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다음 한꺼번에 웃음을 터트린다. 갑자기 화면 앞이 웃음바다가 된다.
“한데 왜 여자는 우리를 내버려두는 걸까? 왜 지난 번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거지?”
이든이 웃음을 뚝 그치더니 말한다. 그 말에 웃음소리가 일시에 싹 거두어진다.
“여자가 이 글을 쓰고 있다면 우리가 글을 읽어내는 것을 쓰고 있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알고 있다는 건데, 왜 방해하지 않는 거지? 방해해야 마땅한 거 아냐?”
이든이 다시 불을 지핀다.
“허긴?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게 수두룩해. 이든이 말한 것뿐이 아니야. 모든 게 다 말이 안 돼. 하나부터 열까지.”
아미가 불기운을 제대로 받았는지 열을 올린다.
“그건 아미 니 말이 맞아. 여자가 쓰고 있는 글도 우리가 살아내는 것과 너무 달라. 뼈대는 같은데 남의 살점을 붙이고 있는 느낌이야. 그동안 여자가 쉼 없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멈추는 걸 딱 한 번 느꼈을 뿐이야. 우리에게서 시간이 늘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어.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가 눈치 채고 막아버린 걸까? 멈추는 걸 느끼지 못하도록.”
들이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다.
“그게 이상해. 여자가 쓰고 있는 글도 그렇고. 우리 이야기는 맞는데 어색해. 아무리 읽어봐도 우리가 고스란히 그 속에 담겨있지 않아. 여자의 상상대로라면 거의 들어맞아야 하는데 말이야.”
뫼도 고개를 갸웃갸웃 한다. 맞춰보려 하지만 겉돌고 있는 게 눈감고도 보인다.
“일단 지켜보자! 지금으로선 마땅한 방법이 없어. 그 딴 것에 얽매이지 말자! 우리의 삶이 여자의 상상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잖아. 그걸 알아낸 것만 해도 어디야.”
들은 매듭을 짓고 싶다. 물고 늘어져봐야 제자리를 맴맴 돌 뿐이다. 안에서 맴돌아 봐야 보이는 건 빤하다. 보이는 것조차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빠져나와야 한다. 그래야 다른 것들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그게 좋겠어. 궁리를 짜내 봐야 여자에게 우리를 간섭할 방법만 제공해주는 꼴이 되고 있어. 봐! 멈추는 걸 우리가 느끼지 못하도록 해버렸잖아. 맞서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고 있어.”
뫼도 들의 말에 수긍한다.
“그래서, 어쩌자고?”
아미가 갑자기 화를 낸다.
“지켜보자고.”
뫼가 차분하게 대답한다.
“어느 세월에? 시간이 몇 가닥이라도 돼? 갈아타고 출발하기만 하면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거냐고?”
치밀어 오른 화가 누그러지지 않는다. 지켜본다고 일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미적미적 끌려가고 싶지도 않다. 밀어붙여도 시원치 않다.
“시간이 몇 가닥 됐으면 좋겠다. 그럼 갈아타고 다시 시작하면 되니 조급하게 굴지 않아도 될 테고. 한데 그게 아니라 나도 조급해. 여유부리는 거 같아? 내 속도 타들어가. 그래서 읽고 또 읽고, 잠자는 시간까지 줄이면서 읽어대고 있어. 한데도 똑같아. 그래서 좀 지켜보자는 거야.”
“그냥 무턱대고?”
“그건 아니야.”
“그럼?”
“여자의 심기를 건드려보려고. 여자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하거든.”
뫼가 생각을 드러낸다. 아미도 거기엔 격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방법은 있어?”
“찾아봐야지.”
“미안. 여자만 생각하면 자꾸 화가 치밀어 올라서.”
아미가 눈물을 글썽인다. 갑자기 분위기가 서먹서먹해진다.
“여자는 잠시 밀쳐두고 자료를 찾아보는 건 어때? 그것도 우리가 찾아내야 하잖아.”
들이 둘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다.
“어디서, 어떻게?”
“어디? 여자의 상상 속에 있지 않을까?”
“그럼 또 글을 읽어야 하는 거야? 난 이제 못하겠어. 머릿속이 마구잡이로 엉켜서 지끈거려.”
버들이 응석부리듯 말한다.
“또 읽으라면 머리에 쥐가 날 거 같아. 그 여자 내 손에 잡히기만 해봐. 아작을 낼 테니까.”
누리도 멀찍이 달아나고 싶다. 화면만 마주하고 읽어내는 것은 넌더리가 난다.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기를 마다한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하다.
뫼는 버들과 누리를 멀건이 바라본다. 해야 한다고 밀어붙일 수가 없다. 며칠 동안 먹는 시간을 빼고 매달려 왔다. 다들 지칠 대로 지쳐 있다. 막막함이 밀려온다. 여자에게로 향하는 노여움은 그득한데 힘이 미치지 못한다. 주저앉고 싶다. 한데도 버들과 누리처럼 물러날 수가 없다. 들을 본다. 들의 눈빛은 그나마 살아있다.
“알았어. 나머진 내가 찾아볼게.”
뫼가 제자리를 찾아 말 끈을 동여맨다. 결과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시작한 만큼 끝을 봐야 한다. 어중간하게 그만둘 수는 없다. 처음 멋모르고 만 년의 삶을 시작했을 때를 생각하면 참 많은 것이 달라졌다. 생활이야 어차피 단조로웠다. 열매로 배를 채우는 거야 생활이라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땐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누군가 또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비록 여섯이 전부지만 그래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사람들이다. 그들 중 누구 하나도 잃을 수는 없다.
다들 피곤함에 절어 제 집으로 돌아간다. 들이 가다가 다시 되돌아온다.
“왜?”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나도 그래. 놓여나지가 않아.”
“계속해서 읽어보자! 우리가 놓친 것들이 있을지도 몰라.”
여자의 글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화면을 바꾸지 않은 채 여자의 글을 읽어 내려간다. 맞물리지 않는 부분들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딱 들어맞지가 않는다. 여기저기서 삐걱거리고 있다. 복잡하게 이어지는 자신들의 삶과는 달리 아주 가지런하다. 생각도 치밀하게 짜여 있다. 여자의 글은 앞뒤가 잘 들어맞는다. 그들의 복잡하고 어수선한 삶이 여자의 상상 속에서는 질서를 만나 정돈이 되어 있다.
“이상해. 분명 우리 이야기인데, 낯이 설어. 잘려나간 부분들이 너무 많아. 어떻게 된 거지? 여잔 왜 우리를 상상으로 잉태해놓고 우리의 삶과 다른 이야기를 쓰고 있는 거지?”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잠재울 수가 없다. 잡힐 듯 말 듯 애간장을 태운다. 들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너는? 너는 어때?”
“나도 이상해. 읽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여자의 상상 속에 갇혀서 살고 있다 생각했어. 한데 이 글은 갇혀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
들이 머뭇거리다 말한다.
“맞아. 나도 그런 느낌이 들어. 왤까?”
“여자의 글은 우리의 삶을 치밀하게 옥죄고 있지 않아. 우리가 실제 살아내고 있는 삶보다 엉성해. 앞뒤는 가지런하지만 뼈대와 뼈대 사이가 꽉꽉 채워져 있지 않다고. 그게 숨통을 트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일부러 그런 걸까?”
“글쎄? 아직은, 여자의 생각이 뭔지 알 수가 없어.”
“여자가 자신을 꼭꼭 숨기고 있어서야. 우리가 이렇게 설쳐대는데도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잖아.”
뫼는 들의 생각을 이어가본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다. 여잔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물론 자신들이 생각하는 테두리 안에서다. 여자 쪽에선 다를 수 있다.
여자 쪽에서라면? 입장을 한 번 바꿔본다. 피조물이 맞서온다면 어찌 할 것인지 생각해본다.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긴 어려울 거 같다. 피조물들의 맞섬, 괘씸하다. 어떤 식으로든 그걸 드러낼 거 같다. 거기까진 어렵지 않다. 그걸 어떻게 드러낼까, 하는 곳에 이르자 생각이 멈추고 만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도 도움이 안 돼.”
뫼가 말끝에 고개를 두어 번 가로 젓는다.
“일단 좀 더 지켜보자! 글을 읽었다고 당장 모든 걸 낱낱이 다 알 수는 없잖아. 이제 시작이야. 느긋한 맘으로 기다려보자고. 그럼 언젠가는 알 수 있지 않겠어?”
들이 뫼의 마음을 다독인다. 그녀는 어느 한쪽으로 조급하게 말려들어가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은 화면 앞을 떠나지 않고 끈덕지게 앉아 여자가 써내려가는 글을 눈으로 따라 읽는다.
여자는 그들의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글쓰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가끔 자판 두드리는 것을 멈추기도 하지만 아주 떠나지는 않는다. 그때마다 만 년의 사람을 입에 올린다. 만 년의 사람을 읊어대는 게 상상을 매끄럽게 이어주기라도 하는 눈치다.
그때마다 둘은 몸서리를 친다.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여자가 읊어대는 만 년의 사람이 썩 기분 좋게 다가오지 않는다.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읽어 내려가도 튀어나오는 게 없다. 화면 앞에서 눈동자만 굴리는 게 지루하다. 눈꺼풀이 묵직하다. 둘이 번갈아가며 하품을 해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