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가 두리번거린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잠시 글자 치기를 멈추고 화면을 바라본다.
“누구냐고?”
이번엔 다소 놀람이 가라앉은 목소리다. 그가 쓴 글 아래에 소리가 글이 되어 올라온다. 그의 손이 자판 위에서 멈춘다.
‘맙소사 여자야. 여자가 어떻게 내 화면에 글을 쓴 거지?’
영 알 수가 없다. 기절초풍할 일이다. 놀라서 손을 얼른 자판에서 떼어낸다.
“누구냐는 말 안 들려?”
그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여자가 다시 묻는다. 그 자신보다 여자가 더 놀란 눈치다. 움찔하는 게 느껴진다.
‘왜지?’
뫼는 놀란 토끼눈을 하고 여자가 놀란 이유를 더듬는다. 그러다 자신이 써 넣은 글에 눈길이 간다.
“여자가 읽었어! 내 글을 여자가 읽었어!”
그는 신기한 듯 외친다. 그리고는 다시 자판에 손을 얹는다.
“왜요? 놀라셨나요?”
장난기가 슬슬 동한다. 여자를 실컷 놀려주고 싶다. 속이 후련해질 때까지 여자의 애를 태우고 싶다.
“넌 누구니?”
한참 후에 여자의 글이 또 올라온다. 여자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놀람은 거의 빠져나가고 없다. 뫼는 어찌 대답해줄까, 하고 잠시 망설인다. 그러다 솔직하게 말하기로 한다.
“나요? 당신 작품 속의 등장인물이요.”
솔직하지만 약간 삐딱하게 대꾸를 한다. 여자가 그걸 읽어낸 눈치다.
“내 작품 속 등장인물이라고? 말도 안 돼. 그런 거짓말은 다른 데나 가서 하시지? 난 믿지 않으니까. 난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거든?”
여자의 말투도 삐딱하다. 그녀가 어림없다는 투로 말한다. 아니 글을 올린다. 환청이다. 말소리는 빠져나가고 글만 떴을 뿐이다. 하지만 몸이 7987년의 시간적 거리를 뛰어넘는 모양이다. 그녀의 목소리를 읽어내고 있다. 그게 신기하고도 묘하다. 왜일까 생각하다 한쪽으로 밀쳐둔다. 그걸 따질 만큼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정말인데요?”
뫼의 말투는 여전히 놀림조다.
“내가 바보인줄 아니? 난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니야?”
이선의 말투도 꼬여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그러니 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란 뜻이야. 너도 꿈속 인물이 아니고. 그러니 장난칠 생각은 그만둬! 애송이 같은데, 이런 장난은 좀 그렇지 않아?”
이선은 도무지 뫼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 기분이 상한다. 등장인물이라니. 등장인물이 글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일이다. 그러다 자신에게로 생각을 돌린다. 몸이 야위니까 정신도 혼미해지는 모양이다. 그녀는 정신을 일깨우려고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마구 흔들어댄다. 그래도 화면은 달라지지 않는다. 낯선 글이 또렷하게 화면에 박혀있다. 지워지지도 않는다.
“정말인데요? 난 당신의 작품 ’만 년의 사람‘에 등장하는 뫼인데요? 당신의 상상이 만들어낸 인물 아닌가요?”
이선은 흐리멍덩한 속에서도 화면에 뜨는 글자를 읽어낸다. 여전히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맞아. 하지만 뫼는 내 작품 속에만 존재해야 하는 가공의 인물이야. 한데 니가 어떻게? 어떻게 글을 써서 내게 생각을 전할 수가 있지? 말도 안 돼! 넌 뫼가 아니야. 뫼는 살아있는 인물이 아니야. 내 상상 속에서만 숨을 쉬는 인물이라고. 헌데 니가 어떻게? 어떻게 니가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지?”
이선은 놀람을 감추지 않는다. 믿지 못한다는 것도 그대로 드러낸다.
여자의 말에 뫼도 머릿속이 띵하다. 그동안 내내 여자의 상상에 갇혀 있다고 믿었다. 한데 여잔 모로쇠다. 아니 모르고 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갑자기 헷갈린다. 연관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여잔 그의 생각을 아주 쉽게 무너뜨린다. 그동안의 생각이 와르르 무너진다. 그래도 여자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다. 여자의 글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 여자의 글쓰기가 멈추면 마법에 걸린 것처럼 온 몸이 굳어버린다. 그걸 설명할 방법이 없다.
“아니요. 난 살아 있는 생명체입니다. 당신 작품 속에 박제된 가공의 인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당신의 작품 속이 아니라고요. 당신의 상상에서 벗어나진 못하지만 우린 실제 만 년에 살고 있어요. 숨을 쉬고, 끼니때가 되면 먹을 걸 먹고, 잠도 자고,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가끔은 토닥토닥하기도 하는 감정을 가진 생명체라고요. 아무도 없는 지구에 나와 들, 이든, 아미, 누리, 버들, 이렇게 달랑 여섯이 하나하나 익혀가며 살아내고 있다고요. 당신의 상상이 글로 써내는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말예요.”
억울하다. 그렇게 찾아 헤맸던 여자를 만났음에도 달리 할 게 없다. 답답함만 잔뜩 쌓일 뿐이다.
“당신이 쓰고 있으면서 모른다 하면 우린 뭐죠? 그리고 우릴 2013년과 동떨어진 이곳에 내쳐놓고도 미안하지 않은가요? 당신은 양심도 없나요? 도리도 모르나요?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글쓰기를 중단하고. 그럼 우리가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몸이 완전히 굳어버려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요?”
억울함을 떨쳐낼 수가 없다. 그래 다부지게 따져 묻는다. 아니 그냥 따져 묻는 게 아니다. 피를 토해내고 있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무 말이나 그렇게 쏟아내도 되는 거니? 내가 니들을 내치다니? 몸이 굳어버린다니? 내게 그런 능력이 있기라도 한다면 몰라. 난 그런 능력이 없어! 그러니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 더는 지껄이지 마!”
말을 끝내고 이선은 입을 꾹 다문다. 잠시 말이 끊긴다.
뫼는 또다시 헷갈리기 시작한다. 여자가 왜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다. 분명 여자의 글이다. 자신들의 삶은 여자의 글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한데 여자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뭐지? 갑자기 환해진다. 생각이 3013년의 과학자들로 옮겨간다. 인류의 멸망을 막아내기 위해 땅속 깊은 곳에서 온몸을 받친 사람들이다. 그들이 여자의 글을 읽은 것이 분명하다. 여자가 비껴나면서 누리가 여자 뒤에 세워 놓은 3013년의 과학자들이 다가온다.
이선은 뫼의 생각에 가 닿지 못한다. 그가 뱉어낸 말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울려댄다. 괘씸하다. 괘씸해도 한참 괘씸하다. 어린 녀석한테 깔보인 느낌이다.
“내가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거야?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거야? 왜? 왜지?”
화가 나는 것을 억누르고 한참 뜸을 들이다 묻는다.
“난 니들을 내치지 않았어. 난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어. 그리고 니들이 누군지도 몰라. 만 년? 난 산 사람을 만 년으로 보낼 능력이 없어. 게다가 잘못한 것도 없어. 그냥 글을 썼을 뿐이야. 그러니 니 말이 사실이래도 날 탓하지 마! 사실일 리도 없겠지만. 가상 세계에서 만났다고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그렇게 함부로 뒤집어씌우지 말란 말이야! 알았어?”
이선이 단호하게 선을 그어 말한다.
“가상세계요? 우리가 가상세계에서 만나고 있다고요? 가상세계가 뭐죠?”
“모르는 척 시치미 떼지 마! 가상세계도 모르면서 여긴 왜 들어왔는데?”
“손에 쥐고 누르면 열려서요. 글을 쓰면 화면에 뜬다는 것도 오늘에서야 알았고요. 그 기쁨에 한껏 취해 그쪽이 중얼거리던 ‘만 년의 사람’을 써봤던 거였어요. 한데 내가 글을 쓴 곳이 가상세계라고요? 2013년의 현실이 아니었나요? 우린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요.”
“몇 살이니?”
여전히 어이가 없는 말투다
“스물 하나요. 우린 모두 스물 한 살입니다.”
“대학 동아리 친구들이니?”
“그건 또 뭐죠?”
“너 언제까지 그렇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뗄 건데? 재미가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맘 고쳐먹고 관둬! 엄마 아버지를 생각해 봐! 뼈 빠지게 고생해서 뒤 밀어주고 있는 니들 엄마 아버지를 생각해 보라고. 그럼 답이 나올 테니까.”
“그게 뭐냐구요?”
“좋은 말 할 때 그만 하고 빠져나가! 여긴 내 작업실이야. 남의 작업실 엉망으로 만들지 말고 어서 나가라고.”
이선이 고함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