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가기 몸이 찌뿌듯하니 뻑뻑하다. 들뿐이 아니다. 모두가 그걸 느낀다.
“이상하다. 몸이 왜 이러지?”
다들 팔을 움직이며 알 수 없다는 표정들이 되어간다. 뫼의 눈동자가 이상함을 감지한 듯 움직인다.
“여자야. 여자가 창을 닫고 있어.” 뫼가 다급하게 말을 쏟아낸다.
“그럼 어떡해?”
들의 목소리도 바짝 긴장이 되어 있다.
“여자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버들은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울상이 되어 간다.
“맞서지 말고 그냥 따라! 그렇지 않으면 우린 모두 죽어.”
뫼가 다급하게 당부를 한다. 들의 눈에서 결국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린다. 왠지 목숨이 걷어지기라도 하는 느낌이다. 눈길을 아슬아슬 걸어가던 여자가 지나간다.
‘우릴 내팽개치지 말아요. 어찌 됐건 우린 당신의 창조물이잖아요. 우릴 내팽개치지······.’
뫼가 흐릿해져가는 의식의 끈을 붙잡고 간절하게 기도한다. 그는 자신의 간절함이 이선에게 가 닿았으면 한다.
이선은 움찔한다. 그 순간 뭔가가 머릿속을 가로질러간 듯한 느낌이 다가온다. 잠시 움직이던 손을 놓고 멍하니 화면을 본다. 하지만 이내 다급한 마음으로 되돌아온다. 다시 바쁘게 손을 움직인다. 시간이 없다. 서두르지 않으면 기회를 잃고 만다.
“조금만 참아. 미안해도 어쩔 수가 없어.”
이선은 혼잣말을 하며 마우스를 이리저리 굴리고 누른다. 마지막으로 만 년의 사람을 카페에서 내린다. 전원도 모두 꺼버린다. 그리곤 서둘러 밖으로 나간다. 그냥 멍하니 화면 앞에 붙들려 있을 수가 없다.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다.
반야 산으로 들어선다. 반야 산을 누비고 오는 시간이 1시간이다. 그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사이 자신의 작품에 끼어든 놈들이 화면을 잠시 떠나주기를 바란다. 속으론 그 생각만을 놓치지 않고 붙들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바람일 뿐이다. 놈들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
발은 저절로 움직이는 거 같다. 길을 따라 쉬지 않고 걷고 있다. 머릿속은 온통 생각이 가득한데 발은 엇갈림도 없이 움직인다. 생각과 몸이 서로 따로 노는 거 같다. 집까지 오는 데 발을 헛디디거나 삐끗한 적도 없다. 따로 노는 거 맞다.
화면은 그대로다. 허긴, 전원까지 모두 꺼버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깊은 숨을 서너 번 들이마셨다 내쉰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그렇게 다독인다. 그런 다음에도 일부러 천천히 시간을 끌며 컴퓨터로 다가간다. 하지만 컴퓨터를 켜자마자 언제 그랬냐 싶게 잽싸게 손을 움직인다. 애니민의 컴퓨터에 접근해 들어간다. 어쩔 수가 없다. 컴퓨터 속의 자료가 화면에 가득 뜬다. 오싹 소름이 돋는다. 웹캠으로도 부족했던지 애니민들이 움직이는 곳 구석구석에 빈틈없이 CCTV들이 설치되어 있다. 외부로 연결된 웹캠부터 차단한다. CCTV연결 시스템도 모두 삭제한다. 녹화자료도 몽땅 파기해버린다. 그러느라 시간이 꽤 걸린다. 또 다시 오싹 소름이 돋는다. 확인까지 마친다. 지저분한 집안을 깨끗이 청소했을 때처럼 기분이 맑아진다. 서둘러 소설 파일을 꺼내 카페에 다시 올린다.
애니민들이 마법에서 풀려 서서히 움직인다.
“여자가 돌아왔어!”
애니민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나야. 내가 다시 돌아왔어.”
이선이 망설이지 않고 대꾸한다.
“우리 목숨을 앗아갔다 돌려줬다, 재미있겠네요?”
아미가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린다.
“재미? 소름이 돋도록 오싹하더라.”
이선도 물러서지 않는다. 삐쩍 마른 가녀린 여자는 외출을 했는지 없다.
“그렇게 재미있었어요?”
누리도 비아냥거리며 화면으로 달려든다. 주먹으로 화면을 내리칠 기세다. 싸움이라도 걸고 싶다.
“니들한텐 재미있다는 소리로 들리든?”
아미와 누리의 말이 살갗에 박힌 가시처럼 걸리적거린다. 그렇다고 살갗 밑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다. “그럼 아닌가요?” “허긴, 아는 게 없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아는 게 없긴요?”
누리가 열을 제대로 받았는지 화면속의 이선에게 삿대질까지 한다. 속에서 열이 치밀어 오르는 걸 참을 수가 없다.
“누리 너, 골 좀 그만 내! 마음 같아선 알밤 한 대 먹여주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으니 무시하마.”
이선이 누리를 꼬집는다. 누리가 팔팔 뛴다.
뫼와 들이 화면을 내려치기라도 할 듯 팔팔 뛰는 누리를 꼭 붙들고 놔주지 않는다. 둘의 손에 붙들린 누리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 거린다. 이선은 그런 누리를 못 본 척 무시한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잘 들어. 거긴 만 년이 아니야. 만 년으로 꾸며진 사이버 공간이야.” “사이버 공간이라뇨? 그게 뭐죠?”
뫼가 화면으로 다가가며 묻는다.
“가상공간. 그러니까, 사람들에 의해 꾸며진 가짜 공간. 니들은 가상공간의 애니메이션 속 등장인물이고.”
여자의 대답은 짧다. 모두들 그게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하다.
“그게 뭐죠? 찾아봤는데 열리지 않았어요.” “놈들이 차단했어. 틀림없어.” “놈들이라뇨?”
“나도 아직은 몰라. 누군지? 어디에 사는지?” “한데 끼어들었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었죠?” “다른 가능성은 없으니까.” “다른 가능성은 없다고요? 그럼 애니메이션은 뭐죠? 그 말을 할 때 굉장히 놀란 듯했어요. 허겁지겁 빠져나가는 바람에 물어보지도 못했고요.”
이선은 난감하다. 말을 하자니 애니민들이 받을 충격이 마음에 걸린다.
“괜찮아요. 뭔지 모를 뿐 우리도 얼추 짐작이 가요. 우리가 놀랄까봐 그런다면 그럴 필요 없어요.”
“이야기를 그림으로 꾸며 움직이게 한 거.” 이선이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이야기를 그림으로 꾸며 움직이게 한 거라고요?” 다들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버들이 흑흑 흐느낀다.
“그래.”
“그림이라고요? 우리가 사람이 아닌 그림이라고요?”
뫼가 믿기지 않는지 거듭 묻는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마음이 아프지만 사실을 말하면 그래. 하지만 애니메이션 속 등장인물과는 좀 다른 데가 있어. 애니메이션 속 등장인물들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야. 작가가 꾸미고 설정한 대로 움직일 뿐이야. 한데 니들은 생명을 지녔어. 작가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니들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어. 겉은 그림이지만 속은 인간이야. 인간의 유전자가 작용하고 있어. 겉모습만 빼면 인간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거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생명공학 쪽은 아는 게 없어서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말 따위는 더 이상 지껄이지 말고 꺼져!”
누리가 다시 악을 써댄다. 들이 누리를 꽉 붙들고 놔주지 않는다. 누리가 몸부림을 친다. 얼른 이든이 달려들어 누리의 몸부림을 억누른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가요?”
“어떤 의미에서는. 하지만 인간의 유전자를 지닌 만큼 인간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야. 믿든 안 믿든 그건 니들 맘이지만 지금으로선 믿는 게 좋을 거야. 나도 놀라서 여러 날 헤맸거든. 거리를 아무리 쏴 다녀도 헤어 나올 수가 없었어. 먹먹한 건지 아픈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혼란스러움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고. 그럴 바엔 차라리 니들을 돕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래 니들을 돕기로 마음을 정했어.”
“아는 게 없다면서요? 한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데요?”
이번엔 눈치만 보고 있던 아미가 앙칼지게 따지고 들어온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 유전자, 유전자 복제, 유전자 조작, 인조인간, 등등. 지금 수준의 과학이라면 애니메이션 속 등장인물에 인간의 유전자를 결합시켜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게 아주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지도 몰라.”
이선은 예상했던 일이어서인지 차분히 받아낸다.
“내가 니들 컴퓨터에 지금까지 연결되어 있던 것을 모두 차단했어. 웹캠과 CCTV가 니들 컴퓨터에 연결되어 있더구나. 구석구석까지 빈틈없이. 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어. 아마도 그걸로 니들을 훔쳐보고 있었던 거 같아. 거기에 지금까지 저장된 자료들을 모두 삭제했어. 자료가 어마어마하더구나. 이 사실을 알아챈다면 놈들이 펄쩍펄쩍 뛰겠지.”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현실을 모르니까 모르는 게 당연해. 쉽게 말해서 니들 삶이 통째로 누군가에게 건너가고 있어. 화면을 통해서.”
“누가 어떻게 보고 있다는 거죠?”
“누가 보고 있는지는 나도 몰라. 방법은 웹캠과 CCTV야. 지난 번 말했던 웹캠을 통해서 니들 삶이 고스란히 찍혀지고 있었어. 웹캠으로 어려운 곳은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누군가 웹캠과 CCTV를 통해서 니들 삶을 훔쳐내고 있었어.”
“왜요?”
“왜냐고? 니들 삶은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틱해. 그건 돈벌이가 될 수 있다는 뜻이야. 다시 말해서 돈을 받고 팔고 있다고.”
“드라마틱하다는 건 또 뭔 소린가요?” “사람들에게 오감을 자극하는 재미와 짜릿함을 준다는 뜻이야. 화면 속 니들의 삶이 그냥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오싹할 정도로 생생하더라.”
다들 여자의 말에 머릿속이 멍해진다. 여자의 말이 거짓말 같지도 않다.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 주저앉아 펑펑 울고 싶다.
“내가 외부로 니들 삶을 빼내가는 장치들을 모두 차단했어. 하지만 컴퓨터에 드라이버가 장착되어 있는 이상 언제 또 프로그램을 깔아 니들 삶을 훔쳐갈지는 나도 몰라.”
“만약 그럴 경우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뫼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낸다. “웹캠이라고 쓰여 있는 곳에 불이 들어와 있으면, 누군가 니들 삶을 훔쳐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야. 그걸 수시로 확인해서 차단해야 해. 일단 제어판에 들어가서 프로그램의 이름과 날짜를 메모해둬. 그리고 그걸 수시로 확인해서 새로운 프로그램이 깔리면 그때그때 삭제해버리면 돼. 그럼 니들 삶을 훔쳐보는 것은 피할 수 있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야. 내 생각이 다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어. 난 그쪽으로는 아는 게 별로 없거든. 그냥 내가 알고 있는 걸로 미루어 생각해 낸 것이니까. 그 점도 알아 둬! 그러니까 마음을 놓지 말라는 뜻이야.
이젠 나도 니들 삶을 더는 쓰지 않을 거야. 니들끼리 알아서 살아. 생명이 있는 한 니들도 인간이야.”
다들 울먹울먹하면서도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몇 가지 물어봐도 돼요?” 뫼의 목소리가 부드럽다.
“우리가 확인한 자료에 따르면 인류는 3013년에 멸망했어요. 그와 관련된 자료가 제법 돼요.”
“그건 놈들이 만들어놓은 자료일거야. 니들을 믿도록 만들기 위해 놈들이 그것까지도 신경을 쓴 거야. 지구가 병들긴 했지만 아직은 아니야. 지금 이 지구에는 70억이 넘는 인간들이 살고 있어. 그러니 지금 당장 인류가 멸망할 일은 없어. 하지만 이대로 간다면 언젠가 멸망할 날이 올 수도 있겠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류의 멸망을 말하고 있기도 하거든. 그럴 만큼 지구는 병들었어. 그래도 인간의 문명이 인류의 멸망을 막아낼 거라고 난 믿어. 자연의 보복이 점점 거세지고 있기는 하지만 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야. 그래도 걱정은 돼. 인간이 더는 자연을 파괴하면 안 되거든. 그걸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선은 더 말을 이을 수가 없다. 목소리에 생체기가 난 듯 울먹임이 얹힌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프다.
뫼는 마음이 약해진다. 이선의 아픔을 다독여줘야만 할 거 같다.
“자연의 보복이 두려운 건가요?”
“두렵지. 폭염과 폭우, 지진, 해일, 태풍. 생각만 해도 억장이 무너지지. 수 천 수 만, 혹은 수 십 만 명의 목숨을 옭아매서 저승으로 끌고 갈 수도 있는 게 자연이야. 한데 아무렇지 않다면 목석인 거지.”
“자연이 그렇게 폭군이라고요?”
“폭군? 때론 니 말이 틀리지 않아. ㅎㅎ.”
이선이 말끝에 낮게 웃는다.
“물을 게 있다면서?”
“예. 아까 왜 글 쓰는 창을 닫았어요? 그것만은 열어둬 달라고 했었는데.”
“놈들을 속여야 했어. 놈들이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가 삭제하기 전에 놈들이 눈치 채고 기를 쓰고 막을 거라서. 내가 창을 닫으면 니들의 움직임이 멎는다는 말이 생각나서 그걸 이용하기로 했어.”
“무슨······.”
“니들이 움직임을 멈추면 놈들 입장에서 얻을 게 없어. 그럼 화면 앞을 떠날 거라 생각했거든.”
“예상대로 놈들이 잠시 벗어났군요.”
“그런 거 같아. 내가 프로그램과 자료들을 모두 삭제하고 파기하는 동안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을 보면. 이제 됐니?”
“그럼 왜 이런 상상으로 우릴 만들어낸 거죠?”
이선은 푹 한숨을 내쉰다. 아직도 온전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때에 비해서는 미꾸라지가 용이 된 격이다.
2012년 2월 이후, 삶과 죽음을 넘나들고 있는 기분으로 반야 산을 걸어 체력단련실에 다녀오고 있다. 2013년 1월에는 눈길을 밟으며 넘어지지 않으려 애를 쓰느라 휘청거리며 다녀야 했다. 저승에 발을 걸쳐놓은 비실거리는 몸이었다. 살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매일 몸을 움직였다. 뫼의 물음에 그때가 고스란히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난 죽음을 생각했을 뿐이야. 사람들은 나고 죽고를 되풀이하며 역사를 이어가. 운동을 하러 가다 잠시 그 생각을 했을 뿐이야.”
이선이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입을 연다.
“뭘 말인가요?”
“죽음. 죽음이 내 안으로 스며드는 걸 느꼈어. 죽으면 스러지는 게 생명체야. 한데 그게 아리게 다가오더군. 내가 죽은 자처럼 느껴지더니 이내 먼 미래에서 와서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 그래서 시작했어.
상상 말인가요?“
“맞아. 난 먼 미래인이 되어 살아보기로 했어. 그래서 상상해냈던 거야. 그뿐이야.”
“우린 이 만 년으로 우릴 옮겨놓은 사람이 그쪽이라고 생각했어요.”
“알아. 지난번에 내게 따졌잖아.” “중간에 끼어든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어렴풋이 하긴 했지만 그쪽이 무관하다는 생각은 전혀 못해봤어요. 좀 당황스럽더라고요.”
“그쪽이 아니라 아줌마. 여기선 다들 날 아줌마라고 불러. 그러니 니들도 아줌마라고 부르는 게 좋을 거 같다. 내 이름은 이선이고.”
이선이 그쪽이라는 말이 거슬리는지 정정해준다.
“아줌마, 괜찮네요. 그럼 앞으로 그렇게 부를게요.” “그래. 그게 훨 낫다. 한데 난 당황한 정도가 아니라 놀라 자빠지는 줄 알았어. 그날 밤 뜬눈으로 지새웠어.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지. 믿어지지가 않아서 내 살점을 꼬집어보기도 여러 번 했어. 죽을 때가 돼서 헛소릴 들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 정도면 심각했지?”
“예. 우린 아줌마가 떠나버린 거라, 아니 도망친 거라 생각했어요. 그 생각에 우리도 몸서리쳤어요.”
“떠날 수가 없었지. 도망치는 건 더더군다나 할 수 없었어. 어찌됐건 니들은 내가 시작해서 태어났잖아. 놀람이 가라앉고 나니까 자식 같은 맘이 생기더구나. 그래 미적거릴 수도 없었어.”
“그동안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늦었던 거군요?” “그래. 그동안 필요를 느끼지 못해 배우지 않았던 포맷과 해킹 기술도 배웠어. 니들 컴퓨터에 있는 프로그램들을 삭제하고 자료들을 파기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거든. 니들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은밀하게 그 일을 해내려면 어쩔 수 없었지. 그러니 다시는 놈들의 해킹에 걸려들지 말고 잘 살아내. 이 소설도 여기서 멈출 거야. 니들의 세상이니까 니들끼리 맘껏 살아내라고.”
이선은 며칠 동안 마음으로 다지고 생각해둔 것을 죄 털어놓는다. 애니민들을 위해서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그리 해야 한다 생각한다. 생명을 태어나게 했으면, 조물주가 누구든 상관없이 소중히 다뤄야 한다. 그게 생명체에 대한 예의라 생각한다. 그래서 지켜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