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어떻게 알아냈어?”
뫼의 말에 이선의 온 신경이 곤두선다.
“놈들의 말소리가 죄 들려요. 놈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거 같아요.”
뫼의 목소리가 철심이 박힌 것처럼 단단하다.
“도대체 놈들이 어디까지 손을 댄 거야? 어쨌건 더는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게 좋겠다. 이쪽 분야는 빠삭한 놈들일 거야.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다보면 놈들 수중에 니들의 정보가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아.”
“새겨들을 게요. 그리고 하나만 더 물을게요. 들을 사랑하는 게 틀림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는? 니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해야지. 나머지는 니가 생각해내. 영 모르겠거든 드라마를 보는 것도 괜찮아. 거기엔 사랑이 널려 있거든. 사랑이 빠져있는 드라마는 아주 드물어. 물론 가공된 사랑이긴 하지만 도움이 될 수도 있어.”
이선이 그 말을 남기고 빠져나간다. 뫼는 이선의 말을 곰곰 새겨본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라. 하지만 쉽지가 않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라면 가서 누리를 두들겨 패주고 싶다. 들을 끌고 와 옆에 앉혀놓고도 싶다. 한데 둘 다 바람직한 마음은 아닌 거 같다. 주워들자니 꺼림칙하다. 그건 바로 내려놓는다. 드라마를 보기로 한다. 가입해둔 방송국 사이트로 들어간다.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빼곡하다. 그런 건 눈으로 대충 훑어보고 넘어간다. 드라마들을 모아놓은 방으로 들어간다. 드라마 제목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다. 제목 앞에서 망설인다. 뭘 볼지 바로 골라내지 못한다. 그에게는 정보가 하나도 없다. 모두가 생소하다. 인터넷에서 알아본 드라마에 대한 정보가 다다.
인터넷에서 알아본 드라마에 대한 설명은 썩 맘에 들지 않는다. 현실이 반영되어 있긴 하지만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해 작가의 머릿속에서 가공되어 나온 현실이다. 현실을 기초로 하고 있지만 허구적으로 꾸며진 것이다. 한데 현실보다도 그 허구에 사람들이 매달린다. 2013년의 현실이 어떤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 허구에 빠져든다. 자신도 다르지 않다. 2013년의 현실을 기억하지 못하니 현실과 허구를 또렷하게 선을 그어 구별해 낼 수는 없다. 하지만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현실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허구가 감싸고 있다. 보이지 않는 현실은 사람을 아프게 한다. 그에 반해 현실을 감싸고 있는 허구는 촉촉하거나 달달하다. 때론 거칠어지게도 한다. 촉촉하거나 달달한 것은 바로 반응이 온다. 하지만 아픔은 곱씹어야 한다. 그가 드라마를 보고 내린 결론이다. 그래도 가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땐 드라마만한 게 없을 거 같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드라마가 주는 대로 반응만 하면 되니까.
제목을 훑어보고 나서 하나를 고른다. 허락을 받아서인지 더는 막힘이 없다. 마우스를 누르자 드라마 창이 화면 가득 퍼진다. 시선을 화면에 고정시킨다. 생각을 잘라내서인지 쉽게 드라마에 빠져든다. 인물들은 현실과 다름없이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는 사라지고 없다. 허구라는 생각 자체가 잘려나가고 없다. 오직 드라마의 인물들만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뒤죽박죽 들린다. ‘뭐야?’, ‘왜 우리는 들어갈 수가 없는 거야?’ 하는 소리들이다. 하지만 드라마에 빠져 그것도 잡아내지 못한다.
“야, 너 혼자 뭐하고 있어?”
“뭐긴? 드라마 보고 있고만.”
그제야 뒤돌아본다. 다섯이 몰려와서 그의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다들 얼이 빠진 표정이다.
“너도 우리가 없는 데선 흠뻑 빠지기도 하는구나?”
누리가 비아냥거린다. 혼자만 보고 있는 게 아니꼬운 모양이다.
“한데 왜 우리는 주민번호가 없는 거냐? 왜 너한테는 있는 게 우리한테는 없냐고?” 누리가 뫼에게 엉뚱한 걸 들이대며 따진다. 뫼는 어이가 없다. 잠시 멍해진다.
“그걸 내가 어찌 알아?” “허긴? 너나 나나. 한데 뭘 보고 있는 거야? 그것도 푹 빠져서.”
“뭐긴? 드라마지. 우문에 우답이다. 알았냐?”
뫼가 톡 쏘아붙인다.
“넘어가고, 왜 보고 있는데?”
“그걸 보면 사랑이 뭔지 알 수 있다고 해서.”
“야, 너 사랑이 뭔지 몰라?” 버들이 아는 척을 한다.
“넌 아냐?” “알지.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옆에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마음이잖아. 달달하기도 하고 애간장을 태우기도 하고. 뭐 그런 것들 아냐?”
“나도 그건 알아.”
“그럼?”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거지?”
“그게 왜 궁금한데?”
뫼가 우물거릴 뿐 말을 못한다. 둘이 입씨름을 하는 동안 아미와 들, 이든과 누리는 화면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있다.
“야, 이거 되게 재미있다?”
“이게 바깥세상이야?”
“세상에, 이게 다 뭐야?”
“바깥세상이 이렇게 멋졌어? 나 돌아갈래.”
다들 한시도 입을 가만히 놔두지 못하고 말을 쏟아낸다. 버들도 뭔가 하여 고개를 들이민다.
“세상에. 딱 내 마음이다. 2013년이 이렇게 멋진 세상이었어?”
다들 뫼는 안중에도 없다. 자신들이 왜 몰려왔는지도 잊는다. 얼마 전에 접해본 세계라는 것도 머릿속에서 잘려나가고 없다. 꼭 처음 보는 것처럼 말들을 한다.
화면에서는 끊임없이 등장인물들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다들 드라마에 빠져 그 앞에서 일어날 줄을 모른다. 벌써 세 번째 화면이다.
‘······. 널 좋아하니까. 널 사랑하니까. 이런 내 맘 안 보여?’
화면 속 남자가 여자에게 말한다. 뫼는 얼른 고개를 들이민다. 하지만 화면은 지나간 뒤다. 뫼는 괜히 심통이 난다.
“야, 니들 왜 왔는데?”
뫼가 짜증을 쏟아낸다. 아직도 누리가 눈에 거슬린다. 아무것도 모르는 들도 야속하다.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라고 다독인다. 짜증을 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관심도 없다. 드라마에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이제 비켜! 알아볼 게 있어.”
뫼가 소리를 낮춰 말한다. 여전히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일어설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이럴 시간 없어? 이제 그만 보라고?”
저절로 언성이 높아진다.
“야, 너도 봐! 죽여준다.”
누리가 시선을 화면에 붙박은 채 말한다. 나머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신기하지 않냐? 우리랑 닮아 있어. 한데 부럽다. 우린 없는 게 너무 많아. 근사한 집도 없고, 근사한 옷도 없고, 차도 없고, 핸드폰이라는 것도 없고. 하다못해 남자친구도 없어.”
버들의 목소리가 들뜸에서 시들함으로 바뀐다. 눈은 여전히 화면을 떠나지 못한다.
“그러게. 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좋겠다. 우리는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실컷 누리며 살고 있잖아.” 아미도 부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한다. 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그녀도 신기하긴 마찬가지다.
새로운 화면이 열린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다. 밥 때가 다가오는데도 누린 먹거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걸 잊는다. 배고픔에 지친 뫼가 스스로 일어나 숲으로 간다. 숲에 들어서자마자 뫼는 허겁지겁 열매를 따 입에 몰아넣는다. 배가 불러온다. 돌아서 집으로 간다. 중간쯤 가다 멈추어 선다. 혼자 망설인다.
‘배고플 텐데. 따다 줘? 제 역할도 잊고 드라마에 빠진 게 뭐가 이쁘다고?’
발길을 앞으로 옮긴다. 그러다 다시 멈추어 선다. 결국 돌아선다. 넓은 잎에 수북이 열매를 쌓아올린다. 그걸 잘 여며 가지고 온다. 그런 다음 모두의 앞에 쑥 밀어준다.
“먹어!”
“미안. 시간이 그렇게나 됐냐?”
누리가 미안함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뿐이다. 바로 고개가 제자리로 돌아간다.
“미안하긴 하냐? 글구 니들은 배도 안 고프냐?”
“고프지. 한데 잊었지.”
다들 손이 쉼 없이 오간다. 열매는 금방 동이 난다. 이든이 헛손질을 한다. 열매가 동이 난 걸 보더니 고개를 뫼에게 돌린다.
“왜? 배가 덜 찼냐?”
뫼가 퉁명스럽게 말을 쏘아붙인다.
“아니?” 이든이 씩 웃으며 얼른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러더니 다시 화면으로 가서 고개가 멈춘다.
드라마를 보느라 모두들 밤을 꼴딱 샌다. 그러더니 피곤한지 침대로 가서 쓰러진다. 숨소리만이 들랑날랑한다. 아침 굶은 것보다도 잠이 더 고프다.
다들 한낮이 한참 지나서야 일어난다. 그제야 배가 고프다는 걸 느낀다. 역할 따위는 잊는다. 누구랄 것도 없이 한꺼번에 우르르 숲으로 달려가 허겁지겁 열매를 따 입에 몰아넣는다.
“누리, 오늘만 봐준다?”
아미가 그제야 역할이 생각난 듯 한소리 한다.
“예에.”
누리가 드라마에 나온 인물의 대사를 따라서 끝을 올려 말한다.
“야, 안 어울리거든? 너답게 해. 누리 너답게. 아무리 그래도 누리 넌 드라마 속 등장인물이 아니야. 냉수 마시고 일찌감치 속 차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