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들이민다. 아니 빨려간다. 한데 이상하다. 몸이 서늘하다. 아니, 주변이 서늘하다. 놈의 아바타가 노려보고 있다. 눈에서 불꽃이 튀고 있다. 재빨리 달아난다. 요리조리 몸을 숨기며 빠져나간다. 하지만 놈도 바짝 거리를 좁히며 따라온다. 주변을 휘 둘러본다. 이선은 보이지 않는다. 짠~ 하고 나타나서 뒤를 한 방 내려춰 주기라도 하면 놈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이선이 나타나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한데 이선은 나타나지 않는다. 놈은 드세게 뫼를 몰아붙인다. 하나였던 놈이 어느 새 둘 셋······으로 한없이 늘어나고 있다. 놈들을 뚫고 나가는 건 어려워 보인다. 뒤를 돌아본다. 문이 보인다. 얼른 문으로 들어간다. 낯이 익다. 생각이 난다. 이든이 언젠가 열어서 보여줬던 그곳이다. 뭐하라는 뜻인 줄 몰라서 고개만 갸웃거리다 빠져나왔었다. 한데 그 속으로 들어왔다. 몸을 숨길 곳을 찾는다.
“어리석은 놈. 뛰어봐야 내 손바닥 안이지. 으하하하.”
아찔하다. 눈앞이 깜깜하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다. 놈의 아바타가 칼을 들고 좁혀 들어오고 있다. 몸이 얼어붙는다. 찬바람이 쌩하다. 한데도 몸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있다. 가까스로 몸을 피한다. 놈이 돌아서더니 히죽 웃는다. 칼을 쥐고 다시 좁혀온다.
“놈이 구석으로 몰렸어. 서둘러!”
“누가?”
“통로.”
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뛰어가는 발걸음 소리에 이어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들려온다.
“드디어 가상세계로 나왔어. 이번에 놓치면 안 돼!”
“맨 손이잖아?”
“그럼? 지금 칼을 쥐어주면 안 되지.”
“어쭈? 펄쩍펄쩍 잘도 피하는데? 니가 매달린 게 이거였어?”
“그럼? 내가 괜히 매달린 줄 알아?”
득의양양하다.
“지금부터가 진짜야. 게임은 시작일 뿐이야. 이건 적응 훈련이야. 거친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치르는 신고식.”
‘게임이라고? 이게 게임이라고? 그럼 이겨야 해. 그래야 빠져나갈 수 있어.’
뫼가 몸을 애니에게로 돌린다. 애니의 칼을 피해 몸을 이리저리 피한다. 칼을 빼앗을 생각으로 가득하다. 애니의 허점을 노려보기로 한다. 애니가 배시시 웃는다. 허연 이가 드러난다. 섬뜩하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주제에 감히?”
모골이 송연하다. 애니가 빠져나갈 틈을 막아선다.
‘놈이야. 놈이 키를 쥐고 조종하고 있어. 빠져나가야 해. 다들 걱정하고 있어. 어떻게든 여길 빠져나가야 해.’
“그런 걱정은 할 거 없어. 다들 마법에 걸렸거든?”
또 다시 애니가 배시시 웃는다. 심장이 칼로 도려내듯 아프다. 뜨거운 피가 솟구치는 듯하다.
‘놈이 내 생각을 읽어내고 있어. 생각도 하면 안 된다는 뜻이야. 생각을 비우자! 몸에 의지하자!’
한 발 한 발 다가간다. 생각은 다가오기 무섭게 잘라낸다. 애니를 노려본다. 애니가 칼을 휘둘러 위협한다. 겁을 주려 한다. 무시하고 바짝 다가간다. 애니가 뒤로 비실거리며 물러선다. 칼을 쥔 손이 쳐지는 게 보인다. 얼른 다가가 팔을 비틀어 쥔다. 아야 소리도 없다. 칼을 빼앗아 든 후 확 밀쳐버린다. 두 번째 세 번째 놈들도 어렵지 않다. 가까스로 문을 찾아 밖으로 나온다. 무장한 애니의 아바타들이 에워싸고 있다. 몸을 휙 날린다. 그리곤 냅다 내달린다.
들과 아미, 버들, 누리, 이든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가볍게 솟구치던 몸이 돌덩이를 등에 진 것처럼 무겁다. 발걸음이 마음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뒤에선 애니의 아바타들이 맹렬하게 쫓아오고 있다. 안간힘을 다해 달린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문이 보인다. 쉼 없이 발을 엇갈려 움직인다. 손이 문에 닫는 게 느껴진다. 몸이 스르르 빨려 들어간다. 그리곤 픽 쓰러진다.
“뫼! 여기 쓰러져 있으면 어떻게 해? 다른 구역으로 나가본다 했잖아?”
다들 뫼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온다. 뫼는 눈을 감은 채 비지땀을 흘려댄다.
“갔다 왔어.”
가까스로 그 말만 뱉어낸다. 힘을 죄 써버린 몸이 흐늘흐늘하다. 몸을 움직이는 것도 버겁다.
“언제?”
더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몸부터 추스르고 싶다. 눈을 감는다. 생각이 멈춘다. 모든 게 죽은 듯이 조용하다.
다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뫼를 들어 침대로 옮긴다. 이선과 맞섰던 그 때가 떠오른다.
“우리가 그 때처럼 마법에 걸렸었던 건가? 그 때와 비슷해.”
버들이 시무룩하게 말한다.
“그랬을지도 모르지. 예전에도 느끼지 못했었잖아. 그 때도 뫼만이 느꼈어.”
“그렇담, 이번에도 맞섰다는 뜻이잖아. 몸이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있었어. 힘을 죄 썼다는 거 아냐? 먹여야 해.”
아미가 뫼의 상태를 진단한다. 아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누리가 몸을 돌린다.
“왜?”
“어제 잡아 온 토끼 구우려고. 열매가지곤 안 돼!”
누리가 밖으로 뛰어나간다. 이든도 뒤따라 나선다.
“그 놈이야. 그 놈의 아바탄가 뭔가야. 몸싸움이라도 했나? 돌아온 걸 보면 움직일 수는 있었다는 거잖아? 한바탕 웃어댔겠군.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아미가 귀를 틀어막는다. 들은 애니를 생각한다. 사람의 탈을 쓴 것도 아니다. 사람이다. 돈이라는 것도 생각해본다. 그게 뭔지도 알 수가 없다. 만 년의 생각으론 가 닿을 수가 없다. 뫼를 침대에 남겨 두고 컴퓨터로 다가간다.
씩씩대는 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주먹으로 쾅쾅 내려치는 소리가 들여온다.
“놈 하나를 따라잡지 못해? 병신 같은 놈들. 내가 지들을 만드느라 밤잠을 얼마나 설쳤는데? 떼려죽일 놈들. 허깨비처럼 그게 뭐야?”
애니가 욕을 해댄다. 분이 풀리지 않는지 말끝에 다시 주먹을 내리친다.
“짜릿하더라. 이젠 니 말에 토 달지 않을게. 가상세계로 이끌어내기만 하면 니 말대로 돈뭉치가 줄에 매달려 들어오고도 남을 거 같아. 성깔 그만 부리고 놈을 끌어낼 방법이나 쥐어짜내 보자!”
꿈속을 헤매다 온 느낌이다. 뫼를 놓치고도 아깝다는 생각이 없다. 다시 끌어내기만 하면 된다. 애니라면 해내고도 남을 사람이다.
애니는 이를 바드득 간다. 주먹을 꽉 움켜쥔다. 아바타 군단을 풀어놓으면 빠져나가지 못할 줄 알았다. 한데 보기 좋게 당하고 말았다. 억세게 운이 좋은 놈이다. 어떤 운이 뫼를 도와준 것인지 궁금하다. 여자는 아니다. 꼼짝 못하게 막아냈다. 맞설 수준에 올라와 있지도 않았다. 놈 스스로 해낸 것이다. 어떻게?
뫼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다. 누리와 이든이 발라주는 고깃덩어리를 냉큼냉큼 받아먹는다. 살려면 어쩔 수가 없다.
“놈은?”
고기를 씹으면서 묻는다. 다른 무엇보다 그게 제일 궁금하다.
“이를 갈고 있어. 놈을 만났던 거였어?”
“놈의 아바타들. 몰려서 문이 보이기에 들어갔는데 놈의 아바타가 뒤따라 들어오더라고. 칼을 쥐고 나에게 덤볐어.”
“그래서?”
다들 가슴을 졸이며 묻는다.
“피했는데, 그 다음이 잘 생각이 안 나.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문이 보여서 죽어라 뛰었던 것은 생각나는데, 가운데 부분이 영 떠오르지 않아.”
“다시 나갈 거야?”
“그래야겠지?”
“겁나지 않아? 놈이 이를 갈고 있는데? 놓친 게 분한지 욕까지 퍼부어대더라.”
들이 뫼의 생각을 돌려볼 생각에 사실대로 말한다.
“겁? 안 난다면 말이 안 되지. 나도 목숨이 붙어있는 생명체인데. 사자에게 쫓기는 토끼도 그건 느껴. 그러니 죽을 둥 살 둥 달리는 거겠지. 잡히지 않으려고. 나도 다르지 않아. 겁이 나니까 내 몸이 알아서 피하고 달리고 있더라. 그게 막히는 거 같으니까 식은땀까지 흘리고. 그렇다고 길이 거기밖에 없는데 물러설 수는 없어. 토끼도 사자의 밥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 굴 밖으로 나가 풀을 뜯어 먹어. 안전한 굴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는 것보다 그렇게 하는 게 살 가능성이 높으니까. 니들이 나라고 해도 그럴 거야.”
뫼가 애써 미소까지 지어 보인다. 마음이 흔들리는 걸 보여선 안 된다 생각한다.
“알아. 자신 있어? 겁나는 걸 밀어내고 놈들과 맞설 자신.”
“없다면 끌어내야지.”
그제야 들이 미소를 짓는다.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온 뫼가 안쓰러우면서도 반갑다.
“널 믿어. 호랑이를 잡아야 한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하겠지? 그게 밖에서 기다리다 덮치는 것보다 가능성이 더 높겠지.”
“이 안에선, 가능성이 너무 낮아. 꼼지락거리는 것밖에 되지 않아. 놈의 컴퓨터에 다가가려면 그 길밖에 없어. 위험하긴 해도 거기엔 희망이 있어.”
“놈의 아바타가 문제야. 놈들을 따돌리는 건 쉽지 않아 보여.”
들이 애니의 아바타로 생각을 옮긴다.
“아줌마한테 도움을 청하면 어때?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놈이 이미 눈치 챘어.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막아대는 거 같더라. 아줌마를 끌어들이는 건 하지 말자! 우리 때문에 위험에 빠지는 것은 원치 않아.”
뫼는 이선을 떠올린다. 정신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몸이 받쳐주지 않으면 오래 버틸 수 없다. 글을 쓰는 것도 벅차 보인다.
“놈들이 뭐하고 있는지 들어볼까?”
“그래. 마땅히 할 것도 없잖아.”
후르륵 쩝쩝 소리가 난다. 점심이라도 먹고 있는 모양이다.
“흥. 컴퓨터를 켰다 이거지?”
비위가 잔뜩 뒤틀린 말소리가 넘어온다. 뭘 먹으면서도 귀는 컴퓨터에 닿아 있나 보다.
“통로? 염탐이라도 할 모양인가 보지?”
“제깟 놈이 그래봤자지. 깝죽대는 게 미련이 있긴 있나 보군? 제깟 놈이 별수 있어? 사람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는데.”
속이 울컥한다. 사람의 유전자라면서 사람대접은 해주지 않는다. 속이 뒤틀린다.
“얼른 먹고 치우자! 이번엔 놓치지 말아야잖아.”
소훈이 뫼가 금방이라도 들어올 것처럼 급하게 서두른다.
“그럴 거 없어. 오늘은 아냐. 니 말대로 염탐이야. 우리 움직임을 살피는 중이라고. 아무리 간덩이가 부었다 해도 앞뒤 안 가리고 날뛸 놈은 아니야.”
“그걸 어찌 장담해?”
“내가 만들어냈어. 내 손으로 만들어냈다고? 한데 모르겠어?”
소훈이 도로 소파에 주저앉는다. 소파에 몸을 푹 파묻고 애니를 본다. 애니는 닭다리를 쥐고 뜯고 있다. 먹는 건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다. 눈 코 입도 그냥 사람이다. 조물주가 만들어내면서 머리만 정성을 쏟은 듯하다.
“늙지 않게도 할 수 있다고 했어.”
소훈이 지난 번 했던 이균의 얘기를 끄집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