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가 악을 써댄다. 아무도 다독이거나 말리거나 하지 않는다. 그냥 딴 곳을 바라보고 있다. 가슴이 텅 빈 것처럼 쓰려온다.
“지랄할 여편네. 지나 이곳으로 오던지,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를 이 엉뚱한 이곳에 데려다 놔? 2013년으로 돌아가기만 해봐라. 내 꼭 찾아내서 아작을 내버릴 거야.”
여자를 바스러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누리는 주먹을 꽉 쥐고 비튼다.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진다. 화풀이 말을 좔좔 쏟아내도 성이 차지 않는다. 뫼와 들, 아미가 2013년을 들먹거려도 그런가보다 했다. 소 닭 보듯 마음을 쓰지 않았다. 끌려가다가도 이내 되돌아오곤 했다. 신나게 만 년을 살아내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그게 물거품이 되어 스러지고 있다. 거창한 것을 꿈꾼 것도 아닌데 앗아가려 하고 있다. 꿈조차도 여자의 상상에서 나오는 거라 한다. 가슴이 불을 지핀 것처럼 뜨겁다. 가슴을 움켜쥐고 주저앉는다. 다들 그런 누리를 지켜보기만 한다. 뭐라 말을 해줄 수가 없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나도 이건 참을 수가 없어. 2013년도, 7987년 동안의 잠도 참아낼 수 있었지만 이건 아냐.”
이든이 강하게 도리질을 한다. 누리 못지않은 충격이 그에게도 밀려온다.
“망할 여편네. 내 가만 두나봐라. 찾아서 아작을 낼 거야.”
누리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다시 혼잣말을 쏟아낸다. 뫼의 시선이 이든에게서 누리에게로 옮겨간다. 입안이 모래가 굴러다니는 것처럼 버석거린다. 하지만 생각은 이든의 ‘어떻게’라는 말에 머물러 있다.
“우리의 의지가 여자의 상상을 앞질러야 해. 문제는?”
느낌이 조금도 묻어있지 않는 목소리다.
“문제는 빤하지. 우리 몸에 있는 힘이 죄 빠져나간다는 거 아냐.”
누리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다. 혼자 악을 써대면서도 옆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맞아. 내가 겪었던 이 일을 겪어 내게 될 거야.”
뫼가 말을 돌리지 않고 흔들림 없이 대꾸한다.
“뭐 이런 엿 같은 세상이 다 있어?”
누리가 주먹을 불끈 쥐며 일어난다. 분을 삭여내려 해도 삭여지지가 않는 모양이다. 말소리가 고함에 가깝다.
다들 말을 잊고 잠시 누리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는다. 앉아 있기는 하지만 마음까지 온전히 앉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마음은 누리처럼 서성이고 있다. 아미는 팔짝팔짝 뛰고 싶은 것을 누리를 보며 겨우 참아내고 있다.
“지금 우리의 이런 모습도 여자의 상상에서 나온 작품이겠네?”
이든이 맥 빠진 목소리로 씁쓸하게 말한다.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는다. 말을 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아픔뿐이다.
“난 이대로 여자의 상상에 끌려갈 수는 없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의지를 끌어낼 거야! 내 삶을 되찾을 거라고! 이건 사는 게 아니야. 몰랐다면 모르지만, 알고서는 그렇게 살 수 없어. 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여자가 상상을 멈추더라도 내 의지를 끌어내면 돼?”
아미가 벌떡 일어난다. 누리가 잠잠한 틈을 타 그녀의 감정이 기지개를 켠다. 여자가 있는 화면으로 달려가 마구 때려 부수고 싶다.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진다. 그런 아미를 들이 불안하게 쳐다본다. 아리다. 아민 결국 흑흑 울음을 쏟아낸다.
뫼는 차마 아미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다. 냉큼 그러라고 말을 해줄 수가 없다. 가슴이 시리도록 아프다.
“뫼! 뭐라 말 좀 해봐!”
아미는 고개를 돌린 채 말이 없는 뫼를 참을 수가 없다. 들도 시선을 내리깐다. 버들도, 이든도 마찬가지다. 아미의 말이 모두의 가슴을 쿵쿵 울려댄다. 하지만 마음속으로까지 스며들지를 못한다. 다들 그러자고 냉큼 말을 보탤 수가 없다.
웃음을 쏟아내도 말끔히 걷어 내지지 않을 만 년의 쓸쓸함이 켜켜이 쌓이고 있다. 운명이라는 말을 꺼낼 때만 해도 장난처럼 웃을 수 있었다. 세상을 부대끼며 살기에 여섯은 턱없이 모자랐다. 누구 하나라도 잃게 될까봐 다들 저도 모르게 마음을 썼다. 쓸쓸함이 몸에 들러붙는 게 싫었다. 한데 그런 노력이 아무런 힘이 돼주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너무도 쉽게 밀려난다.
분하고 억울하다. 몰랐을 때야 어쩔 수가 없다. 몰랐기에 그게 삶인 줄 알고 나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알아버렸다. 제 몫이라 생각했던 것이 제 몫인 게 하나도 없다. 여자의 상상과 엮여서 꼭두각시 인형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여자와 맞서는 한이 있더라도 되찾아야 한다. 그 생각이 뼛속까지 사무친다.
한데 여자와 맞서는 것은 하늘에 맞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미 뫼가 그걸 겪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대가는 혹독하다. 누구도 그걸 겪어내자고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걸 고분고분 받아들일 수는 더더욱 없다.
들이 고개를 마구 휘젓는다. 뫼가 망설인다면 자신이라도 나서야 한다.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벗어나야 한다. 진짜 삶을 살고 싶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운다.
“그래 아미, 나도 이렇게는 살 수 없어! 내 몫으로 되돌릴 거야.”
들이 말에 힘을 준다. 제 몫을 되돌려 받는 일에 어물어물 할 수가 없다. 아미가 눈물을 글썽인다.
“들, 고마워.”
아미는 들이 너무 고맙다.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들의 손을 잡는다. 이든도 다가와 손을 얹는다. 누리도, 버들도 차례를 정해놓고 기다린 사람처럼 다가온다.
“다들 마음이 모아졌어. 그럼 이제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들이 뫼를 본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부터 마음에 새겨둬야 돼. 우린 그냥 맞서는 게 아니야. 우리의 목숨을 내놓고 맞서는 거야. 그걸 미리 생각지 않고 시작하면 힘든 상황에서 맥없이 주저앉을 수도 있어. 힘겨워서 포기할지도 모른다고. 그걸 이겨내려면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해. 그래서 섣부르게 니들을 부추길 수가 없었어. 그걸 이미 겪었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알고 있으니까.”
다들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모르는 바가 아니다. 망설일 때 이미 그 부분을 생각했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여자의 상상에 맞서려고 하는 건 위험해. 갑절은 더 힘이 들 거야.”
“그럼, 우선은 여자의 상상에 맡기자는 거야?”
“응. 그러다 여자의 상상이 멈추면 그때를 이용하는 거야. 그때를 이용해 조금씩 시도해 보는 거야. 한꺼번에 바꾸려 하면 것도 위험해. 그러면 내가 겪었던 것을 니들도 겪게 될 거야. 그건 죽음에 이르는 지름길이야. 난 니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살 수 있었어. 어쨌든 우린 살아 있어야 해.”
“그건 지금도 하고 있어.”
아미가 빤한 얘기라는 듯 툭 자르고 들어온다.
“알아. 하지만 우리가 여자에게 맞서는 것은 제대로 살아내기 위해서야. 그런 뜻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고. 여자와 맞서다 허무하게 죽어 없어질 수는 없잖아.”
뫼는 아미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대꾸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최소한 죽음으로 밀려나지는 말자는 말 아니야?”
“맞아, 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음만은 안 돼. 그건 시도할 수 있는 기회까지도 잃게 되는 거야. 끝이라고.”
“죽을 각오로 하라며? 한데 죽음은 안 된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그리고 죽음을 피하면서 우리가 우리 뜻대로 살아낼 수 있어?”
아미가 뫼의 미적거림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말한다.
“죽을 각오는 죽음이 아니야. 최소한 살아있어야 한다는 말도 죽음을 무턱대고 밀어내라는 뜻은 아니고. 죽을 각오로 하되 죽음에 몸을 내던지지는 말자는 뜻이야. 우리는 누구의 상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생각과 의지대로 살기 위해 맞서고 있어. 우리는 살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야.”
뫼가 아미에게 눈길을 옮긴다. 그리곤 그녀의 분을 다독이듯 조용조용 말한다.
“그러려면 좀 더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겠네?”
“맞아 이든. 이제부터 우리가 뜻을 모아야 하는 부분이야. 내겐 그에 대한 계획이 없어. 나도 그 부분에선 니들과 똑같아. 상황을 알아채고 맞선 경험은 있지만 계획을 세워 맞섰던 적은 없었어. 그냥 아무 것도 모른 채 일방적으로 당해왔어. 이제야 그걸 알게 됐고. 그래서 나도 니들에게 해줄 말이 더는 없어.”
“우리 모두 함께 알아내야 하는 거구나? 이제부턴 그걸 찾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하는 거네?”
들이 나선다. 뫼가 고개를 끄덕인다. 다들 더는 토를 달지 않는다. 모든 게 끝나서가 아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시작은 가볍지가 않다. 늘 만반의 준비를 하느라 마음이 쉴 짬이 없다. 그들은 마음의 준비부터 시작한다.
잠시 모두의 표정이 굳어진다. 여자가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 같다. 여자도 자신들이 튕겨져 나가는 걸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것까지도 셈에 넣어야 한다. 그걸 생각하며 머리를 짜내는 게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눈빛은 반짝인다.
“우리가 맞서는 걸 알면 여자도 가만있지는 않을 텐데? 여자가 덫을 놓거나 할 가능성은?”
들은 아무래도 여자가 걸린다. 여자가 순순히 물러날 거 같지가 않다. 마음을 비운 듯 한 여자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본모습은 아니다.
“그건 마음을 놓아도 돼. 여잔 우릴 한꺼번에 옭아매서 어디다 가둬둘 생각은 없어. 이미 우릴 이 일만 년으로 보냈어. 여기가 여자가 고른 덫 아니면 그물이야. 게다가 우린 그 여자 작품 속의 등장인물이야. 등장인물을 모두 없애지는 못해. 그러면 작품은 끝나버리거든.”
뫼가 단호하게 말한다. 들도 뫼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자가 떠오른다. 마음을 비운 듯한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자신감 때문일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런 것인지는 여자와 맞서봐야 알 수 있는 문제다.