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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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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익히기


BY 한이안 2015-06-11

맞서야 한다는 생각에는 모두가 한 마음이다. 한데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는다. 지루하게 침묵이 이어진다. 그래도 다들 묵묵히 견딘다. 투덜거릴 문제가 아니다. 제 몫의 삶을 되찾는 일이다. 침묵이든 고통이든 참아내야 한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지만 만만치가 않다.

한 문장만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해보자! 힘은 들지만 띄엄띄엄 소리가 나오기는 하거든. 내 생각에 한꺼번에 모든 걸 뒤바꿀 수는 없어. 그러니 문장을 조금씩 늘려가는 방법으로 시작하는 거야. 그게 쌓이면 언젠가는 그 여자의 상상에서 벗어날 날이 올 지도 몰라.”

뫼가 생각을 거듭한 끝에 조심스럽게 꺼내 놓는다.

그 기간을 줄일 수 있는 다른 수는 전혀 없는 거야?”

뫼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그렇게 해보자! 나도 이런 저런 수를 떠올려 봤지만 아무리 헤집어 봐도 뾰족한 수는 없어. 그냥 부딪혀 보는 거야. 그게 뾰족한 수를 찾아내는 것보다 빠를 지도 몰라.”

이든도 생각이 비슷하다는 것을 내비춘다. 뫼와 이든뿐이 아니다. 다들 그 쪽으로 생각이 옮겨가고 있던 참이다.

하나 더. 어떤 일이 있어도 노여움은 드러내지 말자! 그건 여자의 상상력을 부추길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여자는 자신의 작품에 우리의 감정을 이용하여 재미를 더하고 싶어 할 거야. 그러니 여자가 미워 죽겠더라도 그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지는 말자!”

이든의 말이 맞아. 노여움을 드러내는 건 여자에게 상상하는 즐거움을 더해줄 뿐이야. 우린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함을 잃으면 안 돼. 어쩜 그게 여자가 노리는 것일지도 몰라. 되도록 우리는 여자의 노림수에 걸려들지 않는 게 좋아. 그렇게 하는 게 조금이라도 일찍 여자의 상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이 돼줄지 몰라.”

뫼가 못을 박듯 이든의 말을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정리한다.

알았어. ‘엿 같은’, ‘빌어먹을’, ‘염병할 여편네이런 말을 더는 하지 말아야겠네?”

누리의 말에 모두가 삐죽삐죽 웃는다. 그래도 웃음이 남아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일단 배부터 채우자! 먹어야 힘이 날 거 아니야. 뫼를 봐! 먹였더니 이렇게 일어났잖아. 여자와 맞장을 뜨려면 뭣보다도 속이 든든해야 해. 헤이, 남자들, 가자고? 니들은 여기서 좀 쉬고 있어. 아니면, 여자의 상상력을 아작낼 수를 찾아보던가.”

누리가 꿀꿀한 기분을 털어낸 듯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들과 버들, 아미도 꿀꿀함과 시름을 다 내려놓고 먹거리가 오기를 기다린다. 비로소 배고픔이 느껴진다. 잠잠했던 뱃속이 시끌벅적하다. 노염을 가라앉히고, 길을 찾아 헤맬 때는 얌전했던 배다. 자신도 다른 것에 밀려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제야 자기를 돌봐달라고 칭얼댄다. 그런 걸 보니 어떤 사람들에게 배를 채우는 것은 삶의 첫째 조건은 아닌가 보다. 다들 배고픔을 잊고 여자의 상상에서 벗어날 길을 찾는 데 매달렸다. 뫼는 힘을 죄 잃어가면서도 여자의 상상에 맞섰다. 그럴 때 잊거나 버릴 수 있는 거라면 그건 삶의 첫째 조건이 아니다. 그래도 먹을 걸 보니 반갑긴 하다. 다들 허겁지겁 배를 채운다.

먹는 즐거움, 채우는 즐거움, 그게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까?”

버들이 배를 채우고 나니 행복한 모양이다. 뒤로 벌렁 드러누우며 말한다.

아무도 버들의 행복에 찬물을 끼얹지 않는다. 어차피 여자의 상상 속에서 나오는 말이다. 탓해봐야 그것도 여자의 상상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즐기기로 한다.

나도 배부르니 행복하다.”

들이 버들 옆에 드러눕는다.

우리도 눕자!”

다들 손을 위로 뻗은 채 둥그런 원을 그리고 눕는다. 모두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 있다. 버들의 행복이 모두에게 전염된 모양이다. 그걸 피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난다.

들은 여자를 떠올린다. 자판 위에서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여자다.

나쁜 사람 같진 않았는데. 우릴 이곳에 가둬놓고 즐길 사람은 아니었어. 사람은 겉보기와 딴판인가? 생각이 겉으로 다 드러나는 건 아닌가? 생각을 드러나지 않게 꽁꽁 숨길 수도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그게 아니라면 여잔 나쁜 사람은 아니야. 한데 우릴 여기에 가뒀어. 7987년을 건너뛰게 해놓고 돌아갈 수도 없게 만들었어. ?’

들의 생각은 거기에서 멈춘다. 아무래도 뭔가가 어긋난 거 같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여자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 그럼 뭐라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 글자 익히는 거, 그만둘 거 아니지?”
?”

여자가 쓰고 있는 글을 읽어보고 싶어. 우리에 대한 자료도 봤으면 하고. 두 가지를 읽어보면 그 속에서 뭔가는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니 말대로 상상을 통해 단숨에 이곳으로 왔다면, 또 그 과정에서 어떤 법칙을 따랐다면, 그게 뭔지도 알 수 있을 거 같고. 지금 마땅히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런 저런 이유로.”

그건 내 생각일 뿐이야.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그래도. 그래도 손 놓고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잖아. 어차피 배우기도 해야 되고. 글을 읽을 수 있다면, 나름 재미도 붙지 않을까? 맨주먹으로 맞서는 것보단 나을 거 아냐.”

그렇지? 자료를 찾아내도 글자를 읽을 수 없으면 눈 뜬 장님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여자가 상상으로 화면을 빼곡하게 채워도 아는 게 없잖아. 그냥 무턱대고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잖아. 왜 그런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말이야.”

그래. 니 말이 맞아. 글을 익히는 게 먼저일 거 같아. 그럼 적어도 엉뚱한 데서 헤매는 것은 피할 수 있을지 몰라. 그 만큼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것도 같아.”

그럼 글자 익히는 것부터 하자! 지금 당장.”

들이 몸을 일으켜 뫼를 바라본다. 뫼도 몸을 일으킨다.

뭐야? 니들 둘이서만. 우리도 끼워 넣어라?”

이든이 둘이 속삭이는 소리가 거슬리는지 고까운 마음을 드러낸다.
맞아? 왜 니들 둘이만 주고받아? 우리는 쏙 뺀 채 말이야.”

누리도 둘이서만 속삭이는 게 귀에 거슬리던 참이다. 이든의 말에 거들고 나선다.

그랬다면 미안. 갑자기 뫼가 쓰러지기 전의 일이 생각나서.”

뭔데?”

그게, 화면을 열면 여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여자가 쓰는 글이 화면에 떠. 화면에 빼곡하게 올라오는데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있어야지. 우리의 말과 행동, 생각일 거라 여기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이거든.”

들이 대충 간추려 말한다.

그게 왜?”

그게 바로 우리들의 생각과 행동과 말이거든. 생각은 그런데 실제 그런지는 확인을 해볼 수가 없어서 모르는 일이고. 그래도 우리가 하는 말이 그대로 거기 올라온다는 건 확실해. 확인도 해 봤어.”

그래서?”

우리가 한 말을 되짚어 읽어보면 글자를 익힐 수 있을 거 같아서.”

정말?”

아미가 벌떡 일어난다.

.”

왜 이제야 말해. 진작 얘기했어야지?”

들의 대꾸가 끝나기 무섭게 아미가 탓을 한다.

말을 안 한 게 아니라, 말을 못했어. 뫼가 쓰러져서 다들 정신이 없었잖아. 그 바람에 까마득히 잊었어. 뫼가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잊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뫼가 쓰러지기 전에 화면 앞에서 그걸 확인하고 있었거든. 한데 여자가 상상하기를 멈추고 자리를 떴던 거야. 그러면서 우리에게 그 일이 일어났고.”

그럼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이든이 허둥대며 뫼와 들을 화면으로 떠민다.

글자가 어렵진 않았어?”
어렵진 않았지, ?”
. 어렵진 않았어. 우리가 한 말을 화면에서 찾아내 익히면 돼. 그게 좀 번거로울 뿐이지.”

그거야 뭐? 우리도 다들 그 정도는 해낼 수 있어. 안 그래?”

당연하지? 다른 사람 일도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의 일인데. 이든 니 말대로 그 정도는 나도 가뿐하게 해낼 수 있어.”

아미가 이든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 아미도 해낼 수 있다고 하잖아. 버들, 너도 할 수 있지?”

물론이지. 난 맹물인줄 알아? 나도 그 정도는 거뜬하게 해낼 수 있어. 걱정 붙들어 매!”

그럼 따라와!”
다들 화면 앞으로 우르르 몰려간다. 뫼가 화면을 불러온다. 여자의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우리가 한 말들이라는 거지?”

여기야. 이든 니가 한 말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반복해봐!”

-금 우--가 한 말----는 거-?”

글자를 잘 봐! 그리고 이든이 한 말을 한 자 한 자 소리내봐! 그럼 소리에 해당하는 글자가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있어. 그 모양을 기억해 둬야 해. 그래야 다음에 그 글자를 다른 글에서도 읽어낼 수 있어.”

글자가 많을까?”

그러게. 나도 글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어. 이렇게 하면 우리도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걸 알아냈을 뿐이야.”

누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글을 읽고 쓸 수 있다고 하니까 그것만 해도 횡재한 기분이다.

, 나는 그 글자들 벌써 외웠어.”
버들이 자랑스러움을 내비친다. 다들 버들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 어렵지 않잖아.”

그러게. 아까 그 글자들 어디 있어? 나도 버들처럼 외우게.”

누리가 화면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말한다.

그럴 필요 없어. 내가 가르쳐줄게.”

버들이 글자 모양을 그려가며 누리에게 가르쳐준다. 누리가 입으로 오물오물하며 소리를 낸다. 그러더니 씩 웃는다.

나도 다 외웠어?”

. 쉽네.”

다들 글자 익히기에 정신이 없다. 차례로 얼굴에 미소가 뜬다. 여자의 글뿐만 아니라 화면에 뜨는 글들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달콤하다. 더는 눈 뜬 장님처럼 멍하니 화면만 들여다보다 빠져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벅차게 뿌듯하다.

다들 머리가 나쁘진 않은가봐! 금방 외워대잖아. 그럼 이번엔 다른 글자들을 익혀보자. 누가 한 번 말해봐!”

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서로 말하겠다고 나선다. 뫼가 차례를 정해준다. 누리가 맨 먼저 말할 기회를 얻는다.

만 년의 사람.”

다들 화면을 보고 글자를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쓴다. 그리곤 금세 외워낸다. 기뻐 펄쩍펄쩍 뛰며 서로 손바닥을 부딪친다.

우리 이런 건 어디서 익혔을까?”

?”

손바닥을 부딪치고 하는 이런 것들? 니들은 아무렇지 않아? 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들이 신기하고 궁금한데.”

그러게. 듣고 보니 그러네? 버들, 넌 참 신기해. 그런 생각을 다 해내고. 난 생각지도 못한 건데 말야.”

들이 버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부럽다. 버들의 말은 요란스럽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고 달콤하다. 차분하지만 현실에서 머뭇거리는 자신과는 영 딴판이다.

그 대신 너에겐 뫼만큼이나 진득한 면이 있어. 그게 얼마나 의지가 되는데? 난 널 보면 기대고 싶어져. 넌 절대 쓰러지지 않을 거 같거든.”

버들 말이 틀리지 않아. 나도 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거든.”

누리가 건들거리며 버들의 말을 거들고 나선다.

너도, 너에게도 있어? 너만 가지고 있는 거. 읊어봐?”

이든이 누리를 겨냥하여 말한다.

됐네요.”

누리가 이든의 말꼬리를 잘라낸다. 읊어봐야 빤하다. 그럼에도 말로 토해내는 것은 원치 않는다.

들은 이든의 말을 되새김한다. 너만 가지고 있는 거, 그건 누리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다들 각자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다들 드러내는 쪽이 조금씩 달라. 기억하고 있는 것들도 그렇고. 우리의 운명이 큰 틀 속에서는 같을지언정 개개인으로 좁히면 달라. 우린 모두 정상이야.”

들이 의미 있는 말을 한다.

뭐가?”

우린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지녔어. 다들. 유별나지도 않고 크게 비틀어지지도 않았어.”

그게 왜?”

조금은 마음이 놓여. 적어도 우리끼리 싸우고 흩어지게 만들지는 않을 거 같거든. 조금씩 다른데 거슬리게는 아니야.”
치밀하게 계산해서 우리 기억을 건드렸나?”

아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들과 뫼의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

설마?”

버들, 설마가 아니야. 같은 틀 속에 넣고 우리를 잠재웠다면 생각도 말도 행동도 같아야 하잖아? 같은 것만 남기든가, 아니면 같은 것만 지우든가. 한데 우리는 들 말대로 모두가 조금씩 달라. 관심도 조금씩 다르고, 반응 정도도 다르고, 기억하고 있는 것들도 다르고. 우리가 지니고 있던 본래의 것을 최대한 남겨둔 것인가? 그런가?”

같은 것만 지웠나보지?”
그런 게 아니라니까? 기억하고 있는 색깔이 달라. 기억하고 있는 짐승도 달라. 그런 것들은 관심하고는 크게 상관없이 다들 알고 있었을 거 같은데 말이야.”

듣고 보니 그러네? 난 왜 그런 생각을 못하는 거지? 들도 아미도 하는데 말이야.”

달라서 그렇다니까? 조금씩 달라서. 버들, 넌 달콤한 말과 분위기에 약하잖아. 잘 웃고, 잘 먹고, 기쁨도 먼저 드러내고. 그게 나와 다른 너만의 색깔이야.”

다들 잠시 글자 익히기를 잊은 채 말 재미에 빠져 있다. 하지만 오래 가지는 않는다. 다시 글자 익히기로 돌아온다.

글자 익히기는 여러 날 계속된다. 과정이 거듭되면서 화면속의 글이 뜻을 지닌 채 눈에 들어온다.

이제 모르는 글자는 없는 거 같아. 여자가 쓰는 말들이 내용이 되어 눈에 들어와.”

들이 화면에서 모르는 글자가 있는지를 살핀 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