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달리는 동안 핸드폰은 착실하게 기계음을 내보낸다. 세상 참 좋다. 차를 세우고 묻지 않아도 되고, 이리저리 헤매지 않아도 된다.
여자의 컴퓨터는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요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변을 살핀다. CCTV가 사방에 깔려있다. 가지고 온 모자를 눌러쓴다. 그리곤 현관문까지 가서 인터폰을 누른다. 대답이 없다. 문을 당겨본다. 꼭꼭 잠겨있다.
“누구세요?”
여자가 바짝 다가와서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상한 눈빛을 하고 사정없이 굴려댄다.
“집을 잘못 찾은 거 같네요.”
얼른 빠져나온다. 뒤통수가 뜨끈뜨끈하다. 복도를 빠져나올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못한다. 하필 그 순간에 여자가 돌아올 건 또 뭐야. 여자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여러 겹의 장금장치를 부수기에는 기술이 없다. 게다가 밖에서 훤히 들여다보이는 복도식이다.
세상을 믿지 않는 여자가 싫다. 허긴 아무도 믿지 못할 세상이긴 하다.
이선은 장바구니를 든 채 눈으로 남자의 뒤를 쫓는다. 고개를 갸웃거린다. 느낌이 썩 좋지 않다. 남자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차로 가더니 휭하니 떠난다. 그 놈일지도 모른다.
장바구니를 안에 들여놓고 관리사무실로 간다. 상황을 설명하고 CCTV자료를 복사해 온다. 남자는 20여분을 머물면서 아파트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다. 그러더니 곧장 이선의 아파트까지 왔다. 아무래도 몰라서 그런 거 같지는 않다. 관리사무실측에서도 꺼림칙한지 조심하라는 안내방송을 내보낸다.
이선은 카페에 들어간다. 뫼는 들어오지 않는다. 알려줘야 하는데 자료를 올려놓을 수가 없다. 노출되면 좋을 게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가 본다.
“왜 이리 뜸했어?”
기다린 지 며칠 만이다. 며칠이었지만 이선에겐 그 시간이 꽤나 길게 느껴진다. 기다림만큼 시간을 늘여놓는 것은 없다.
“무슨 일 있으세요?” “지금 내가 올리는 자료 빨리 열어봐!”
뫼가 이선의 다급함을 읽는다. 자료가 뜨자마자 얼른 열어본다. 몇 개의 짧은 동영상으로 된 자료 속에 한 남자가 있다.
“누구죠?”
“놈들 중의 하나. 내 예감이야. 내 집을 기웃거리고 초인종을 누르더니 없다는 걸 알고 열려고 했어. 아마 내 컴퓨터를 훔쳐내고 싶었을 거야. 왜 안 그러겠어? 속이 바작바작 타들어가고 있을 텐데. 한데 놈도 정보 쪽에나 능하지 그 쪽으론 어설픈 모양이야.”
이선의 추리가 제법 그럴 듯하다. 애니가 읽었다면 간담이 서늘했을 거 같다.
“이제 삭제한다? 놈들이 보면 좋을 게 없거든.”
“희소식이요.”
“뭔데?”
“제 실력이 부쩍 자랐어요. 해킹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됐고요. 놈의 컴퓨터 안으로 들어가서 소리가 오가는 통로도 막았어요. 시간이 없어서 놈의 컴퓨터 구석구석까지는 뒤져보지는 못했어요. 흔적만 남겼죠. 아마 그 때문이었을 거예요. 오늘 보니까 프로그램을 바꿨더라고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 놈들 되게 답답하겠군. 애니민이라고 깔보다가 뒤통수 맞은 기분이겠지. 잘했어. 파이팅.”
“저도 파이팅요.”
이선은 뫼가 대견하다. 부쩍 자란 게 흐뭇하기도 하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한데 지난 번 나들이는 어땠어? 도우려고 한참 벼르고 손을 놀렸는데, 놈의 아바타가 앞을 딱 가로막더라고. 내 수준이 형편 없더라. 놈의 수준을 따라잡는 건 아직인가봐. 둘러대기라도 하려고 너를 찾았는데 왜 들어오지 않았어? 이 자료도 보여주려고 수시로 들어왔는데 니가 보이지 않더라.”
“아줌마를 끌어들일 수 없어서요.”
“그럴 거라 생각은 했어. 나들인 어땠어?”
“혼쭐이 났어요. 놈의 게임 속까지 밀려들어갔다가 겨우 빠져나왔어요.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어요. 그건 죽는 것보다 싫은데 말예요.”
“놈이 악착같이 따라붙었구나?”
“예. 절 끌어들여 판을 벌일 셈이더군요. 그걸 훔쳐내 팔아먹으려고요.”
“세상에. 인두겁을 쓰고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렇게 돈을 벌어서 뭐에 쓰려고? 벌레만도 못한 놈들.”
뫼가 씩 웃는다. 이선의 말이 속안의 찌꺼기를 훑어낸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이선이 대신하고 있는 기분이다.
“아줌마 말에 힘이 나요.”
“그래 힘 내. 나도 찾아보고 있어. 워낙 아득한 분야라서 내 힘이 미치지 못해서 그렇지. 조심하고. 여기까지 온 걸 보면 포기할 놈들이 절대 아니야.”
“알고 있어요. 그래서 피할 수가 없어요. 꼭 해낼 거예요.”
“그래. 꼭 해 내!”
“그럴게요.”
뫼는 잠시 사진 속 남자를 떠올린다. 체격은 있지만 말끔하게 생겼다. 아바타와도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우락부락할 거라는 생각은 깔끔하게 빗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