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의 몸이 움찔한다.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다. 얼마나 찾아 헤맸는데? 곱게 물러날 수가 없다.
“그쪽 작업실이라고요? 난 화면이 이끄는 대로 따라왔을 뿐인데 여기가 그쪽 작업실이라고요? 말도 안 돼요.”
“빠져 나가라는데 왜 자꾸 헛소리를 해대는 건데? 할 짓이 그것밖에 없어? 엄마 아버진 안중에도 없는 거야? 엄마 아버지한테 미안함도 없느냐구?”
이선이 버럭 화를 낸다. 노여움이 불같이 인다.
“그러지 말아요. 우린 얼마 전에야 잠에서 깨어났어요. 7987동안 잠을 잤어요. 정말 7987년 동안 잔 것인지, 아니면 건너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선의 노여움에 뫼가 당황한다. 엄마 아버지라는 말에 온몸이 아리다. 엄마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 말은 울림이 되어 몸속으로 파고든다.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 결국 울음을 터트린다. 울먹이며 말도 제대로 맺지 못한다.
“우린 엄마 아버지가 없어요. 그쪽이 글을 썼으니까 알 거 아녜요. 우리에게 엄마 아버지가 없다는 거.”
뫼가 훌쩍거리며 말한다. 이선은 뫼의 훌쩍거림에 다그친 것이 괜히 미안해진다.
“알았어. 화내서 미안하구나.”
“그럼 제 말을 믿는 건가요?”
낚여 줘? 이선은 난처하다. 더는 소리를 지를 수도, 그렇다고 발을 빼낼 수도 없다. 흐느낌이 자꾸 안으로 파고들어온다. 속는 셈 치고 믿어보기로 한다.
“달랑 여섯이라고 했니?”
“예. 전 뫼고, 나머지는 다들 제 집에 있어요. 오늘 알아낸 것을 확인해보기 위해서요.”
뫼가 훌쩍임을 가까스로 멈춘 채 말한다.
“정말 엄마 아버지가 안 계신 거야?”
뫼가 다시 훌쩍인다. 여자가 믿지 못한다는 생각에 다시 억울해진다. 엄마 아버지라는 말도 가슴을 후벼 판다. 이유는 알 수가 없다.
“그만 울어!”
머릿속이 갑자기 안개가 잔뜩 낀 것처럼 생각이 돌지 않는다. 무얼 어찌 물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다.
“공부가 재미없니?”
머릿속을 더듬어 겨우 생각해낸다. 그 말이면 그래도 마음을 달래줄 수 있겠지 한다.
“공부라고요? 배우는 거 말이죠?”
“맞아.”
이선은 말이 조금 트였다고 생각한다. 그래 말투에 생기가 실린다.
“나쁘진 않아요. 알아내는 과정이 쉽지 않아서 그렇지.”
“세상에 쉬운 건 없어. 그래서 알게 됐을 때 보람을 느끼는 거야. 그걸 생각하며 다들 힘든 걸 견뎌내거든. 어렵게 알아냈을 때 흐뭇하지 않던?”
“예. 흐뭇했어요. 화면에 글씨를 써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 오늘 아침에 얼마나 흐뭇했는지 몰라요. 웃어도 웃어도 웃음이 그치질 않더라고요.”
“맙소사, 뭐야? 좀 전에 쓴 부분이야. 아직 카페에 올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지? 내 컴퓨터를 해킹하고 있나?”
이선이 혼자 낮게 중얼거린다.
“당신이 빚어낸 내 삶이니까요. 한데 해킹이 뭐죠?”
뫼가 알아듣고 대꾸한다.
“어떻게 들었어? 혼잣말로 낮게 말했을 뿐인데.”
“말했잖아요. 난 살아있는 그쪽 작품 속 등장인물이라고. 아직도 믿기지 않는 거 알아요.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죠? 그래도 사실을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뫼가 이선의 생각을 읽어내고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닌데? 난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고 있었어.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니라고. 한데 뭐지? 자꾸 엮여 들어가고 있는 기분이야.”
“맞아요. 그쪽과 우리는 서로 엮여 있어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너 또 내 말을 알아들은 거야? 나 혼자 중얼거렸을 뿐인데? 입술만 달싹여서 말이야. 한데 이번에도 또 알아들은 거야?”
“예. 난 살아있는 그쪽 작품 속 등장인물이라고 했잖아요.”
“정말 내 목소리가 들려?”
이선은 뭔가에 홀린 느낌이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 거듭 확인하면 할수록 안개가 걷히는 게 아니라 더 짙은 안개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다.
“예.”
뫼는 여자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여자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어떻게?”
“몸이 알아채요.”
“맙소사.”
이선은 맙소사만 되풀이한다. 진짜 머릿속이 뿌연해진다. 할 말도 잃고 만다.
“믿기지 않는 거죠?”
“그럼? 어떻게 믿어? 가상세계에서 들려오는 살아있는 생생한 목소리를 어떻게 믿겠어? 그것도 내 작품 속 등장인물인 만 년의 사람들이라는데. 미래의 사람과 말을 주고받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마치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아.”
이선이 잔뜩 눌린 목소리로 말한다.
“그건 정말 불가능한 일인가요? 만 년에 가상세계에 접속해서 2013년의 사람과 말을 주고받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인가요? 그렇게 놀랄 만큼이요?”
“그렇지? 아직은 기술이 거기까지 발달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럼 지금 이건 뭐죠?”
“글쎄? 꿈 아니겠어? 너나 나나 꿈을 꾸고 있는 거겠지? 현실과 동떨어진 꿈이야 얼마든 꿀 수 있으니까. 내가 너무 내 작품에 빠져 있었나봐.”
“아니에요. 꿈이 아니에요. 잘 생각해보세요. 우린 지금 7987년을 넘나들며 말을 주고받고 있다고요.”
“잠깐만. 내 살점을 꼬집어볼게.”
잠시 말이 끊긴다. 이선이 자신의 살점을 세게 꼬집는다.
“아야!”
이선이 아픔을 참지 못하고 아야 소리를 낸다.
“왜 그래요?”
“정말 꿈이 아니야. 내 살점을 꼬집었는데 아파. 꿈이라면 아프지 않을 텐데.”
“꿈속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믿을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 여섯이라고 했지?
“예. 한데, 그건 왜요?”
뫼도 더는 뭐라 할 말이 없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기는 그 역시 마찬가지다.
“정말 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인지 확인해 봐야겠어. 뭐가 뭔지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난 그냥 글을 썼을 뿐이고 2013년은 지나가지도 않았어. 헌데 만 년이라니?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 봐도 말이 안 되는 일이야. 그러니 우리 확인해보자!”
“어떻게요?” “서로의 공간을 나누자!”
“어떻게요?”
“보여주면 되잖아. 니 말이 사실이라면······”
“사실입니다.”
뫼가 단호하게 이선의 말을 잘라내고 끼어든다. 이선은 더 말을 잇지 못 하고 잠시 화면만 바라본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건 알겠어요. 그래도 우리 존재를 부정하지는 말아주세요.”
“그래. 그래서야. 믿기지 않으니까 눈으로 확인하자고. 니 말대로라면 난 죽었다는 뜻인데 난 멀쩡히 살아있거든.”
“우리도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확인을 해보자고. 내 입장에서 니들은 아주 먼 미래의 사람들이야. 공상과학소설이나 판타지소설에서라면 가능하지. 하지만 지금의 기술로 현실에서는 아냐.” 뫼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선이 믿지 못하는 게 속이 상한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느낌이네요.”
뫼가 실망하여 말한다.
“그렇게 실망부터 할 일은 아냐.”
“만 년의 사람을 쓰고 있는 거 아닌가요?”
뫼가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묻는다.
“맞아.”
“그럼, 주인공이 나무에 부딪히면서 깨어나지 않나요?”
“것도 맞아.”
“우린 나무에 부딪히면서 깨어났어요. 내 머릿속에 입력된 자료가 들을 만날 때까지 날 이끌어줬어요.”
“내 작품속 내용 맞아. 하지만 니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려면 세 가지를 먼저 받아들여야 돼.”
“그게 뭔데요?”
“그건 내가 죽었어야 하고, 인류도 멸망했어야 한다는 거. 나머지 하나는 진짜 7987년이 흘렀어야 하고. 너가 정말 뫼라면, 그리고 들과 이든, 아미, 누리, 버들이 정말 너와 함께 살아내고 있다면 넌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 말을 주고받고 있다는 뜻이야. 난 이 글을 지금 2013년 1월부터 쓰고 있으니까. 시·공간적 배경을 만 년의 지구로 설정해서 말이야. 난 인류의 멸망을 확신하고 글을 쓴 건 아니야. 그냥 작품을 쓰기위해 설정을 그렇게 했을 뿐이야.”
빠져나오고 싶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발을 빼내고 싶다. 그럼에도 호기심이 그녀를 놔주지 않는다. 그래 아주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묻는다.
“인류는 당신이 글을 쓰고 있는 그 해부터 정확히 천 년 후에 멸망했어요. 그러니까 3013년에요. 대지가 타들어가고, 모래바람이 불어대서 지구는 더 이상 사람 살 곳이 되어주지 못했어요. 마지막 인간이 써 놓은 글에서 읽었어요.”
“그건 모르겠어. 난 그보다 훨씬 전에 죽었을 테니까. 내 작품 속에도 그런 내용은 없어.”
“우리가 열어본 화면에서 읽었어요.”
“혹시 돈이 필요하니?”
이선이 조심스럽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