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뫼가 아쉬운 듯 묻는다.
“누리에게 끼니 때 먹을 거 마련해오라 하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들도 아쉽다. 그냥 옆에 앉아 노닥거리고 싶다. 그 마음을 잘라낼 수 없어 일어난 것이다.
뫼도 들의 마음을 읽는다.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사이버 공간으로 잠수해 들어간다. 뭔가가 주변을 얼쩡거린다. ‘뭐야? 애니잖아? 홀로그램으로 무장하고 있어.’
“왜 따라와? 아바타 바꿔치기 한 걸 자랑하려고? 그러면 내가 모를 줄 아나본데?”
‘나인줄 알면서 겁도 안 난다 이거지?’
“그걸로 날 잡는 건 어림없다는 거 나도 알아. 한데 뭘 겁내? 허깨비 주제에.”
뫼가 애니의 속을 훤히 알고 있는 듯 말한다.
‘자식, 눈치는 구단이네. 아는 것도 많아졌다 이거지?’
“그래도 옆에 바짝 따라붙지 말고 멀찍이 떨어지시지? 얼쩡거리는 게 걸리적거리니까.”
뫼가 귀찮다는 투로 말한다.
“자식이 왜 괜히 집적거려? 내가 뭘 어쨌다고?”
애니가 노골적으로 거칠게 나온다. 속이 아주 뒤틀린 모양이다.
“어라? 말도 할 수 있어? 그냥 허깨비이기만 한 줄 알았는데 말도 할 수 있다고? 현실에서 하는 말이 가상공간까지 뚫고 들어온다고? 손도 뻗쳐올 수 있나?”
놀라 기절할 거 같다. 영 믿을 수가 없다. 사이버 공간을 떠다니는 것도 신기한데 말까지 주고받는다. 현실과 가상공간의 경계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다 몸까지 들어올 수 있게 되는 건 아닌가 하여 은근히 걱정이 된다. 뒷덜미라도 낚아 채일까 봐 주변을 휘 둘러본다. 다행이 놈은 하나뿐이다.
“몰랐어? 똘똘한 줄 알았더니 맹탕이었잖아? 이건 식은 죽 먹기야. 이 정도를 가지고 놀라긴? 아바타 군단을 이끌 수도 있는데. 이건 그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말도 안 돼. 21세기는 진짜야 가짜야?’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이젠 날 피하지도 않으면서. 그러다 생각대로 내가 니 목덜미를 낚아챌 수도 있어.”
“그래보시던가? 지난번처럼 아바타 군단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 놓친 게 되게 뼈아팠던 모양이지?”
뫼가 느긋하게 군다. 애니의 속을 긁어보기로 한다. 그러면서도 슬쩍슬쩍 주변을 살핀다. 하지만 생각은 여전히 얼떨떨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자식이 간덩이가 부었나?”
속이 뜨뜻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달구어진다. 기어이 열을 토해내고 만다.
“부었으면 이리 멀쩡하겠어? 탈이 나도 크게 나야지.”
뫼가 히죽 웃는다.
“자식이 왜 피하지도 않고 꼬박꼬박 대꾸야? 죽을래?”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열이 폭발하기 직전이다. 소리가 고함으로 바뀐다.
“그럼 죽여보시던가.”
애니가 품에서 올가미를 꺼내든다. 뫼의 목덜미를 향해 힘껏 내던진다. 뫼가 얼른 달아난다.
‘한데 여긴 어디지?’
이상하다. 뫼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말도 안 돼. 놈의 게임 속으로 또 들어왔잖아? 낚아채려는 게 아니었어? 속임수였던 거야?’
“미련한 자식. 겁도 없이 여길 기웃거려? 애니민 주제에.”
이번엔 애니가 히죽 웃는다. 섬뜩하다. 뫼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애니는 올가미를 손에 쥔 채 바짝 다가온다. 올가미를 피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슬슬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방심. 방심은 금물인데 내가 방심했어. 내 발로 발톱을 치켜세우고 있는 호랑이굴에 기어 들어왔어! 애니를 골려주는 재미에 기분이 좋았었는데. 놈이 그걸 이용했어. 방심. 열이 뻗쳐오른 게 아니었어. 분리가 돼 있어서인가? 홀로그램 아바타와 감정을 분리할 수도 있나? 감정과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거 아니었나? 애니의 감정과 생각이라 여겼는데, 아니었어. 지금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자! 그리고 일단 빠져나가자! 놈이 내 생각을 꿰뚫어보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내 감정까지도 제 멋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놈이야.’
갑자기 간담이 서늘해진다. 식은땀이 베어난다. 손으로 식은땀을 닦아낸다. 올가미를 피해 몸을 이리저리 던진다.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다. 보이지 않는다. 생각을 바꿔 게임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총이 보인다. 손으로 움켜쥔다. 하지만 빠져나간다. 맨주먹으로 애니에게 맞서기로 한다. 맨손으로는 힘이 달린다. 올가미를 가진 애니가 유리하다. 올가미를 낚아채기로 한다. 몸을 이리저리 던지면서 올가미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손으로 한 쪽 끝은 잡는다. 힘껏 끌어당긴다. 애니의 몸이 뒤로 젖혀진다. 애니가 빼앗기지 않으려 힘껏 잡아당긴다. 줄이 끊어질 듯 팽팽하다. 뫼가 팽팽하게 잡고 있던 줄을 놓는다. 애니가 뒤로 벌러덩 나뒹군다. 총이 튕겨져 나온다. 뫼가 얼른 손으로 잡는다. 숨을 몰아쉰다. 그리고 총을 들고 애니를 겨냥한다. 애니가 히죽 웃는다. 그러더니 연기처럼 사라진다. 닭 쫓던 개마냥 멍하니 사라진 쪽을 본다. 봐도 소용이 없다. 주변을 둘러본다. 애니는 보이지 않는다.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뚝뚝 끊긴 음으로 들려오는가 싶더니 이내 자지러진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툭 끊긴다. 어디선가 빵 하는 소리가 들린다. 움찔한다. 뭔지 모르지만 몸을 바짝 스치고 지나간 모양이다. 스친 자리가 쓰려온다. 소리는 그치지 않고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한다.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다급해진다. 무작정 달린다. 게임 속이라는 것도 잊는다. 앞만 보고 뛰고 또 뛴다.
숨이 차서 더는 뛸 수가 없다. 끝이구나 생각한다. 모든 걸 내려놓는다. 뒷덜미를 잡아채일 생각을 하니 앞이 깜깜하다. 숨도 쉬어지지가 않는다. 두 눈을 꼭 감는다. 시간이 참 느리게 간다. 꼭꼭 닫혀있던 감각기관이 열린다. 웃음소리가 들릴 법도 한데 없다. 빵빵 터지던 소리도 멈춰 있다. 그제야 눈을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애니는 보이지 않는다. 게임속에 홀로 서 있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이상한 건 그뿐이 아니다. 내 보이지 않던 문이 보인다. 활짝 열려 있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더듬어보기로 한다.
‘다시 생각해보자! 난 놈의 게임 속으로 들어왔어. 그리고 놈의 공격을 받았어. 올가미로 낚아채려는 걸 내가 잡아당겼다 놓았어. 그 바람에 놈이 뒤로 벌렁 나자빠졌지. 그런 다음 놈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빵빵 터지는 소리가 이어졌어. 보이진 않았지만 스친 데가 쓰렸어.’
뫼는 자신의 몸을 움직여 본다. 여기저기서 얼얼한 기가 느껴진다. 살갗도 쓰려온다.
‘아주 피하진 못했어. 하지만 쓰러지지도 않았어. 놈이 먼저 나가떨어진 거야. 두 번째야. 마음만 먹으면 놈이 몰아넣지 않아도 게임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뜻이야. 사이버 공간이 요구하는 정보가 내 안에 모두 담겨 있어. 어쩜 세상과도 소통할 수 있을지 몰라. 아니? 소통했어. 가상세계 밖에 있는 애니와 겨루었어. 가상세계에 있는 내가. 사이버 공간이 요구하는 정보 외에 내 안엔 또 어떤 것들이 들어있는 거지? 가만히 생각을 따라가 보자! 맞아. 난 놈의 상상에 따라 만들어졌어. 놈은 날 통해 상상을 현실로 꺼내려 하고 있어. 날 이용하여. 난 통로인 거야. 현실과 가상세계를 맘껏 오갈 수 있는. 내가 놈의 상상대로 움직여주면 놈이 좋아 죽겠지. 지금까지 생각한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아. 다가 아니었던 거야. 날 버릴 수는 없을 거라는 건 더 확실해졌어.’
생각이 거기서 멈춘다.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실수도 아닌 듯하다. 자신을 숨기지도 않았다.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냈다. 애니라는 걸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귀찮을 정도로 까칠하게 굴었다. 놈도 낚이는 듯 했다. 한데 놈의 게임 속이었다. 거기서도 놈은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속을 알 수가 없다. 엉큼한 놈이다. 다른 게 또 그놈 안에 도사리고 있을 듯하다. 그렇다 해도 숨기는 게 마땅하다. 상대에게 드러낼 게 따로 있다.
‘놈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엿볼 수 있다면 엿보고 싶다.
뫼는 게임 판에서 천천히 내려온다. 문턱에 서서 다시 한 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애니는 보이지 않는다. 만 년의 구역을 향해 힘껏 달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