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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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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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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석거리는 애니메이션인간


BY 한이안 2015-09-17

한밤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로 다가간다. 글자를 쳐 넣고 검색을 누른다. 이상하다. 컴퓨터가 반응이 없다. 화면이 바뀌지 않는다. 다른 걸 쳐 넣고 검색을 눌러 확인해 본다. 화면이 바뀌고 검색한 단어들이 화면에 쫙 올라온다. 애니메이션만 변화가 없다.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가상세계의 애니메이션을 꽉 틀어쥐고 꺼내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숨소리.

밤을 뜬 눈으로 꼴딱 세우고도 정신이 또랑또랑하다. 애니메이션을 손에 넣으려 쉼 없이 생각이 뻗어나간다. 간절하게 매달린다. 하지만 번번이 헛손질로 끝난다.

아무리 기다려도 여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화면을 열고 다가가보지만 숨소리도 자판 두드려대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놀람을 추스르지 못한 모양이다. 죽음의 문턱에 걸터앉은 듯한 모습으로도 꿋꿋했던 여자였는데 너무나도 뜻밖이다. 그게 더 마음을 어지럽힌다.

자신들의 존재가 그 정도로 놀랄 일이었을까? ? 아무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다. 혼자 끙끙 앓을 뿐이다. 들에게도 입을 꾹 다문다.

들은 수시로 건너온다. 그녀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옆에 오래 머물지도 못하면서 발길을 뚝 끊지도 못한다. 실망한 기색이 또렷하다. 모습을 드러낸 유일한 가능성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평소에 비해 말이 뚝 끊겼다. 마주하고 있어도 말은 자취를 감추고 없다. 다 같이 모여 밥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다. 띄엄띄엄 말이 건너갔다 띄엄띄엄 돌아올 뿐이다.

뫼는 끼니때가 아니면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는다. 말이 없는 가운데서도 누린 제몫을 꼬박꼬박 해낸다. 버들도 이 집 저 집을 드나들며 치우고 또 치우고 한다. 들과 이든도 컴퓨터 앞에서 실마리를 찾느라 여념이 없다. 하지만 걸려 올라오는 것은 없다.

우리 얘기 좀 하자!”

참다못한 들이 뫼를 찾아온다.

우리 둘이?”

아니? 모두 함께.”

뫼는 들의 제안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뫼뿐만 아니라 나머지도 그 상황이 어색하다 생각했는지 군말 없이 응한다. 하지만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다들 난감하다.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것도 피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지금 우리가 힘든 건 방향이 없어서라고 생각해. 우릴 이렇게 만든 게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부터 다들 힘이 빠져버렸어. 역할을 다하겠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지만 이렇게 해서는 얼마 못 가.”

들이 침묵을 깨고 먼저 말한다. 그녀는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말을 한 사람이기에 말머리를 여는 사람도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방향을 확실히 하고 다시 시작하자는 거지?”

이든이 생기를 얻어 말한다.

. 여자가 빠져나가고부터 우린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어. 또 다른 누군가가 밝혀지지 않은 데서 오는 불안감 때문에. 하지만 그건 우리가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이렇게 손 놓고 시간이 가는 것만 지켜볼 수는 없어.”

그 누군가를 찾아낼 방법을 의논하자는 거야?”

아미도 이야기 속으로 끼어들어온다.

.”

너무 막막해. 자판 두드리는 소리와 만 년의 사람을 읊조리던 여자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지금도 우린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있을 거야. 그땐 그 두 가지가 단서가 되어주었어. 그래서 막막해도 앞을 내다볼 수 있었어. 한데 다들 알고 있듯이 지금은 아니야. 실마리가 되어줄 게 아무 것도 없어.”

뫼가 어려움을 드러낸다.

그럼 단서부터 찾아내면 되겠네. 그것부터 시작하자! 그럼 방향은 정해진 거지?”

들이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뫼의 말을 발판으로 삼아 말한다. 뫼가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 그 전에 먼저 몇 가지 짚고 넘어가자. 여자가 발뺌하는 느낌은 없었어?”

전혀. 처음엔 그런 느낌이 있었어. 한데 끝에 가선 여자도 혼란스러워 하는 느낌뿐이었어.”

확실해?”

뫼가 들을 한참 멍하니 쳐다본다. 문초를 당하고 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들도 만만치 않다. 뫼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다. 뫼의 눈빛이 먼저 꺾인다.

느낌이지만, 확실해.”

뫼가 들의 눈치를 보며 뜸 들여 말한다.

그럼 됐어. 여자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한 거잖아. 이건 주저앉을 일이 아니라 기뻐할 일이야. 열려있는 가능성이 줄어든 거잖아. 가능성이 줄어들수록 우리에겐 유리해. 그러니 더는 여자에게 매달려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

그럼?”

뫼가 조심스럽게 들의 생각을 떠본다.

순서대로라면 3013년의 과학자들이야. 그들일 가능성을 따져봐야 해. 한데 니 설명이 필요해. 그들은 아닐 거라면서.”

치밀하게 재고 따져본 듯 거침없이 밀어붙인다.

뫼가 우물우물한다. 여자의 말을 옮기다보면 여자의 마지막 모습까지도 들춰내야 한다. 그게 걸린다.

말 해! 우리도 알아야 해. 너 혼자 감당할 일이 아니야.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우린 하나야.”

뫼가 우물우물하는 것을 꼬집는다. 들은 뫼가 꼭꼭 여미고 있는 것을 꺼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뫼가 놀라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휘청거리게 한 여자의 말이 뭔지 들어야 한다.

뫼가 애 타는 눈빛으로 들을 바라본다. 들은 뫼의 시선을 싹둑 잘라낸다. 말을 하라는 눈빛으로 맞선다.

그게.······.”

말이 나오려다 도로 입속으로 들어간다.

말을 안 한다고 이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들이 뫼의 머뭇거림을 두들긴다. 한 치의 물러섬이 없다. 뫼가 꺾이고 만다.

지난 번 말했듯이 여자 말이 3013년은 다가오지도 않았데.”

그뿐야?”

누군가 자신의 작품에 끼어들었을 거라고 혼자 중얼거렸어.”

누군가가 끼어들었다고? 여자가 그랬어?”

.”

그건 우리 생각과 다르지 않아. 여자도 놀랐겠네. ?”

또 뭐?”

뫼는 들이 멈추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쳐다본다. 들은 시선을 물리지 않는다.

거기서 끝나진 않았을 거 아냐?”

머릿속이 어수선해진다.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다. 한데 들의 시선은 거침없이 파고 들어온다. 끝까지 들어보기로 마음을 정한 모양이다. 뫼가 한숨을 푹 내쉰다. 들의 시선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애니메이션 인간이래.”

결국 뫼가 물러서고 만다. 자신의 머릿속에만 꼭꼭 여며두겠다고 마음먹었던 끈을 풀고 만다.

그게 뭔데?”

나도 몰라. 검색을 해봤는데 열리지가 않아. 아무래도 누군가 열어보지 못하게 막고 있는 느낌이야.”

그건 그렇다 치고, 넌 왜 그걸 꼭꼭 숨기려 했는데?”

뫼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여자의 허둥대며 빠져나가던 모습에 이르자 숨이 꽉 막힌다. 벼랑 끝으로 밀려난 아득함을 밀어낼 수가 없다.

여잔 아니라면서. 여자가 우릴 이렇게 만든 게 아니라면서. 한데 왜 망설여? 여자가 어쨌기에?”

들이 바짝 밀어붙인다. 빠져나갈 틈새가 보이지 않는다. 눈동자가 마구 흔들린다.

말하기 곤란한 거야? 그래서 머뭇거리는 거야? 여자가 협박이라도 했어?”

그건 아니야.”그럼.”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자가 많이 놀란 듯했어. 제 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허둥대며 그냥 빠져나갔어. 겨우 화면만 열어놓아 달라고 했어.”

흔들리던 눈빛이 제자리를 찾는가 싶더니 이번에도 꺾이고 만다. 들이 생각에 잠긴다. 그녀도 심상치 않은 뭔가를 느낀다. 옆에서 무거운 마음으로 앉아 있기만 하던 이든과 누리, 아미와 버들의 어깨가 축 쳐진다.

또 알고 싶은 게 있어?”

아니? 이젠 됐어.”

들의 목소리가 힘을 잃고 가라앉아 있다. 뫼가 휴~하고 길게 숨을 내쉰다.

아주 쉽게 또 하나를 밀어냈네. 다음은 2013년의 두뇌파들인 거지?” 가뿐하게 나와야 할 말이 무겁다. 열려있는 가능성이 줄었으니 기뻐할 일이다. 한데 열려 있는 가능성이 줄어들었다는 느낌이 조금도 다가오지 않는다. 연습 삼아 가벼운 돌을 하나 하나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고 마지막 돌을 집어 들기 전에 숨을 고르는 그런 마음이다. 한데 돌의 크기나 무게가 만만치 않다. 아무도 대꾸가 없다. 뫼조차도 막막함을 떨쳐내지 못한다. 들이 뫼를 힐끗 쳐다본다. 그는 그녀의 눈길을 느끼지 못하는 눈치다. 눈길이 다가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