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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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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목숨을 건 맞섬14


BY 한이안 2015-11-19

뫼는 다시 인터넷 속으로 들어간다. 잔뜩 긴장을 해서인지 손놀림이 무디다. 겁이 난다. 애니가 따라붙었을 때 잽싸게 달아나야 한다. 한데 잔뜩 움츠린 몸이 굼뜨게 움직인다. 애니를 따돌리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래 거침없이 나설 수가 없다. 주변만 얼쩡거리다 얼른 방어벽 안쪽으로 기어든다.

애니는 웹캠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화면은 망가져서 먹통이다. 소리도 넘어오지 않는다. 한데 이상하다. 미미하게 뭔가가 잡힌다.

맙소사.”

화들짝 놀란다. 길이 한쪽만 막혀 있다. 그동안 자신들의 말소리가 죄 애니민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놈들에게 속속들이 다 까발린 셈이다. 하지만 멍 때리고 있을 때는 아니다. 얼른 손을 쓴다. 그래도 죄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다행이다. 가는 길이 있으면 오는 길도 뚫을 수 있다. 다시 손놀림이 빨라진다. 막혀있던 길이 뻥 뚫린다. 애니가 깔깔 웃는다.

웃음소리에 애니민들이 움찔한다. 재잘거리며 주고받던 말소리가 뚝 끊긴다.

내숭은? 다 듣고 있었으면서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이거지? 애니민 주제에 니들이 날 얕봤어?”

간들거리는 비아냥거림이 온몸을 자극한다. 얼음을 만지고 있는 것처럼 소름이 돋는다. 어찌 해야 할지 막막하다. 뫼도 얼어붙어 있다. 덜덜덜 떨고 있다.

!”

들이 정신을 차리고 뫼에게 도청장치를 차단하라고 소리 죽여 말한다. 뫼가 도청장치를 삭제한다. 하지만 다시 생성된다. 뫼가 마우스를 쥐고 거칠게 눌러댄다. 그래봐야 그때뿐이다. 뫼가 마우스를 손에서 놓는다.

? 그새 지쳤나? 싱겁기는? ㅎㅎ.”

애니의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흐느적거리며 몸을 긁어댄다. 뫼는 이선의 당부를 떠올리며 흔들리지 않으려 애를 쓴다. 애니를 떠보기로 한다.

돈줄이 끊겨서 힘이 빠지지 않았나? 그렇게 굼떠서야 언제 돈줄을 이을 수 있겠어?”

어라. 날 건드리겠다고? 돈줄을 입에 올리면 내가 약이라도 오를 줄 알았나? 천만에. 돈줄이 끊겼다고 지금 당장 굶어죽는 것도 아닌데 뭘? 통장에 남아있는 게 제법 될 걸? 밥 사 먹고, 피자며 치킨도 사 먹고, 돈 때문에 주릴 일은 없지? 난 잠은 굶어도 먹는 건 못 굶거든. 먹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데.”

애니가 말끝에 입맛을 다신다. 뫼는 얼굴을 찡그린다. 잘못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내친김이다. 한 번 더 건드려보기로 한다.

아직은 여유가 있다? 언젠가 바닥 날 날이 오지 않겠어? 낼모레 저승사자 따라갈 나이도 아닌데.”

그 전에 널 손에 넣으면 되지 않겠어? 내 머리가 아직은 제법 돌아가는데.”

아무리 긁어대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 아얏 소리도 없다. 빠져나오기로 한다. 잘못 하다간 말려들 수도 있다. 거기까지 가는 건 위험하다.

으하하하······.”

뫼가 꽁무니를 보이자 애니가 자지러지게 웃는다. 애송이한테 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온 몸이 짜릿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는다. 웃음이 가라앉기 바쁘게 뼈아픈 현실이 고개를 든다. 그게 뼛속 마디마디까지 쑤셔댄다.

약아 빠진 놈. 위험을 감지했다 이거지? 제깟 놈이 사람 흉내를 내겠다 이거지? 감히 조물주인 내 앞에서?”

이를 바드득 간다. 곱씹을수록 괘씸하다. 돈뭉치가 주렁주렁 달려올 참에 돈줄이 끊긴 것도 속이 아리다. 마우스를 이리저리 굴린다. 인터넷 창을 띄운다. 아바타들을 불러내 명령을 내린다. 입맛이 씁쓸하다. 그래도 눈빛은 살아 있다. 아바타들의 움직임을 눈여겨본다. 뫼가 걸려들기를 학수고대한다.

아바타 하나를 만 년의 문 쪽으로 보낸다. 문은 꽉 닫혀있다. 열릴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한 번 당하더니 되게 놀란 모양이군. 그래도 다시 나오겠지. 니가 안 나오고 배겨? 어림도 없지.’

애니는 이균의 스물한 살 때를 떠올린다. 밝고 해맑은 젊은이였다. 책임감도 강하고 정도 많았다. 그는 뫼에게서도 그걸 본다. 그래서 확신한다. 그렇게 주저앉을 뫼가 아니라고.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고 싶어 하는 숭고한 마음이 이미 자리를 잡았다. 돌이킬 수도 없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죽음이다. 지금쯤은 그걸 서서히 느끼고 있을 터다. 제깟 놈이! 제깟 놈이 무슨 수로 버텨. , 하고 콧방귀를 뀐다. 놓친 게 아리긴 하지만 한 편으론 은근히 기대가 된다.

뫼는 문을 여는 게 두렵다. 피하고 싶다. 화면을 모두 닫고 침대로 가서 드러눕는다. 생각을 끊어내고 잠속으로 달아나려 한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다. 몸이 뜨거워진다. 이틀을 끙끙 앓고 나서야 몸을 일으킨다.

안 돼! 몸이 불덩이야.”

들이 일어나려는 뫼를 도로 눕힌다. 뫼가 들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녀의 손에 몸을 맡긴다. 이든과 누리, 버들과 아미가 흐릿하게 눈에 들어온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차츰 눈빛이 살아난다. 흐릿하던 것들이 또렷해진다. 얼굴빛이 다들 어둡다. 뭔가 낌새를 챈 거 같다. 고개를 돌린다.

차라리 죽자! 알고서는 놈들의 꼭두각시놀음 못하겠어. 웃음거리가 되며 사는 것도 못하겠고. 들 말이, 니 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프로그램이 설치돼 있는 거 같다 했어. 넌 그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거라 했어. 너한테 주어진 그 모든 혜택은 바로 그 프로그램을 돌리기 위한 밑작업이었을 거라고. 이미 니 몸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고 있어. 그걸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우리 힘으론 안 돼! 그러니 차라리 죽자!”

누리답지 않게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이다. 목소리도 짜증이나 분노가 담겨 있지 않다. 속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다. 뫼는 어쩜 그게 진짜 누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장난기를 확 내던진다. 그냥 물러나 씩씩거리지도 않는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다. 그리곤 누구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말로 깔끔하게 정리를 한다.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그때마다 누리가 다시 보인다.

뫼는 눈을 질끈 감는다. 애니의 자신감에 그득한 웃음이 귀청을 때린다. 마음이 뒤틀린다. 다시 몸을 일으킨다. 들이 손으로 일어나지 못하게 뫼를 내리누른다. 그는 들의 손을 밀어낸다.

괜찮아.”
괜찮긴? 몸에 불기운이 가득한데.”

괜찮아. 열이 내리고 있잖아.”

들이 뫼의 이마를 손으로 만져본다. 열이 내리고 있는 게 느껴진다.

천벌을 받을 놈들! 벼락을 맞을 놈들!”

들이 분노를 삭일 수 없는지 거친 말을 입에 올린다.

놈은 만약의 경우까지도 생각했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놈이야. 아줌마가 말한 돈에 눈 먼 인간이 바로 그 놈이야. 사람의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어. 남의 고통 같은 걸로 아파할 놈이 아니야. 이젠 일어날래. 놈이 짜놓은 꼼수에 걸려드는 거라 할지라도 맞서볼래. 처음부터 그러기로 했잖아. 맞서서 우리 몫의 삶을 온전하게 되찾기로 했잖아. 그렇게 여기까지 온 거 아니었어? 적어도 난 그랬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니들 둘만 그런 건 아니야. 우리도 그래. 우리라고 별 수 있는 줄 알아? 누구의 간섭이나 참견 없이 제 몫의 삶을 살아내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어. 멀쩡한 생각을 가지고서 누가 시키는 대로 하며 살고 싶겠어. 꼭두각시도 아니고. 그럴 바엔 누리 말대로 죽는 게 낫지.”

이든은 고개를 푹 수그린다.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뫼를 대신해 뭐라도 할 수 있다면 옹골차게 들이댈 수가 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철저히 뫼의 몫이다. 뫼에게 떠밀면서 말까지 설쳐댈 수가 없다. 그게 쓰리고 아프다. 그렇다고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만도 없다.

다들 같은 생각이야. 좀 버겁긴 하지만 한 번 맞서볼래. 놈도 사람이야. 어딘가 느슨한 구석이 있을 거야. 다행인 건 놈들이 둘로 갈렸다는 거야.”

다시 뭉칠 수도 있잖아.”

그럴 가능성은 적어. 갈라섰다는 건 원하는 게 서로 다르다는 뜻이거든. 설령 뭉친다 하더라도 삐걱거릴 수밖에 없어. 서로 다른 걸 꿈 꿀 테니까.”

그럼 니 말대로 다행이긴 한데?”

자신이 없다. 앞을 내다봐도 깜깜해서 보이는 게 없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 어둠 속에서 반짝거릴 뿐이다.

컴퓨터는 모두 꺼놨지?”

. 니가 꺼놓으라고 해서 다들 꺼놨어.”

그래야 돼. 컴퓨터마다 망과 연결돼 있어. 그걸 켜놓으면 우리들이 주고받는 말이 고스란히 놈들에게 넘어가. 아무리 막아도 다시 뚫리는 거 봤잖아. 배 좀 채우자! 숲에 다녀올까?”
뫼는 이든과 누리를 쳐다본다. 토끼든 뭐든 잡아서 푸짐하게 차려놓고 둘러앉아 근사한 저녁을 먹고 싶다.

나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니 입에서 그 말 나온 게 처음이라는 건 알아? 맨 날 내 몫이거나 내 입에서 먼저 나왔는데 말이야.”

누리가 놀림조로 말한다. 뫼가 자리에서 툴툴 털고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