 다시 머릿속이 캄캄하다. 곧 손에 쥘 수 있을 거 같았던 해결책이 멀리 달아나고 없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버겁다. 모두에게 알린다고 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철저히 자신의 몫이기에 혼자 감당하려고 했다. 해결책을 찾으면 선물로 안겨주려 했다. 한데 둘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화면에 뜬 폴더 내용이 뭔지 알 수가 없다. 불안하다.
혼자 며칠을 끙끙 앓는다. 애니가 펄펄 뛰는 걸 상상해도 가벼워지지가 않는다.
“왜 그래?”
다들 눈을 둥그렇게 뜨고 다가온다. 신열이 난다. 앓는 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다.
“왜 그러냐고?”
들이 대답을 하라고 다그친다.
“그냥 막막해서.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갑자기 자신 없는 소리는? 우리 운명이 니 손에 달려있다는 거 몰라?”
아미가 핀잔을 한다.
“왜? 무슨 일 있었어?”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인다. 하지만 할 수가 없다.
“그냥. 지쳤나봐.”
들이 뫼의 손을 꼭 잡아준다. 따뜻하다. 얼음처럼 차갑던 몸에 온기가 퍼진다.
“자유라는 것은 쉬 얻어지는 게 아니라잖아.”
들이 달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알아. 한데도 마음 언저리가 아려.”
뫼가 씁쓸함을 지우지 못한다.
“우리 드라마 볼까? 기분전환도 할 겸.”
이든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한다.
“괜찮은데? 우리도 2013년을 내다보면서 눈요기 좀 하자! 지들만 눈요기하라는 법이라도 있어? 우리도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인데. 걔네들 죽여주더라. 쭉쭉 뻗은 몸매에 다부진 체격. 가서 댓 놈은 잡아오고 싶더라.”
버들이 맞장구를 친다. 뫼는 그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죽 쑨 얼굴을 하고 앉아 있어봐야 처량해질 뿐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드라마라도 보며 히죽거리는 게 나을 거 같다.
그는 드라마 창을 연다. 2013년이 화면을 다채롭게 꾸며낸다. 2013년의 청춘남녀가 화사하게 화면을 채운다. 버들의 눈이 제일 반짝인다. 금방이라도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거 같은 얼굴이다. 웃음소리가 간간이 터져 나온다. 그러더니 입이 다들 헤 벌어진다. 젊음은 좋다. 그도 입이 헤 벌어진다.
젊은 남녀가 화면을 다 차지한 채 으르렁거리고 있다. 엇갈린 사랑을 돌리려 한다. 하지만 지나간 사랑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서로의 마음에 생체기만 남길 뿐이다.
남자는 새로운 사랑에 푹 젖어있다. 그 사랑 앞에선 늘 달콤한 표정을 짓는다. 남자는 간혹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아 투정을 하기도 한다. 여자가 속내를 알고 토닥여 주면 샐쭉한 얼굴이 금새 웃음꽃으로 가득해진다.
들의 얼굴이 드라마 속 여자주인공의 얼굴에 겹쳐 지나간다.
너 사랑하고 있구나, 하던 이선의 말이 떠오른다. 처음엔 아니라고 잡아뗐지만 끝까지 잡아떼지는 못했다.
그는 들을 본다. 그녀의 입도 헤 벌어져 있다. 그의 눈길이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누가 들을 채가기라도 할까 봐 조바심도 인다. 사람들은 그런 걸 두고 사랑이라 하는 모양이다. 사랑 맞다. 들이 옆에 있으면 좋으니까. 누가 들 옆에 다가가기라도 하면 신경이 곤두서니까.
뫼는 들의 얼굴을 그윽하게 바다보다 화면으로 눈길을 옮긴다. 들이 옆에 있어서인지 마음이 푸근하다.
다들 말이 없다. 화면 속 세상에 푹 빠져 있다. 작가가 꾸며낸 삶일 뿐인데 그 삶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그들 중 누군가가 되어서 화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드라마가 끝나고 화면이 지지직거린다. 누리가 뫼를 본다. 그 다음 화면을 열라는 뜻이다. 뫼는 다음 화면을 연다. 멈추었던 삶이 다시 이어진다. 닫혀있던 입들이 다시 헤벌쭉 벌어진다. 생각도 멈춘다. 눈동자만 살아있다. 다른 소리가 희미하게 끼어들고 있음에도 눈치 채지 못한다. 컴퓨터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얽힌다.
“뭐야?”
누리가 짜증을 낸다. 뫼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난다. 얼른 드라마 창을 닫는다. 소리가 점점 커진다.
“왜 그래?”
누리가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 뫼를 본다. 뫼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귀를 쫑긋 세운다.
“놈이야. 조용히 해!”
‘어서 열어봐!’
남자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린다. 꼭 구슬리는 소리 같다. 한데 몸이 싸늘해진다. 오싹 소름이 돋는다.
“이 소리가 애니 그 놈의 목소리라고?”
누리가 목소리가 영 낯선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냐. 이건 놈들의 목소리가 아니야.”
들이 알아챈다.
“셋 중 나머지 하나인 거지?”
뫼가 고개를 끄덕인다. 입술이 달라붙어 말이 나오질 않는다.
“놈도 움직이기 시작한 거야? 언제부터?”
“며칠 전부터.”
“그래서 며칠 동안 혼자 끙끙 앓고 있었던 거야? 다들 가슴 졸이게 하면서 말이야?”
들은 속이 상한다. 눈가가 촉촉해진다. 뫼가 안쓰럽다. 하지만 뭐라 해줄 말이 없다. 그게 더 싫다.
“말을 해도 소용이 없으니까. 놈들은 내 몸에만 모든 걸 담아놓아서 니들이 알아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뫼는 말심지를 돋워 서운함을 드러낸다. 혼자서 꼭꼭 여며둔 게 그렇게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들도 심지를 돋워 들이댄다.
“무슨 말인지 몰라? 나밖에 상대할 수가 없어. 나도 겁이 나. 방법이 너무 달라. 이제 겨우 애니를 상대할 수 있게 됐는데.”
속상함이 쏟아져 나온다. 상대하기엔 너무 벅차다. 뫼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보이고 싶지 않다.
“니 맘 알아.”
들은 그런 뫼가 가엾다. 더는 따지고 들 수가 없다. 사실 따지려 해도 따질 게 없다. 뫼가 짊어져야 하는 짐의 무게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알기에 속이 상하고, 알기에 마음이 아프다.
“내가 뫼 옆에 있을 게.”
누리가 이든과 버들, 아미를 몰고 밖으로 나간다. 들이 누리까지 나가는 것을 확인한다.
“방법이 있을 거야. 너라면 찾아낼 수 있어.”
뫼가 가라앉게 내버려둘 수가 없다. 뭔가 힘을 보태고 싶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뫼를 밀쳐내고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놈이 자꾸 내게 신호를 보내. 그때마다 내 몸이 움찔움찔 해.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어. 애니나 소훈처럼 맞설 상대라는 생각이 아예 다가오질 않아. 놈들과의 사이에는 맞설 상대라는 확실한 선이 그어져 있었어. 한데 놈 앞에서는 아무리 바로 세워도 그 선이 자꾸 허물어져. 그게 미치고 환장해 죽겠어.”
들도 힘이 빠져나간다. 손이 뫼의 등에 힘없이 올려져있다. 막막하다. 가슴이 먹먹하기도 하다. 이균의 이름만 되뇌고 있다. 열어봐! 하고 속삭이는 듯한 그의 말이 스쳐간다.
“아까 놈이 열어보라고 했던 말, 뭘 말하는 거야?”
“화면에 놈이 자료를 올렸어. 그걸 열어보라는 거 같아.”
“그럼 해킹을 했다는 뜻이야.”
“모르겠어. 아무리 뒤져도 해킹 흔적은 없어. 해킹은 아닌 거 같아. 그동안 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다녔는지도 몰라. 내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그러면서 내 안에 자료를 심었을지 모르겠어.”
“그게 가능해?”
뫼가 고개를 끄덕인다.
“인터넷에 있는 자료를 본 거야?”
“내가 해봤어.”
“누구에게?”
들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묻는다.
“애니에게.”
“뭘?”
“추적기와 함께 원격제어 프로그램을.”
“놈은 몰라?”
“아직은. 조만간 알게 될 거야.”
들이 고개를 심하게 가로젓는다. 눈빛이 흔들린다.
“난 니가 하는 말이 도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어. 세상이 겁나.”
“실은 나도 겁나. 사이버공간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야. 그 끝을 나도 모르겠어.”
뫼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맥이 빠진다. 마음도 편하지 않다. 들이 실망한 듯 바라본다.
“놈들의 손아귀에서 온전하게 벗어나려면 어쩔 수가 없었어.”
그렇게밖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하지만 가슴은 쓰리다.
“애니, 그 놈의 밑바닥까지 건드렸다는 생각 안 들어?”
“그래서 미치겠어. 갈라섰던 놈들이 다시 뭉치게 될까봐 겁이 난다고. 그렇게 된다면 그건 순전히 내 탓이야.”
“그럼 되돌리면 되잖아.”
뫼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눈가가 촉촉하다.
“왜?”
“이미 컴퓨터에 죄 깔렸어. 좀 있으면 놈의 컴퓨터가 먹통이 될 거야. 길길 날뛰겠지. 그리고 알게 되겠지. 잡아 죽이려 들 거야.”
“미치고 환장한다는 게 이런 건가보다. 갑자기 속이 미어터질 거 같아.”
“생각이 짧았어. 놈의 컴퓨터만 망가뜨리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 이제 어쩌지?”
뫼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앞이 캄캄해서 들여다볼 수도 없다. 가슴은 텅 비어 바람만 불어댄다. 머릿속은 멈춰 섰다.
“나야. 놈들이 노리는 것은 나라고. 니들은 지킬 수 있어.”
“제 발로 놈들에게 가겠다고? 그럼, 우린 살아낼 수 있을 거 같아? 어림도 없어. 그 생각은 그만 둬!”
뫼가 고개를 푹 수그린다. 할 말이 없다.
“방법을 찾아보자! 길이 있을 거야. 지금까지도 우린 제법 잘 해왔어. 지금처럼만 해나가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자신이 없다. 애니와 이균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려온다. 애니의 이를 뿌드득 가는 소리도 들려온다.
“열어보자!”
들이 작심하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