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소리가 들린다. 나지막하지만 흡족함을 드러내는 소리다. 뫼는 신경을 곤두세운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어본다. 소리의 주인공은 여자다. 여자의 웃음소리가 화면 안에서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맘껏 하하 웃는 게 아닌 잔잔한 웃음이다. 뿌듯한 모양이다.
속에서 은근이 열이 치받는다. 여자의 웃음이 토막으로 잘려 나와 그의 심장을 쿵쿵 두드려댄다. 숨을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뱉는 걸 수없이 되풀이한다. 들끓어대던 게 차츰 가라앉는다. 대신 생각이 고기를 저미는 칼날이 되어 날렵하게 움직인다.
여자, 여자에게 다다를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녀와 말을 틀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가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늘 그게 문제다. 그는 화면을 찬찬히 훑는다. 거기 어디에 여자에게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걸 찾아내는 게 먼저다.
화면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얻어낼 게 없다. 그는 자판으로 눈길을 옮긴다. 단추들이 빼곡하다. 다들 나름대로의 기능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그 중 알 수 있는 건 몇 가지뿐이다. 단추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기능을 찾아내야 한다. 한데 누르기가 겁이 난다. 잘못 되기라도 할까봐 불안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맨 위에 있는 첫 단추를 누른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바로 옆에 있는 각기 모양이 다른 단추 하나를 누른다. 새로운 창이 열린다. 그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그는 마우스로 커서를 옮긴 후 누른다. 오른쪽 네모 안이 바뀐다. 위에서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화면을 있는 대로 다 열어 중간 중간 읽어간다. 읽다보니 사용 도움말이다.
‘앗-싸!’
입에서 저절로 추임새가 나온다. 여자에게 다가가는 길은 아니다. 그럼에도 마음은 춤이라도 출 것처럼 들뜬다. 더는 화면을 바라보며 멍하고 있지 않아도 될 거 같다. 도움말엔 화면을 써 먹을 수 있는 방법들을 죄 풀어 말하고 있다. 뫼는 처음으로 돌아와 하나를 누른다. 그리곤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읽어 내려간다. 중간 중간 화면에서 눈을 떼고 머리로 정리한다. 본래의 화면으로 돌아와 확인 연습을 한다. 신기하다. 화면이 더 이상 바라봄의 대상이 아니다. 그걸 맘대로 꾸미기도 하고 생각을 담아놓을 수도 있다. 야릇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다른 것들도 눌러서 읽고 확인 연습하기를 되풀이한다. 그러느라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는 것도 잊는다.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 누리가 들이닥쳐서 불러댄다.
“뫼!”
대답이 없다. 듣지도 못한 듯 혼자 신이 나있다.
“야, 뫼!”
목소리를 키워 불러보지만 움찔도 하지 않는다. 누리가 뫼에게 다가가 손으로 어깨를 잡고 흔든다. 그제야 뫼가 고개를 돌려 누리를 본다. 한데 그게 다다.
“나 누리야. 뭘 그렇게 낯설게 쳐다보는데?”
“누리? 알지. 한데 왜?”
왜냐는 말에 누린 어이가 없다. 꼭 먼 곳에 갔다 허겁지겁 돌아와 돌아가는 상황을 몰라서 얼 띤 그런 얼굴이다.
“왜긴? 뱃속에 뭘 집어넣어야지? 배 안 고파?”
누리가 잔뜩 실망하여 말한다. 모두를 먹일 생각에 신바람이 나서 열매를 땄다. 고기도 구웠다. 열매를 따면서도 고기를 불에 구워 먹일 생각으로 가득했다. 한데 뫼의 반응이 너무 심드렁하다. 안에 잔뜩 머금은 김이 새나간 기분이다.
“배?”
뫼는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
“밥 때가 됐는데 뱃속이 아무렇지 않느냐고?”
누리가 목소리를 키워 말한다.
“너, 왜 그래? 배고픔도 잊고?”
누리가 화를 낸다. 누리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야 뫼는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미안. 니가 밥 당번이지? 내가 들떠서 잠깐 모든 걸 잊었어.” “뭐가 그렇게 너를 옭아맸는데?” “뭐? ㅎㅎㅎ······.”
뫼는 대답도 얼버무리고 웃기만 한다. 누리는 희한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ㅎㅎㅎ······. 아주 재미있는 걸 찾아냈어. ㅎㅎㅎ”
뫼가 웃음까지 흘려가며 자랑스럽게 말한다. 늘 마주하던 뫼와는 다른 모습이다. 그런 뫼를 바라보는 누리의 눈빛이 알쏭달쏭하다.
“야 인마. 재미있는 거라 말 했잖아. 얼뜨게 쳐다보긴?”
뫼가 누리의 어깨를 툭 친다. 뫼답지 않게 거들먹거리기까지 한다. 여전히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하다.
“지금 멍 때리게 하는 사람이 누군데? 내 눈엔 지금 니가 낯설어도 한참 낯설거든? 도대체 재미있는 게 뭐야?”
“가자! 가서 얘기해줄게.”
뫼가 누리의 손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간다. 갑자기 둘에게 아우성이 쏟아진다.
“왜 이제 나와? 가서 어떻게 된 줄 알았잖아?”
이 집 저 집 치우느라 몸을 열심히 부린 버들이 소리를 내지른다. 그녀의 배에서는 연신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다.
“눈 빠지는 줄 알았잖아. 봐! 눈이 빠져나오다 들어가고 있는 것 보라고.”
버들이 눈을 둘에게 들이민다.
뫼는 버들의 호들갑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좀 전에 알아낸 것으로 흐뭇할 뿐이다. 실실 웃어대며 들 옆으로 가서 앉는다. 반면에 누린 샐쭉한 표정이다. 들과 이든, 버들, 아미는 둘의 엇갈린 표정을 이해할 수가 없다. 버들은 말을 더 쏟아내려다 그만두고 둘을 번갈아 바라본다.
“뭐야?”
누리가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낸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다들 어이가 없는 듯 물어댄다.
“무슨 일? 있어. 그러니까 잠깐만 기다려! 내가 얘기해줄게.”
뫼가 크크 하며 목청을 가다듬는다. 그리곤 목에 잔뜩 힘을 준다.
“뭐야?”
다들 먹는 건 잊은 채 뫼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본다. 뫼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를 부린다.
“뭐냐니까?”
누리가 입을 열라고 재촉한다.
“알았어. 얘기할 테니까 좀 기다려.”
모두의 시선이 뫼의 얼굴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뫼는 천천히 말을 꺼낸다. 모두의 입이 딱 벌어진다. 다물어질 줄을 모르고 연신 ‘그래?’를 추임새처럼 넣는다. 그러더니 일어나 집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밥 먹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밥은 먹어야지. 그래야 버틸 수 있지 않겠어?”
이번엔 뫼가 여유를 부리며 고깃덩어리를 쭉 찢어 들고 뜯어먹기 시작한다. 뫼의 말에 다들 도로 주저앉는다.
“뫼, 대단해.”
다들 뫼를 칭찬하기에 바쁘다.
“그 정도 가지고 뭘?”
뫼가 우쭐해서 말한다. 살짝 쑥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다. 더없이 좋다.
“이러다 우린 만 년에서 2013년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지고 놀 수 있는 거 아냐?”
아미가 흥분을 감추지 않고 말한다.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뫼가 지치지만 않는다면.”
이든이 뫼를 보며 확신에 찬 듯 말한다. 뫼는 고개만 살짝 끄덕끄덕한다. 이든의 말대로 그럴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길을 찾는 게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도 떨쳐낼 수는 없다. 이든 말대로 길을 찾느라 헤매며 지치지만 않는다면 2013년을 7987의 시간적 거리와는 상관없이 바로 눈앞에 끌어다 놓을 수도 있을 거 같다.
“뫼!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먹을 건 대마. 몸 잘 챙겨라! 난 그쪽으론 젬병이라는 거 알지? 난 너만 믿는다.”
누리가 뫼의 등을 손바닥으로 토닥이며 말한다.
“고맙다. 먹을 거 걱정 안 해도 돼서.”
“뫼, 나도 옆에서 부지런히 거들게.”
들도 뫼가 대견한 듯 그를 건너다보며 말한다. 이든도, 버들도, 아미도 뫼를 거들겠다는 말을 보탠다.
고기맛과 어우러진 열매가 다른 때보다도 더 달짝지근하다. 모두들 뫼가 찾아낸 걸로 흐뭇하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주변을 맴돈다. 여자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웃음 속에서 배가 빵빵하게 차온다. 뫼가 먼저 일어난다. 다들 뫼를 따라 일어난다.
“니들은 더 있다 들어와도 돼.”
뫼는 괜히 미안하다. 언제나 분위기를 깨는 데는 선수다. 그렇다고 슬그머니 빠져나올 수도 없다.
“너한테만 맡기고 노닥거릴 수는 없잖아. 너만 급한 게 아니라 우리도 급해. 그러니 미안해 할 거 없어.”
이든이 뫼의 등을 가볍게 밀고 들어간다.
집안에 들어오자마자 뫼는 여자에게 한 발 다가간 느낌으로 화면 앞으로 가서 앉는다. 화면엔 여자의 상상이 글자가 되어 올라온다. 그는 잠시 여자의 상상을 눈으로 따라간다. 이든과 버들, 아미, 들, 누리가 순서 없이 나타났다 밀려난다. 여자는 자신도 화면에 올려놓는다. 그는 피식 웃는다. 그의 피식 웃는 것까지도 여자는 놓치지 않는다. 아니 여자의 상상에 그가 놓치지 않고 반응한다. 바로 기분이 거꾸러진다.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는다. 한껏 들뜬 모두의 기분을 깰 수가 없다. 대신 한글 작업창을 열어서 하나하나 확인시켜준다. 입을 꾹 다물고 손으로 마우스만 열심히 굴려댄다. 창이 열리면 짧게 알아들을 정도의 말만 쏟아낸다. 다들 진지하다. 눈에서 초롱초롱 빛이 난다. 그러다 눈빛들이 흐트러진다.
“그만하고 각자 집으로 가서 다시 해보자!”
이든이 말을 꺼내더니 먼저 몸을 돌린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우르르 빠져나간다.
뫼는 얼른 새로운 창을 연다. 그리곤 허리를 펴고 손을 쭉 위로 뻗는다. 시선은 여전히 화면에 박혀있다. 여자가 같은 화면을 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기분이 묘하다. 여자가 하듯 그도 해보고 싶다. 천천히 만 년의 사람을 쳐 넣는다. 또박또박 글자가 화면에 나타난다.
“누구야?”
갑자기 어디선가 놀라 날 선 목소리가 튕겨져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