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가 밖으로 나가려는 누리와 이든의 손을 꽉 움켜쥔다. 말로가 아닌 몸으로 전해주고 싶다. 누리와 이든의 가슴에 뜨거운 게 스며든다. 이내 눈시울까지 번져간다.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고 들만 남게 되자 뫼는 이선의 카페로 들어간다. 이선은 카페에 글을 올리는 중이다.
“작업하는데 방해가 되면 나중에 들어올까요?”
“아냐. 글 올리는 건 잠깐이면 돼. 잠깐만 기다려! 얼른 글만 올리고 올게.”
이선이 작업창으로 돌아간다. 자판 두드리는 소리와 마우스 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잡힌다.
“아줌만 50대라고 했지? 우리보다 갑절을 더 살아내셨네.”
“지금은 어떤 글을 쓰고 계실까? 드라마 같은 이야기? 아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
“글쎄?”
뫼와 들이 주고받는 사이 이선이 글을 올리고 돌아온다.
“잠깐이었지?”
“예. 늘 바쁘게 사시나 봐요?”
“늘? 바쁘게? 뒹굴뒹굴하는 시간도 많아.”
“산에도 가고 운동도 하시잖아요.”
“그러긴 하지. 밭에 가서 풀을 뽑기도 하고. 그래도 시간이 모자라진 않아. 얽매임이 없으니까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시간도 움직여줘. 싫증나면 빠져나가서 빈둥거리기도 하고. 잘 지낸 거지?”
“잘 지내지 못했어요.”
말이 모래알을 굴리는 것처럼 버석거린다.
“왜?”
이선이 놀라 바짝 캐 묻는다.
“놈들이 소리통로를 뚫었어요.”
“소리통로를 뚫다니?”
“우리 말소리를 놈들이 들을 수 있게 됐어요.”
“생각보다 빠르군.”
“우리 컴퓨터 위치도 알아냈어요.”
“물론 그랬겠지. 놈들이 불물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데 수가 있겠어? 그래도 길은 있을 거야. 지금까지 잘 버텼잖아. 그러니 너무 낙심하지 마!”
“예. 누리가 차라리 굶어죽자 하더라고요. 웃음거리가 되어 사는 건 싫다고요.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어요. 한데 그러자고 맞장구를 칠 수가 없더라고요. 살고 싶은 마음을 밀어낼 수가 없었어요. 살고 싶어서,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참기로 했어요.”
뫼가 응석을 부린다. 눈물이 흘러 코맹맹이 소리가 난다. 이선도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잘 했어. 그래 뭘 먹었어?”
“예. 컴퓨터를 죄 끄고 숲에 가서 토끼 두 마리를 잡아다 든든하게 배 채웠어요. 그러고 나니까 살겠더라고요. 몸이 활짝 깨어나더라고요. 용기도 살아나고. 끼니를 거르면 몸도 죽음을 느끼게 되나 봐요.”
“그럼? 먹지 않고 무슨 수로 버텨? 몸이 제일 먼저 느낄 걸?”
이선은 뫼가 안쓰럽다. 맘 같아선 먹을 걸 잔뜩 만들어 보내주고 싶다. 하지만 할 수가 없다. 할 수 있다고 해도 참아야 한다. 애니민들의 삶이다. 더는 작가로 끼어들어 휘두를 수가 없다. 스스로 살아내야 한다. 그러기로 마음을 굳혔다.
“가상세계로 나가보려고요.”
“가상세계로 나가다니? 가상세계에 살고 있잖아?”
“아줌마가 집 밖으로 나가듯 여기서도 가상세계의 다른 곳을 돌아다닐 수도 있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만 년으로 설정된 울타리 안이잖아요. 그 밖으로 나갈 수가 있어요. 놈의 머리가 거기까지 미쳤더라고요.”
“섬뜩한 얘기구나.”
이선이 진저리를 친다. 놈의 상상력의 끝을 알 수가 없다.
“놈의 아바타가 바짝 따라붙는데 마음이 오그러붙더라고요. 놈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줄 알았거든요. 그래도 나가보려고 했어요. 한데 겁이 나서 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랬더니 이틀을 끙끙 앓더라고요. 놈의 손이 거기에도 미쳤나 봐요.”
“죽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겠구나?”
“예. 한데 그게 더 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떨치고 일어났어요.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생각해보니 가상세계에서는 아바타보다 제가 훨 유리하더라고요.”
뫼가 이선을 안심시킨다.
이선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애니의 상상이 어디에서 멈출지 알 수가 없다. 그게 끝이 아닐 것만 같다. 불안하다. 애니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지만 단단하게 여며 틈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녀의 상상이 놈의 상상을 따라잡지 못한다. 상상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한데 애니라는 복병을 만났다. 놈의 상상력 또한 만만치가 않다. 그의 상상을 따라잡을 방법을 생각한다.
“잠깐. 만 년의 밖으로 나가는 것은 하루만 더 참아!”
“왜요?”
“작가로 니들을 돕는 건 안 할 거야.”
“그러고 있잖아요.”
“그래. 앞으로도 그럴 거야.”
“한데 왜요?”
이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아줌마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지금 막 생각났어. 하루면 충분해. 그러니 오늘은 참아. 지루할 거 같으면 들이랑 밖에 나가 거닐어보든가. 그럼 시간이 더디 가지는 않을 거야. 난 이제 빠져나간다?”
이선이 빠져나간다. 뫼와 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아줌마가 뭘 하려는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그러게. 우리를 돕겠다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돕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어. 그리고 하루면 충분하다잖아.”
“어쨌든 기다려보자! 내일은 알게 될 거 아냐.”
“컴퓨터 끌까?”
“아냐. 놈들 얘기 좀 들어보자!”
“아참! 깜빡했어. 놈들의 꿍꿍이를 물어보고 싶어서 들어갔는데. 아줌만 그쪽 세계를 많이 아니까 혹시나 해서.”
뫼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맞아. 놈들의 속을 꿰뚫어보는덴 아줌마가 우리보다 나을 텐데 말야. 그 생각을 못했어. 아줌마하고 니가 주고받는 말만 열심히 귀 기울여 듣고 있느라고 깜빡했어. 잠깐! 어떨 때 속을 다 까보이지? 자신감이 있을 때? 미끼를 던질 떄?”
“알았어.”
뫼가 무릎을 탁 내려친다.
“두 가지 가능성 다야. 자신감은 이미 드러낼 대로 드러냈어. 미끼야. 날 만 년의 구역 밖으로 끌어낼 생각에서야.”
“그럼, 나가면 안 되잖아.”
“아니? 나가야 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해. 놈이 도사리고 있기는 하지만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 곳은 그 곳뿐이야. 현실은 아줌마와 놈들뿐이야. 아줌마도 놈들도 현실을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물론 명령으로 아바타를 움직일 수는 있겠지만. 아줌마가 하루만 참으라는 말이 뭔지 이제 알겠어.”
“뭔데?”
“그건 내일 확인하자. 놈들이 듣고 있어. 외출했다면 다행이지만. 아줌마가 잘 해내야 할 텐데?”
뫼는 이선을 떠올린다. 가냘프다. 누가 툭 치기라도 하면 휘청거리지도 않고 쓰러질 거 같았다. 그런 그녀의 정신력이 상상력 못지않게 대단한 모양이다. 겁을 내지도 않고 시원스럽게 뜻을 굳힌다.
이선은 인터넷 창을 열고 꼼꼼히 자료를 읽어간다. 이틀이나 끙끙 앓았다는 뫼가 떠오른다.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 눈시울까지 촉촉해진다. 눈물이 콧속으로 흘러든다. 숨구멍이 좁아진다. 훌쩍인다.
‘망할 놈들. 생명을 가지고 장난을 쳐? 돈 벌 게 없어서 사람의 생명이야? 나쁜 자식들! 그러고도 양이 안 찬다는 거지? 두고 봐! 사람을 잘못 건드리면 어찌되나?’
말이 앙다문 이빨 사이로 새어나간다. 분이 묻어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겉모습은 사람의 손으로 그려진 그림이지만 안은 고스란히 사람이다. 사람의 유전자가 온전하게 작용하고 있다.
자료를 여러 번 읽고 난 후 간추려 적는다. 그런 다음 작업에 들어간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손을 대긴 전에는 어렵게만 생각됐던 일이다. 자료에서 추린 순서대로 따라하다 보니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끝이 난다.
‘놈이 놀라 자빠지겠지? 여자라고, 아줌마라고 얕봤다 이거지? 아줌마도 맘만 먹으면 해낼 수 있다는 걸 내일이면 알게 되겠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릿발을 내리게 할 수 있는데 이까짓 것쯤이야. 한 번 된통 당해봐라, 자식들아.’
고소하고 흐뭇하다. 내일이 기다려진다. 뫼의 표정도 궁금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는 것에 스스로가 대견하게 여겨진다. 정보기기에 빠삭하진 않지만, 구닥다리 핸드폰을 아직도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맹물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핸드폰이야 갈아치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시대를 따라잡고 싶진 않다. 따로 흘러가도 어느 지점에 이르면 다시 만나게 된다. 마음만 먹으면 그건 어렵지 않다.
야릇하다. 누군가를 위해서 발 벗고 나설 수 있다는 게 설렌다. 50을 넘어서도 감정은 무뎌지지 않았다. 다스림을 받는 것에 익숙해졌을 뿐이다.
컴퓨터를 끄고 밖을 내다본다. 밖은 온통 어둠뿐이다. 자정을 지난 지도 꽤 오래인 거 같다. 시계를 보지 않고 잠자리에 든다. 뜬눈으로 시간을 견뎌낸다. 희뿌연 빛이 고여 들 때쯤 눈이 감긴다. 오래 감겨 있지도 못한다. 두어 시간을 잔 거 같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컴퓨터로 달려간다. 아직은 다들 잠잠하다. 뫼가 너무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쬐끔 마음이 쓰인다.
뫼는 이선을 생각한다. 마음이 들뜬다. 마주치면 슬쩍 놀란 시늉이라도 해줘야 할 거 같다.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준다. 누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가상세계가 자신을 알아서 빨아들인다. 거기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 눈을 꼭 감는다. 검지손가락이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